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7화 (38/67)

EP.37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1)

깨어난지 15일이 지났다.

그야말로 온 몸에 연고랑 붕대를 덕지덕지 바른 덕이었는지, 부상은 꽤나 금세 정리되었다. 창을 맞은 상처도 이제는 아물어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내부 장기도 잘 회복된 모양인지 음식을 먹을 때 불편함이 없다. 군의관 말로는 장을 살짝 꿰멨다고 하던데, 솔직히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이게 정녕 2세기의 의술이란 말인가? 역시 로마는 위대하다.

재활 치료 또한 성공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었던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지팡이에 체중을 기대며 비틀거리며 걷다가 넘어지고 까지는 등, 온갖 봉변을 다 당했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살육에 미친 야만인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걷는 게 힘들다고 주저앉는 것은 영 폼이 나지 않았으니까.

본디 남자는 가오로 사는 것이다. 대검 애호가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이족 보행에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혹시 몰라서 아직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아마 계속 가지고 있기는 할 것 같다. 나중에 노친네 되면 또 써야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래도 다쳐서 좋은 점이라 하면, 저 힘들디 힘든 행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저 마차 안에 반쯤 누운 채로, 창을 열고서 유럽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남자여서 그런지 게으름 부려도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토록 편안한 군생활이라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군공을 세운 부상병은 무적이다. 이 명제는 나의 행태를 통해 증명된다.

하여튼, 약간 관광을 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동안 많은 곳을 지나며, 온갖 다채로운 풍경들을 보았기에.

알프스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도시, 포이토비오(Poetovio).

요새 옆에 세워진 도시는 방황하는 군단병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은 우리의 행렬을 새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는 했다.

넓직하게 깔린, 돌로 포장된 시멘트 도로 옆으로 펼쳐지는 알프스 산맥 또한 장관이었다. 드높은 곳의 만년설은 그야말로 그림과도 같은 순백의 색깔을 띄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 속에서 바라보았던 정경은,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

고원에서 불어져 내려오는 그 쌀쌀한 바람이 서서히 사라지자, 나무의 품종 또한 바뀌기 시작하였다.

중부 유럽 특유의 짙고 푸른 참나무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작고 까칠거리는 잎의 올리브나무와 길쭉한 막대기 형태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주를 이루었다.

빛의 색채 또한 바뀌었다.

안개에 쌓인 음습하고 음울했던 회색빛의 태양광은, 이제 본래의 색으로 찬란히 빛나며 아침저녁마다 황금색으로 세상을 물들였다.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남유럽에 들어섰다는 것을.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이후 몇 개의 소도시를 지나, 아트리아(ATRIA)라는 이름의 항구도시에 진입했다.

아드리아 해를 동쪽에 낀 그곳은 나름 규모가 큰 대도시였다.

상업으로 번창하는 그 도시의 항구에는 배가 계속해서 드나들었으며, 상인들은 비단이니 보석이니 하는 비싼 물건들을 팔아넘기고자 발악을 하며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었다.

즉, 거리가 상당히 시끄러웠었다.

역시 주로 보석을 사는 것은 남자들이었지만, 여자들도 적지는 않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머리 위에 베일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남자들이 꽤나 있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죄다 보추새끼들이었다.

그 귀족 보추놈들이 날 바라보던 시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뭐 세상에 저런 게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었지. 심히 불쾌했었다.

그 뒤로는 아드리아 해와 접한 해안선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다,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질렀다.

당연하게도 험준한 지형을 넘어간 것은 아니었고, 잘 닦인 길을 따라갔을 뿐이다. 그 산맥에도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봄 기운이 만연해 푸르기 그지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산 중턱에 꽤나 큰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거다. 무슨 신전인지는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그렇게 산맥을 넘고, 세 개의 소도시를 더 지나서 큼직한 다리도 하나 건넜다.

그리하여 지금.

4월 6일, 수요일.

우린 북쪽에서부터 로마로 진입하는 중이다.

이 행렬의 가장 앞에는 차기 황제, 루킬라가 백마 4마리가 끄는 마차 위에 올라타 시민들에게 화려한 등장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독 황제로서의 화려한 등장이라 해야겠지. 마르키아 아우렐리아가 살아있을 때도 이미 공동 황제로 통치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일단 주위 사람들에게서 평을 들어보면 호평 일색이기는 했다. 다만 황제 또한 정치인이고, 검투사들은 대개 정치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으니 과장이 섞이긴 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평판이 좋다는 건, 최소한의 지능은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언플을 잘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러모로 궁금증이 동하지만, 내가 저 차기 황제의 본질을 알아낼 방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난 귀족도 뭣도 아니고 정치를 할 생각도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다고 한다. 대다수의 평민들은 잘해봐야 자영업이나 약초사를 하는 정도고, 보통 일하는 남자들의 태반은 창남이라고 하니까.

