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40화 (41/67)

EP.40 팔라티노 언덕

황궁?

내가 지금 황궁에 왔다고?

대체 왜?

아니, 아니다. 나뿐만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참전했던 검투사들 전원이 황궁에 불려온 것이다.

코페시, 이페이아, 그리고 테스티아를 포함한 검투사들 모두가 노예들에게 각자의 무기와 갑옷을 맡기고는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쩌면 시민권 발급을 여기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고대 로마 행정체계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아무것도 모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검투사님?”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청각을 자극했다.

맞다, 노예한테 짐 맡겨야지. 계속 기다리게 하면 안되는데.

“아, 맞다. 짐 드려야죠, 예. 무기도 드려야 할까요?”

내 질문을 들은 노예는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살짝 어벙벙해진 표정으로 답했다.

“예, 주셔야 합니다. 무기는 황궁 내로 반입이 불가능하거든요.”

아, 젠장할.

내 쯔바이핸더를 같이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물론 나도 안다. 검은 무생물이고 인간과 같이 사고를 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물리적 실체로서의 검은, 그저 멋들어진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치 않다.

내 검, 내 쯔바이핸더는 이 괴상한 세계에 함께 떨어져 동고동락하고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그런 소중한 친구란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일종의 절친과 같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겠지.

그런데 이 검과 함께 황궁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니. 우리가 함께 이뤄낸 승리의 결실을, 나의 검은 누리지 못한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대검을 사랑하는 상남자라면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칼부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면, 분위기도 싸해지고 도덕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 테니까.

등에 메어 놓았던 검 가방의 끈을 풀러, 양손으로 잡았다.

이제 이걸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

건네주기만 하면 돼.

“…없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예?”

건네줄 수 없다.

-꽈악.

“거, 검투사님?”

“내, 꺼야. 내 검이야.”

내 몸이 이성에 반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돼, 이러지 마.

여기서 난동을 부릴 수는 없다. 이 찬란한 승리의 순간에 집착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고. 일단 무사히 시민권은 받아야 할 게 아니냐고.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난 어느새 이 검을 결코 놓아서는 안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날까 걱정되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검을 영영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기 때문에,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서 붙잡지 못한다면, 마치 38선을 사이에 둔 이산가족처럼 검이 내게서 멀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 여기서 붙잡지 못하고, 가게 내버려 둔다면…

“이런… 옘병!”

그러나 실로 다행스럽게도, 난 위기의 순간에서 기적적인 수준의 의지력으로 충동을 억제해낼 수가 있었다.

그래, 그 감은 아마 그냥 뭣도 아닌 허깨비에 불과했을 거다.

그저 내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을 뿐이야. 그게 다라고.

그러니까 진정하자.

진정한 상태로, 손에 힘을 빼고서 검을 앞으로 내미는 거다.

-스윽

내 양손 위에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놓인 검을, 노예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걱정하시지 마시죠, 검투사님. 이… 검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잘 보관될 겁니다.”

아마 내 심정을 읽고서 안심시키고자 한 말이겠지. 하긴, 황실 노예의 눈치가 없을 가능성은 낮을 테니까. 이곳에는 노예들조차 최고급으로만 구비해놨을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으로 생각해보자면 좀 많이 기괴한 소리이긴 하지만.

어쨌건 방금 그 말을 끝으로, 노예는 총총거리며 내 소지품들을 들고 저 너머로 멀어져갔다.

그리고 난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하다.

난 마음 한켠의 그 비어버린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더해야 했다. 신선한 산소라도 들이키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정신적 공허는 그러한 것이다. 절대로,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때, 황궁 건물로 오르는 계단 위에 선 한 갈색머리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검투사 여러분! 지금은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 많으시겠지만, 일단은 잠시 참아 주시지요. 제 이름은 다니카입니다. 이 예술적인 황궁의 관리 일부를 맡고 있는 황실 소속 노예로서, 아우구스타의 명에 따라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다른 노예였구만.

하여튼 노예가 많단 말이지. 노예가 황궁 관리까지 한다니, 역시 로마는 로마다.

“검투사 여러분, 절 따라오시지요. 가급적이면 질서정연한 상태로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다니카의 말에, 나를 비롯한 검투사들은 그녀를 따라 우르르 황궁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질서정연한 광경은 아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름아닌 빛이었다.

