EP.47 쯔바이핸더의 정당한 주인(1)
그냥 여기서 정액 갖다바치면서 편하게 살까.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은, 곧 내 오랜 친구에 대한 상념에 의해 사라지고야 만다.
내 쯔바이핸더에 대한 생각에 의해서.
이대로 그냥 눌러앉아 버린다면 내 반쪽은 찾아갈 수 없을 테지. 내 오랜 친구, 쯔바이핸더를 구해낼 수 없을 테니까.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정의도 찾아야 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미 떠맡아버린 과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근무 태만을 저지르는 걸 본 유스티티아가 무슨 짓을 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쓸데없는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돈을 벌어오지는 않더라도, 그냥 순수한 기둥서방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계단을 완전히 내려오자, 우리 앞에 분수대가 중심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정원이 보였다.
어제 보았던 황궁의 정원처럼 무지막지하게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성 있는 아기자기한 장식이 돋보였다.
이 정원도 아마 노예들이 관리해주는 것이겠지.
정원을 가로질러 분수대 옆을 지나자, 둥근 식탁 위에 놓인 아침상이 보였다.
테이블 중앙에는 큰 덩어리 채로 놓인 빵과 치즈, 말린 무화과가 있었다. 두 개의 긴 의자 앞에는 각각 은잔과 나무잔이 놓여져 있었다.
먼저 은잔에 채워진 와인을 들이켰다. 확실히 어제 먹던 것보다 달달하고 도수도 낮았다. 아침부터 취하면 안되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우유의 향은 원래 세상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진했다. 치즈도 그랬으니, 이쪽 유제품들의 전반적인 특징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빵은 갓 구운 것인지 겉껍질은 바삭했고, 속에는 호두가 들어가 고소했고 부드러웠다. 큼직하게 찢어서 쫄깃한 무화과와 함께 곁들여 먹으니 미식이 따로 없었다.
“맛있네.”
그러자 코페시는 포도주에 빵을 찍어먹으며 대답했다.
“이런 건 원래 신선하기만 하면 다 맛있어.”
진짜 신나게 떡을 쳐대서인지 허기가 심각할 정도였기에, 음식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렇게 한창 아침을 흡입하던 중 정원 너머에서 익숙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을린 피부의 스파르타인, 테스티아였다.
“뭐야, 어디 갔다온 거야? 여기 한 바퀴를 벌써 다 돌았어?”
“시내 한 바퀴는 한참 전에 다 돌았다. 시청을 갔다오느라 늦었지.”
그리 말하며 테스티아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모습도, 말투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하기가 미묘하게 더 어려워진 느낌이었다.
사실 내가 진짜 NTL을 해버린 것이라면..?
“글라폴레스? 괜찮나?”
“예?!”
삑사리가 나서 소리를 질러버린 탓일까, 테스티아는 순간 흠칫 놀라버린 듯 했다.
“아, 아니 그저 표정이 미묘해보이길래 물어봤을 뿐이다. 혹시 불편한 곳이-”
"아닙니다. 그냥 잠이 좀 덜 깨서..."
일단 대강 둘러대었지만, 테스티아는 영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흠."
하지만 다행히도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추궁하거나 비난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코페시를 향해 시선을 돌린 채 말을 건넬 뿐이었다.
"아, 그렇지. 네게 줄 것이 있다. 시청에서 누군가가 네게 이걸 전해달라고 하더군."
그리 말하며, 테스티아가 허리춤에 메어 두었던 주머니를 열어 뭔가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테스티아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머리가 원형인 십자가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였다.
황동으로 된 이집트 십자가. 앙크라고도 하던가?
"...내가 이거 잃어버린 걸 어떻게 알고?"
코페시는 크게 동요하며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그러며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시스님의 사제들은 대단하단 말이지."
이시스가 뭐하는 신이었지.
내 지식이 신화에 통달한 수준은 아니기에,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시스가 오시리스 아내였다는 정도밖에 없다.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일반적인 그리스-로마의 올림포스 12신이 아닌 이집트의 신을 믿는 모양이다.
아니면 사실 둘 다 믿는 걸 수도 있다. 다신교에서 다른 신 같이 믿는 건 꽤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알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짤랑.
앙크 목걸이는 코페시의 피부색과 꽤나 잘 어울렸다. 둘 다 같은 이집트 출신이라 그런가?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네. 여러모로."
코페시는 그리 말하고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테스티아를 향해 가볍게 물었다.
음습한 이집트녀 자아 같으니.
“그나저나 시청은 갑자기 왜? 일당 더 올리려고?”
“아니. 글라폴레스 관련 일이다."
"예?"
"어제 네 검을 그리도 간절히 되찾고 싶어했으니, 그 방법을 찾아본 거다.”
