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43화 (44/67)

EP.43 계란부터 사과까지(3)

로마의 황제가 내 앞에서 말을 걸어왔다. 정체모를 두 명의 여인을 양 옆에 대동한 채.

처음에는 시중드는 노예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눈빛이 부리부리한 걸 보면 아마 호위병이 아닐까 싶다. 둘 다 양 팔에서 잔근육이 눈에 띄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난 지금 뭘 해야할까?

아니, 그 전에 황제란 뭘까?

이게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무,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평생동안 이런 미식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새 일어서 있었던 코페시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 검투사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지 오래였다.

황제가 나타나면 일어서야 하는 모양이다.

“아, 그렇다면 실로 다행이로군. 하지만 지나치게 예법을 차릴 필요는 없다. 식사를 중간에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

루킬라의 답변에 검투사들은 다시 의자에 앉아 쇠고기 오펠라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런 옘병할, 일어났었어야 했는데.

정신이 멍해져버린 탓에 잘 보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예의를 차려 황제를 대하지 않았던 탓일까. 루킬라는 날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할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표백된 것 마냥 하얗게 변해버린 탓이다.

그렇게 좆되었음을 직감하고 거의 반쯤 굳어있을 때, 내 바로 옆까지 다가온 루킬라가 입을 열었다.

“얕은골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남전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자가 바로 그대인 모양이군?”

여기서 일어나야 하나? 아니면 아까 전에 그다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그냥 앉아 있는 게 더 나을까?

내 예리한 판단력은 후자의 선택지를 가리켰다.

난 정자세로 앉은 채, 심히 정제된 목소리로 질문에 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21세기 현대인이었다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TTS라 착각해도 무방했을 법한, 지극히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음성이 내 성대에서 새어나왔다.

이 목소리를 듣고서도 내가 지금 잔뜩 긴장한 상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대면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지.

“흐음…”

한편 루킬라는 내 주위를 아주 천천히 돌며, 긴 의자 위를 손톱으로 박자에 맞춰 두드렸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긴장의 증거.

단두대 앞에 선 루이 16세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을 때, 여제가 가볍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참 크구나.”

“…예?”

난데없는 섹드립에 난 심하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루킬라는 내 얼굴을 보며 잠시 코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키 말이다. 그리도 놀라는 것을 보면, 다른 무언가를 생각한 모양이지?”

사람을 놀리고 있다.

압도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사람을 농락하고 있다고.

“아, 그게…”

하지만 난 이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이게 그냥 일반적인 농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농담에 폭력으로 응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 뺨을 후려갈길 수도 없고.

“그래서, 요리는 입맛에 맞던가?”

다행히도 황제는 금세 주제를 전환했다. 내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아챈 건가?

아니면 그냥 내 반응을 보는 게 별로 재미없어진 걸 수도 있다. 둘 다일지도 모르고.

“시, 실로 그러했습니다, 폐하."

“두려워 말게나, 용맹한 남전사여. 그대가 짐의 손길을 무서워할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

아우구스타의 손이, 내 어깨를 훑었다.

“그대를 이 연회장에 부른 것은 치하하기 위함이지, 결코 위협하거나 징벌하고자 함이 아니네. 군공을 세운 자는 존중 받을 자격이 있으니 말이네, 비록 그 자가 남자라 해도 말이지.”

루킬라의 목소리는 이 묘한 상황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마치 어딘가에 빠져드는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서서히 소름이 돋고, 자장가를 듣는 듯한 느낌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묻지 않았군.”

바로 그때, 루킬라는 어투를 바꿔 나른한 기류를 깨어냈다.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직 내게는 정식 이름이 없었다. 검투사 부대에 속함으로서 얻은 가명만이 있을 뿐이지.

일단 그 가명을 대는 게 맞을 것이다. 원래 이름은 발음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글라폴레스라 불러주시면 될 겁니다.”

“그래, 글라폴레스여.”

루킬라는 잠시 내 이름을 입 속에서 굴려보는 듯, 뜸을 들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로마에 온 걸 환영하네. 운명이 그대의 앞길에 희생에 걸맞는 대가를 안배해놓았기를 빌지.”

“감사합니다, 폐하.”

내 대답을 들은 루킬라는 호위병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휴, 드디어 이 망할 위기가 끝났다.

이제서야 오펠라를 맛볼 수가 있겠구만.

한 조각 집어먹고는 음미해보았다.

오펠라는 간단히 말해 엄청나게 부드러운 양념 스테이크였다.

양념은 달고, 짜고, 기름지면서도 살짝 매콤한 향을 풍겼고, 고기는 한 번 씹는 순간 그대로 녹아내리는 듯 입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대체 무슨 조리법을 썼길래 이렇게 부드러운 걸까.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고기라니.

거기에 양념도 자극적이지만 결코 저급한 맛은 아니라,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분명한 황실 요리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오펠라와 함께 곁들여 나온 파우스티아 와인은, 앞서 나왔던 백포도주들보다 훨씬 짙은 색깔이라 거의 갈색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 맛은 색깔과는 달리 지금까지 마셨던 포도주들 중 가장 깔끔했다. 강한 도수와 향을 가진 와인으로 고기의 느끼함을 씻어내는 조합을 의도한 것이겠지.

