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2)
마르키아 발레리아 막시미아나는 말을 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높고 푸르른 상공에서는 뭉게구름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대리석의 도시는 맑은 날씨 속에서 개선식의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
어쩌면 이건 신들의 가호 덕분일지도 모른다. 철인황제의 영혼이 신들 곁에 서서 우리의 행렬을 지켜보았을 테니, 식 중 느닷없이 궂은 날씨가 불어닥치지는 않게 유피테르께 청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경은 과연 어떨까.
제2군단장 막시미아나는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배경삼아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고되고 고통스러웠던 전쟁의 끝을 축하하며, 그리고 길고 긴 역병의 끝을 축하하며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꽃다발을 던지고 환호성을 내지르겠지.
그러면 나의 군단병들이 전리품으로 얻은 은화들을 하늘에 흩뿌리겠지.
원래 우리의 것이었던 은화들을.
사고가 거기까지 이르자, 막시미아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착잡해졌다.
물론 300만 데나리우스가 결코 적은 양의 돈은 아니다.
하지만 서서히 메말라가는 국가 예산을 구제해낼 수 있을 정도로 큰 돈 또한 아니다.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 중 하나인 막시미아나는 이 사실을 아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국가 재정이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과 역병의 조화라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악재의 조합 때문이었다.
변방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군사비 지출은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갔는데, 안토니나 역병의 전파로 인해 해상 무역이 심히 정체되어 관세(Portoria)의 총량은 바닥을 찍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에게서는 세금을 거둘 수가 없기에, 결국 쥐어 짜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속주민들의 인두세(Tributum capitis)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인두세를 극한으로 올린다면,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또다시 국가 재정이 소모되고, 세금을 또 걷어야 하니, 이는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과 같이 끝나지를 않는 무한의 순환 굴레인 것이다.
물론 이 절망적인 상황은 머지않아 옛 말이 될 것이다. 역병은 끝났고, 해상무역은 재개되고 있으며, 전쟁 또한 잘 마무리되었으니.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배상금의 액수가 아니다.
배상금은 그저 로마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선전을 위한 수단이자 대의명분이며, 삭막했던 삶에 질린 시민들을 달래줄 장난감에 불과하다.
진정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지출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정확히 막시미아나가 바라던 대로. 그리고 대다수의 의원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맥없는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버린 것이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루킬라의 행동은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단 4일 만에 평화 협정을 마무리 지어버리고는 로마로 떠난다니. 아무리 저 야만인들이 전 재산을 끌어다 바쳤다고 해도, 최소한 조금 더 뜯어먹으려 애를 써보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 아닌가?
이성으로야 이해할 수 있다. 본국에 쌓인 문제가 한가득이니, 얻어낼 것도 없는 변방에서 죽치고 있어봐야 좋을 것은 없다.
하지만 3년, 무려 3년을 병사들과 동거동락하며 싸웠던 전장이다. 그런데 단 4일 만에 그 모든 전장의 기억들을 뒤로 하고서 원로원으로 돌아가라니.
이는 너무 냉혹한 결정이지 않는가. 너무나 매몰찬 행동이 아닌가.
어느새 오른편에는 테베레 강과 그 위에 떠다니는 나룻배가, 정면에는 옥타비아나 아우구스타의 영묘가 보여왔다.
옛 영묘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다. 그 주위는 사이프러스 나무들로 감싸져 있었고, 둥글게 세워진 기둥 위에는 첫 황제의 조각을 얹은 돔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행렬에 함께하는 마르키아 아우렐리아의 시신은 저곳에 묻히지 않을 것이다. 네르비아 이후에 즉위한 황제들은 이미 가득 들어차버린 옛 영묘에 묻히지 않는다.
철인황제의 시신은 테베레 강 서쪽, 하드리아나 영묘에 안장될 것이다. 지금까지 현제라 불리었던 아우구스타들이 그러했듯이.
그렇다면 새로운 황제는 어떨까. 그녀 또한 현제라 불릴 수 있을까?
막시미아나는 고개를 돌려 백마가 끄는 사두마차에 위에 선 새로운 태양을 바라보았다.
자주색 망토를 두른, 안니아 아우렐리아 루킬라.
불면증이라도 있는지 퇴폐적인 눈매에, 날카로운 갈색 눈동자와 창백한 피부. 입술은 선홍색의 핏빛을 띄고 있어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섬뜩하기도 했다.
화려한 투구 밑에 가려진 황제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과연 무엇을 그리 골똘히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단독 황제로서 시민들에게 할 장대한 연설? 서서히 금이 가는 로마의 영광을 수복해낼 천재적인 계책?
그것도 아니면, 황제가 수도를 비운 사이를 틈타 자라난 원로원의 권력을 견제할 수단?
‘제기랄, 아무것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막시미아나는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 동방 속주 출신의 부유한 의원들과는 달리, 타인의 속마음을 술술 읽어내며 파악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녀는 그저 용맹한 무인이자, 충성스러운 장군일 뿐.
그리 슬슬 머리가 아파올려 할 무렵, 막시미아나의 머리 속에 느닷없이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콰디족의 족장을 반불구로 만든 남자 검투사에 대한 생각이었다.
정식 군인일 리는 없다. 남자는 공식적으로 군 복무를 할 수 없으니.
그렇기에 그의 시민권과 제대 상여금 모두, ‘특수 군사적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공로하였다는 명목으로 에둘러서 수여되게 될 것이다.