저 높다란 곳에 있는, 격자무늬 창살로 장식된 기다란 창문에서는 지중해 특유의 황금빛 햇살이 내려와 이 거대한 공간을 광명으로 가득 채웠다.

그 찬란한 빛줄기 너머에는 황좌가 있었다.

반원형의 단면이 눈에 띄는, 반쪽자리 돔 밑에 놓인 금빛으로 반짝이는 황좌가.

황좌의 양 옆에는 두 개의 큰 문이 있었는데, 안토니아는 그 중 오른쪽 문으로 향했다.

추측해보자면 여기는 아마 알현실의 역할을 하는 장소일 것이다.

이리도 높다란 지붕과 화려한 기둥들, 아치로 가득 찬 넓은 공간의 용도라면 그정도 밖에 없을 테니까.

바라보는 즉시 압도되어, 입이 쩍하고 벌어지지 않는가.

공간 효율 따위는 과감히 내다버리고 오로지 웅장함을 위해 설계한 공간.

보통 이런 종류의 건물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 빈 강정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치 안에 장식된 조각상과 식물이 새겨진 기둥머리, 그리고 원과 정사각형 문양으로 채색된 대리석 바닥에서는 어떠한 흠이나 추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각상들은 살아있는 듯 생생했고, 조금 촌스러워 보일 법한 대리석 타일의 문양들은 황색과 적색의 절묘한 배치를 이루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걸 설계하고 건설하는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대다수의 검투사들 또한 나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듯했다.

-아잇, 씨… 어떤 새끼야?

-누가 계속 내 발을 밟는데.

다들 벽면 위쪽의 장식들을 구경하는데 한 눈이 팔려 다른 사람의 발을 밟거나 살짝 헛디디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최소한 나중에 촌놈 취급은 안 받겠구만.

“역시, 황제의 궁전은… 엘리시움의 궁전은 분명 이곳을 닮았겠지. 실로, 화려하군…”

내 옆에서 멍하니 걸어가던 테스티아는 그리 중얼거렸다.

엘리시움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죽어 가는 사후낙원의 이름인 것으로 안다. 거기에 비유할 정도라니. 감격이 어지간히 큰 게 아닌 모양이다.

-끼이익…

한편, 다니카가 황좌 왼편의 대문을 향해 다가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 주위에 있던 두 명의 노예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 너머에는 낙원이 있었다.

아니, 정정한다. 낙원이 아니라 정원이 있었다. 이런 단순한 걸 착각하게 만들다니.

연극적인 장치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거대한 분수대 근처에는 네 개의 나체 여인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분홍빛의 유두마저 굉장히 사실적으로 칠해놔서 왠지 모르게 귀가 붉어지는 듯 했다.

그 분수대를 감싸는 것은 수북하게 심긴 라일락과 제비꽃이었다. 물안개에 섞여 코를 찌르는 꽃향기는 실로 자욱했기에, 정원에 들어선 순간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원의 양 옆에는 끝도 없이 이어진 복도와 대리석의 열주가 있었는데, 양쪽 벽에는 그림을 걸어놓은 듯한 착시를 주는 벽화가 칠해져 있었다.

즉, 액자와 그 안의 그림을 마치 진짜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그려넣은 벽화가 있었다.

좀 많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림 자체는 굉장히 사실적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눈에 띄는 것은 분수대 너머, 즉 정원 너머에 보이는 거대한 홀이었다.

아까 전 지나왔던 알현실에 필적하는 크기의, 단면이 보이는 반쪽자리 돔을 얹은 그 홀에는 낮은 높이의 넓은 탁자와 긴 의자가 가득했다.

로마 특유의 긴 소파 같은 의자 말이다.

이런 장대한 광경과 향기, 그리고 압도적인 규모를 마주한 탓 다 함께 넋을 잃어버린 우리의 앞에서, 다니카가 웅변을 토했다.

“로마의 검투사들이여, 기뻐하십시오! 새로운 아우구스타께서 그대들의 용맹과 투지에 경의를 표하고자, 황실 연회장으로 그대들을 손님으로서 초대하셨으니! 그러니 많이 기대해 주시지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천상과도 같은 맛의 저녁식사를!”

아아,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황실의 저녁식사를 대접받고자 이곳에 초대된 것이었다.

다니카의 말을 다 들은 코페시가, 고요 속에서 나지막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그녀의 말은 내 생각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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