난 아무 생각도 없이 아침이나 퍼먹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정보를 찾아와주다니.
테스티아는 신이다.
아니, 신 이상이다.
솔직히 하는 것도 없이 퍼질러 자고 있을 유스티티아보다 백 배는 더 인성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방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테스티아는 실로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기는 하다.”
있기는 하다라. 그렇다면 분명 제약 조건이 있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문제는, 네가 남자라는 거다.”
하여간 불길한 예감은 도대체가 틀리지를 않는다.
"그러니 치안대나 소방대에는 들어갈 수가 없겠지. 그러니 남은 방법은 검투사나 처형인이 되어 업무 중에만 검을 쥐거나, 아예 사제가 되어 내 검을 정당한 종교적 행위에 필요한 물품으로 승인을 받는 것이지.”
테스티아는 이어서 그리 말했다.
그러니까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란 소리다. 검투사, 처형인, 그리고 사제라.
사제는 불가능할테니 검투사나 처형인 루트를 타는 게 아무래도 최선이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코페시가 약간의 반발이 섞인 투로 테스티아에게 말했다.
“그거야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거고, 뭐 처형식 같은데 나가서 추종자들 끌어모으고 적당히 떼쓰면 소지권 얻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당장 나부터가 자유 검투사 된 게 여론타고 된 건데.”
"여론?"
“아, 내가 옛날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탈출한 식인악어를 때려잡았더니 검투사 학교에서 거의 반강제로 해방됐거든. 영웅행세 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라.”
이 인간도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뭘 때려잡아? 악어?
“악어를 잡았다고?”
악어는 존나게 강해서, 소설가로 하여금 쓰던 소설을 단숨에 연재 중지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악력을 가지고 있다.
죽은 소설가는 연재를 하지 못한다.
아무튼, 악어는 이토록 끔찍한 존재인 것이다.
근데 그런 괴수를 족치고도 사지가 멀쩡한 상태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내 질문에 코페시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답하였다.
“솔직히 나도 그 과정이 아직까지는 영 의문스럽긴 한데, 어떻게 잡으려고 하니까 잡아지더라.”
어찌된 것인지 이 집에는 망할 초인들만 사는 모양이다. 잡으려고 하니까 잡아졌다고?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검을 되찾을 방법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거다.
“어쨌든, 그러면 계획은 대략 이렇게 되는 건가? 먼저 처형인이나 검투사가 된 다음, 어떻게든 대중의 인기를 얻어서 유명해지고는 감정에 호소해서 검을 되찾는다? 제가 이해한 게 맞나?"
“그리 하면 될 것 같군. 하지만 장담컨데 처형인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내 물음에 테스티아가 답하였다.
근데 난 코페시한테 물어봤었던 건데.
그나저나 처형인이 낫다고? 어째 그게 어감은 좀 더 무서워 보이는데.
“어... 처형인이 검투사보다 나은 이유가 있습니까?”
“짐승을 때려잡는 건 남자가 할 일이 아니고, 검투사로 들어가는 거면 칼맞고 죽을 확률이 너무 높으니까. 그리고 만약 이긴다 해도 함부로 상대 검투사 죽였다가는 폭동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 검으로는 적당히 베고 끝내는 게 안될 것 같단 말이지."
테스티아에게 한 질문에 코페시가 답했다.
하여간 세 명이서 대화하면 이게 문제라고.
"근데 처형인이면 상대를 막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그렇지. 난 그쪽으로 가는 게 맞다고 봐.”
거기에 테스티아도 한 마디 더했다.
“그리고 소속 문제도 있다. 경험도, 추종자들도 없는 초보 검투사는 훈련도 해야하고 후원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할 테니. 한 번 계약을 마치면 원할 때 그만두기도 어려우니, 위험 부담이 큰 편이지. 하지만 처형인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칼날 달린 전차를 모는 기수나 뛰어난 궁수, 아니면 덫사냥꾼도 될 수 있지.”
정리하자면 계약이 좀 더 널널하고 난이도도 더 낮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처형인 쪽이 더 낫겠지.
“그럼 처형식은 보통 언제 열리는데?”
“글쎄, 범죄자가 충분히 쌓였을 때? 아니면 보통 축제 전날이라던가. 그래도 미리 시청에 말해놓으면 편하기는 하겠지. 일반적인 콜로세움 행사는 시청에서 주관하니까.”
좋다, 정보는 모두 모았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하는 것뿐.
시청이 내 검을 납치했다.
그러니 찾아낼 거다.
시장을, 쯔바이핸더를 찾아낼 거다.
그리고 되찾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쯔바이핸더의 정당한 주인이기에.
“코페시.”
“응?”
하지만 역시 하나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그리고 코페시는 계약 유경험자이니 나름 실리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강인한 결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같이 가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