저 자는 대체 뭐하는 인간일까.
대략 2주 전부터 그것을 궁금해 했었지만, 개선식 준비와 행렬 통솔 만으로도 바빠서 한동안 반쯤 잊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의문은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
느닷없이 나타나 군공을 세운 사내라니. 이게 대체 뭔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점차 쌓여가는 의문들에, 막시미아나는 심히 짜증이 났다.
그랬기에 그녀는 일단 이런 복잡한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하늘에서 내릴 은화들과 귀가 멀 듯한 환호성에 몸을 맡기고, 그 음산한 야만인들과의 추억은 깨끗히 씻어내는 거다.
플라미니아 가도의 끝이자 로마의 입구에서, 군단장은 그리 다짐했다.
***
개선식은 언제나, 늑대 가죽을 두른 군악대의 휘황찬란한 연주와 함께 시작된다.
먼저 금관으로 된 거대한 코르누가 요란히 표효하며, 시민들에게 행진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러면 시민들이 행렬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자 일렬로 서 있는, 치안대(Cohort urbanae)와 소방대(Cohort vigilum)의 병사 수천 명이 일제히 북을 두드리며 저음의 환영음을 내뿜는 것이다.
이에 군악대는 화답한다. 북의 중후한 저음 위에 깔리는 청동 팡파레의 경쾌한 소리로.
하지만 군악대는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애를 써야만 한다.
개선식 행렬의 주변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 어떤 음악소리도 묻어버리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황제 폐하 만세에에!!! 만세에에에!!
-와아아아아아!!
-아름다우신 루킬라께 신들의 가호가 있으라!!
황금빛 햇살 속에서 노예들이 뿌린 수많은 꽃잎들은 허공에서 넘실거리며, 눈처럼 흩날린다. 그와 함께 수많은 데나리우스 은화들 또한 하늘로 흩뿌려진다.
언제나 그러하듯, 장미와 제비꽃의 잎이다.
그리고 그 혼란과 화려함, 시끄러움 속을 뚫고자 애를 써대는 군악대 너머로,
“로마의 시민들이여!!”
네 필의 백마와, 펄럭이는 자줏빛 망토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짐이 야만인에 대한 승리와 함께 이곳에 왔노라, 이곳 제국의 수도 로마에! 그대들을 위한 선물과 함께 돌아왔노라!!”
황제의 바로 뒤에서는 흑마를 탄 군단장과, 황금 독수리의 우상 아퀼라를 든 호랑이 가죽의 의장병이 그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등장했다.
의장병의 뒤를 잇는 것은 부군단장과 대대장들, 백인대장들, 즉 장교들이었다. 붉은 초승달 모양의 깃털로 장식된 그 특유의 투구는 위엄을 더해주기 부족함이 없었다.
보통 이쯤에서 시민들은 관심을 거두지만, 이번 개선식은 조금 달랐다.
대오를 맞춰어 행진하는 군단병들을 따르는, 각양각색의 무장을 한 검투사 부대 때문이다.
마르키아 아우렐리아는 최전선에서의 병력 부족을 해결하고자, 시민권과 봉급을 대가로 검투사들을 모아 군에 배치시켰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가면서까지 국가를 지키려 든 철인황제의 드높은 뜻을, 충성심 높은 검투사들은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지난 3년 간, 콜로세움에는 어중이떠중이들만이 경기에 나섰다. 실력이 있음을 자부하는 자들은 전부 최전선에서 자신의 실력을 야만인들에게 쏟아붓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역병의 존재가 사람들이 콜로세움에 모이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 꼴사나운 허우적거림을 지켜보며 시간을 내다버리느니, 집에 틀어박혀서 낮잠이나 자는 게 그들에게도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니 시민들이 검투사들의 복귀에 열광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 많고 많은 검투사들 중에서도, 유난히 시민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검투사들이 있었다.
두 방패의 스파르타인, 테스티아.
가장 강한 호플로마키이자, 가장 강한 검투사이기도 한 그녀의 인지도는 그 누구보다도 높았다. 오로지 방패만을 들고 싸운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상대에게서 승리를 거두어내는 그 기적 같은 힘은 자연스레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날개 달린 베스티아리, 이페이아.
사냥개도, 갑옷도 방패도 없이 오로지 두 개의 창과 날렵한 움직임만으로 맹수를 사냥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페이아는 이 기행을 매번 성공시켰기에, 그 어떤 베스티아리도 그녀의 위상을 넘지 못했다.
방패 부수는 무르밀로, 코페시.
이집트의 낫칼을 쥐고 싸우는 코페시는 다른 둘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기에,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거나 묘기에 가까운 무술로 상대를 농락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만난 상대는 항상 꺾는다는 특유의 서사와, 시원하게 방패를 부수는 코페쉬의 타격감은 그녀를 일류 검투사로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부상병들을 실은 마차와 말 탄 군의관들, 그리고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다.
공교롭게도 한 시민은 마차 안에 앉아있는 훤칠한 키의 남성을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개선식은 계속되었다.
마르스의 들판(Campus Martius)에서 시작한 행렬은 직선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승리한 군사들은 판테온과, 트라이아나의 신전을 지나며 도시를 가로질러서,
마침내 개선식의 마지막 목적지인 포로 로마노(Forum Romanum)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