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41화 (42/67)

EP.41 계란부터 사과까지(1)

참으로 운 좋게도, 난 정원에 가장 가까운 앞쪽 테이블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이페이아가 잽싸게 정원 쪽 테이블을 선점해놓은 덕택이었다.

한 테이블에는 삼면으로 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각각의 의자에는 세 명씩 앉아 총 9명이 같은 테이블을 공유하는 구조였다.

내 왼편에는 코페시가 있고, 맞은 편에는 이페이아와 테스티아가 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벌써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떠들기 시작한 상태이고.

다만 내 예상과는 달리, 누워서 먹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의외라면 의외다. 로마식 만찬이라 하면 일단 무조건 누워야 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귀족이 아닌 평민들은 누워서 먹는 것에 딱히 익숙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겐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왜냐하면 어거지로 누운 채 먹었다가는 무조건 체해버리고야 말았을 테니까.

한편 정원에서는 악사들이 잔잔하고도 평화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대략 하프랑 류트 같은 생김새의 악기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다.

향기로운 꽃향기와 감미로운 음악, 분위기를 더해주는 등잔과 화려한 건물.

이 정도만 해도 호사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불행하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려 노예들이 검투사들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검투사들 중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고.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검투사들은 보추노예가 닦아주는 데 반해, 내 발은 여자노예가 닦아준다는 것이겠지.

존나게 부담스럽다.

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다루는 행위에 그리 익숙하지가 않다. 짐 맡기는 것 정도야 21세기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일이었지만, 발을 씻겨준다? 이건 받아들이기가 좀 많이 힘들다.

비록 날이 쌀쌀해지면 갬비슨을 꺼내 입고, 일주일에 세 번씩 쯔바이핸더를 들고 공원에서 연습을 하기는 하지만, 나 또한 보편적인 21세기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평범한 정상인이기에.

하지만 여기서 불편하다는 티를 낸다면 노예 또한 부담감을 느끼고 불편해질 터.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거다.

바짝 굳어서, 발을 내민 채 한참 동안 천장을 쳐다보았다. 반쪽짜리 돔 안에 새겨진 황동색의 작은 별들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밤하늘을 보는 듯해서 꽤나 아름다웠다.

그리 있다보니 어느새 발 닦던 노예는 사라지고, 넓적한 은빛 사발을 든 또다른 노예가 줄줄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테이블에 하나씩 놓인 사발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수면에는 장미꽃 몇 잎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시기 딱 좋아보이는 물이다.

하지만, 속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저것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손 닦는 물이라는 것을!

이걸 아는 이유는 저런 게 중세시대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중세 고서를 뒤적거리는 걸 즐기는 중세 덕후가 아니었다면 대놓고 망신을 당하고야 말았겠지.

“그래서, 보통 이런… 귀족적인 저녁식사에서는 어떤 음식들이 나오는 거지? 코끼리 발바닥 구이?”

손을 닦으며 코페시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대충 그런 미묘한 인식이 있지 않은가. 로마 상류층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식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다던가, 괴상한 조리방식을 채택한다던가 하는 등등의 인식들이.

물론 황제가 직접 우리를 치하하기 위해 부른 자리이니, 비교적 일반적인 식재료들로 메뉴를 구성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건 희망적인 경우을 가정하였을 때의 이야기이고, 현실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비싸고 귀한 거랍시고 진짜 코끼리 발바닥 같은 거 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귀족들 연회에 초대 받아본 적은 없어가지고. 뭐, 귀족들이 여러가지 기괴한 짓거리들을 하기는 한다지만, 황제 폐하께서 초대하신 자리인데 설마 이상한 게 나오기야 하겠어?”

근데 보아하니 코페시도 나랑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태인 모양이다.

젠장할, 이러면 안되는데.

“저, 그, 테스티아님? 이페이아? 혹시 귀족들이 보통 뭘 먹는지-“

“미안하지만, 나 또한 모른다. 이 참에 알아봐야겠지.”

“나도 잘 몰라. 그래도 대충 맛있는 게 나오지 않을까?”

슬슬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물론 난 거의 한평생을 까다롭지 않은 식성의 소유자라고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기는 하다. 최소한 영국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런던은 저주받은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대충 저주받은 게 아니라, 존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저주받은 도시일 거다.