솔직히 중세 요리보다 낫다. 둘 다 먹어본 입장에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황실요리에 한정했을 때의 얘기이긴 하지만.

검투사들과 나의 협공을 맞이한 오펠라는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근데 생각해보니 코스 요리란 건 원래 빠르게 흡입해서 치워 없애는 요리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이렇게 먹는 게 맞았나 싶다.

그래도 뭐, 맛은 있었으니까. 그거면 됐지.

“후식으로 시리아산 말린 사과를 준비해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음식은 말린 사과조각이었다.

맛은 그냥 맛있는 말린 사과였다. 다른 요리들과는 달리 소스나 꿀에 버무리기 보다는 그냥 재료 본연에 맛에 집중한 느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한창 사과 조각을 주워먹고 있을 때, 코페시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꺼야?”

“응?”

“너 여기 아는 사람 있어?”

“어… 아니.”

내 대답에 코페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잘 곳도 없겠네?”

그렇다.

난 이곳을 나가는 순간, 잘 곳도 갈 곳도 없다.

“그, 그러네? 나 이제 어디서 살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숙을 하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2세기 대도시에서 노숙을 했다가는 분명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되고야 말 거다. 어디서 여관방이라도 구해야 하나? 아니, 여관이 있기는 한가?

그리 걱정이 한창일 때, 코페시가 따스한 목소리로 제안을 건넸다.

“사실 우리네 집에 공간이 좀 남거든. 거기로 올래?”

이런 막대한 호의라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인데.

물론 함께 싸운 전우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 한켠을 흔쾌히 빌려주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우리네’ 집?”

“그래, 우리네 집. 나랑 테스티아랑 이페이아, 이 셋이 돈 모아서 도무스 하나 샀었거든. 없는 동안 관리 맡긴 사람도 나름 믿음직한 친구였으니까, 아마 그리 더럽지는 않을 거야. 아무튼 그래서 올 꺼야?”

내가 알기로 도무스는 고급 단독주택을 뜻하는 단어다. 그리고 검투사가 그리 돈을 못 버는 직종은 아닐 테니까, 검투사 셋이 합심해 산 집이라면 충분히 호화롭고도 남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소유권도 셋이 나눠가지고 있을 터, 한 사람의 동의만 구했다 해서 신세를 질 수는 없다.

“저 둘도 동의한 거야?”

“응, 이미 서로 얘기 다 끝내놨어. 너 와도 문제 없다더라 다들.”

다들 친절하구만.

이런 호의를 그냥 거절해버리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그...럼 잠시 신세 좀 질게.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그래. 물론이지. 너 없었으면 우리 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방 하나 빌려주는 거야 별 거 아니지.”

코페시는 씩 웃으며 그리 답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계란부터 사과까지 다 먹은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알현실 바깥으로 나가니, 어느새 슬슬 어둑해지는 하늘이 보였다.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두 시간, 세 시간? 아마 그쯤 되었겠지.

그때, 익숙한 얼굴의 노예가 내게로 다가왔다. 마차에서 내릴 때 짐을 맡겼던 바로 그 노예였다.

그녀는 긴 막대기에 매단 보자기를 어깨에 들쳐메고 있었는데, 그것이 대다수 군단병들의 군장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저기 안에 내 옷가지들이 들어있겠지.

특이한 점이라면, 노예의 오른손에 자그마한 나무 상자가 들려있었다는 거다.

그것을 내게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용맹하신 검투사님, 이걸 받아주시죠.”

“예? 이게 뭐죠?”

내 질문에 노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며, 답하였다.

“이 안에 든 것은 검투사님의 봉사에 대한 보상, 로마 시민권이랍니다.”

드디어 나왔구나.

내 시민권.

나무 상자를 열자 라틴 문자가 새겨진 청동판이 보였다.

청동판에는 특수 군사적 상황을 타개하는데 민간인의 신분으로 매우 큰 공로를 하였기에, 그 보상으로 보상금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물론, 그 대상으로 지칭된 건 바로 나 ‘글라폴레스’였다.

감동스럽다.

“그리고 이건 보상금인, 30아우레우스랍니다. 데나리우스 3천 닢의 가치가 있죠.”

노예는 찰랑거리는 가죽 주머니를 들이밀며 그리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돈과 시민권, 그리고 옷가지까지 다 챙겨들었다. 돈주머니는 튜닉의 허리띠에 매어놓았고, 시민권은 보자기 안에 넣고 보자기 채로 끌어안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가 없었다.

내 쯔바이핸더.

“그… 제 검이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자 노예가 살짝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 그게 로마 시내 법률상의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예?”

느낌이 불길하다.

뭔가, 뭔가 좆 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영원처럼 느려진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노예가 입을 열었다.

“검투사님의 검은, 안타깝게도 가져가실 수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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