어쨌든 그곳에서 몇 가지 재현된 중세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있었는데, 몇 가지는 좀 심각할 정도로 맛이 심심했지만 몇 가지는 꽤나 괜찮았었다.

최소한 영국 길거리 음식의 하위 50%보다는 맛있었다.

즉, 비영국인이 1인분 치를 섭취하고서도 어떠한 영구적인 정신적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의 맛은 되었다.

내가 바라는 최소한은 딱 그 정도다.

“식전 팔레르노 와인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식전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노예들이 서빙과 함께 해설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내가 뭘 내 입 속으로 집어넣는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상한 게 나오면 그냥 거르면 되겠지.

“오, 팔레르노… 이거 되게 오랜만인데.”

한편 코페시는 고급스러운 덩굴문양이 새겨진 은잔을 손목으로 빙빙 돌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라면, 분명 과거에 돈을 꽤나 벌었었다는 소리겠지.

황실 와인이 그리 싼 가격은 아닐 테니까. 은근 유명한 검투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 그럼 다들 건배 한 번 하고 시작하자고.”

그때, 코페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리 말했다.

그러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들 쳐다보지 말고. 짧게 한다고!”

그러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코페시 또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몇 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먼저, 그동안 참 좆같은 세월이었다!”

검투사들은 두 번째로 웃음을 터트렸지만 코페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겠지! 그 거지같던 북부의 겨울도, 음울하기 짝이 없던 메말라비틀어진 햇빛도 더 이상은 없을 테니까!”

호응과 몇 마디 잡담이 오고 갔다. 테스티아를 포함한 일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뜸을 들인 코페시는, 힘있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러니, 건배하자!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앞에, 데나리우스와 포도주가 가득 쌓이길 빌면서, 건배!”

-건배!!

-건배!

-건배!!

짧고 굵은 건배사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건배를 외치고는 식전주를 들이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켈트인도, 나름 따스한 마음의 스파르타인도,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온 나조차도.

다같이 미소를 지으며 입에 와인을 머금었다.

황금빛을 띄는 팔레르노 와인은 고급스러웠지만, 동시에 상당히 달달한 편이었다.

병영에서 식수를 대신해 마시는, 민물과 산화된 포도주를 섞어 만드는 포스카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어떻게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비유하자면 최고급 유기농 생포도주스에 알코올을 적당히 섞은 맛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다지 도수가 높은 것 같지는 않다.

건배를 외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된 요리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삶은 계란을 올린 샐러드 요리입니다.”

큰 쟁반 위에, 작은 크기의 삶은 계란과 양상추 잎을 얹은 빵조각들이 담겨 나왔다. 마치 서서 먹는 파티음식 같은 생김새라, 한 손으로 집어먹기 딱 좋은 크기였다.

삶은 계란들 위에는 올리브 오일인지 뭔지 모를 진득한 소스가 가늘게 얹어져 있었는데, 좀 독한 엔쵸비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단순한 기름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재료는 정상적인 것 같으니, 섭취해도 큰 문제는 없겠지.

-바삭

앤쵸비를 액화시켜 응축한 듯 짭짤한 소스 맛과 삶은 계란의 부드러운 식감, 그것들을 감싸는 양상추 잎과 고소하게 구워진 빵조각.

고소하고 짭짤하다.

걱정과는 달리 꽤나 맛있다. 영국 길거리 음식의 하위 50%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을만한 정도라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뒷맛에 약간의 비린내가 섞여 코끝을 맴돌기는 했기에, 약간 남은 와인을 들이켜 향을 중화시켰다. 하지만 이 정도야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난 무려 마마이트를 맛보고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웬만한 음식으로는 더 이상 충격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뭐야, 그냥 맛있는데?”

코페시도 나와 비슷한 감상을 공유하는 모양이다. 이페이아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면서 먹고 있었고, 테스티아는… 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옅은 미소가 드러나는 것을 보아, 그녀의 입맛에도 이 요리는 꽤나 잘 맞는 모양이다.

곧 쟁반은 텅 비어버렸고,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노예들이 은잔과 함께 금세 수거해갔다.

그러고는 쟁반을 바꿔, 다른 요리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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