물론 남자 검투사도 가능하다고는 하다. 그 수가 적을 뿐이지.

코페시의 말에 의하면 남자에게 있어 가장 좋은 직업은 남사제가 되는 것인데, 보통 사제는 귀족 가문에서 뽑힐 뿐더러 어릴 때부터 교육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것 또한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역시, 나에게는 검투사의 길 밖에는 없단 말인가.

하지만 난 살인을 즐기지 않는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란 말이다. 대다수의 21세기인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정상적인 도덕관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가끔씩은 사람을 담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라던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모가지 따야지, 뭐 어쩌겠냐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전투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내 말은, 검으로 하는 전투. 총싸움은 그냥 공포물이고.

어찌 보면 목숨을 건 대련이라고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긴장감과 공격 성공 시의 짜릿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는 것이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그 아슬아슬함과 끓어오르는 아드레날린, 멋지게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소리와 상대의 목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쳐가는 모양이다. 이런 폭력적인 유희에 물드는 것은 아무래도 건전하지 못해.

사람을 살해하려는 행위에서 재미를 느끼면 안되는 거라고.

그래. 이건 그 염병할 야만인을 다 죽이고 오지 못해서 이러는 거야. 절대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내가 거기서 내게 투창을 한 그 씹련의 모가지를 따버렸으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난 정상인이다. 그것도 아주 명백한 정상인.

나 같은 상황에 놓이면, 그 어떤 21세기 사람이 와도 분명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절대 내가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뭐야, 무슨 생각해?”

내 옆에 앉아있던 코페시가 말을 걸었다.

사실 내게는 더 이상의 간호가 필요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마차에 편하게 앉아 갈려고 코페시가 간호를 자처한 거다.

치졸하다면 치졸한 거지만, 한 명의 군필자로서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와, 나 벌써 제대하는구나.

또다시 제대를 한다고.

하여간 군대운은 더럽게 없다.

첫 번째 군대는 철원에서 하고, 두 번째 군대는 게르마니아 최전선에서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나마 이번 군대는 초단기 복무이기는 했다.

무려 ‘실전 경험’을 쌓아버렸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잘 끝났으니까.

“그나저나 여기는 뭐 제대하면 주는 거 있나? 시민권 말고.”

“시민권 제외하고? 음… 일단  3000데나리우스, 그러니까 30아우레우스만큼 제대 상여금을 받겠지. 도무스를 살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시세로 따지면 괜찮은 인술라 2층에 임대 구하고 적당히 살기엔 충분한 돈이겠지. 역병이니 뭐니 해서, 다들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간 지 꽤 됐으니까. 근데 지금쯤이면 다시 돌아왔을려나?”

그리 심드렁한 코페시의 말 속에, 상당히 신경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잠깐만, 역병?”

“응?”

“여, 역병이 돌았다고? 역병? 역병?!”

“진정해. 그거 이제 다 끝났어. 그거 퍼지기 시작한 게 이제 거의 15년 전이라고. 3년 전에도 거의 다 끝나가는 추세였으니, 이제는 완전히 종식됐겠지. 죽을 사람 죽고, 살 사람 살고, 대략 그리 됐다고.”

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전근대 사회에서의 역병은 아주 위험한 거라고.

그나저나 여기도 팬데믹이라니.

내 원래 세상에서도 한때 큰 전염병이 돌았었던 적이 있었다. 그게 대략 6, 7년 정도 전이었을 거다.  2022년쯤에 종식됐었나, 아마?

어쨌든, 결국 모든 불행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그게 전쟁이 되었든, 역병이 되었든 간에.

사람은 답을 찾아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도 뭐, 집값은 올랐겠지만 그것만큼 볼 것도 많아질 테니까. 검투사들도 돌아왔으니 축제도 다시 열릴 거고, 전차 경기도… 와, 진짜 경주에 돈 걸어본 지 3년이나 됐네. 그땐 꽤나 감이 좋았었는데, 여전할련지 모르겠다.”

코페시는 들뜬 말투로 혼잣말을 해대었다. 하긴, 신나긴 할 거다.

오랜 격리에서 풀려나 다시 문화생활을 누릴 때의 해방감은, 나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최전성기의 로마라면 확실히 볼 것이 많기는 할 거다. 온갖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들에, 대리석으로 된 신전과 연극장, 목욕탕과 아름다운 정원들이 도시에 가득하겠지.

정확히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고작해봐야 콜로세움 정도?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만큼,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있을 거다.

최소한 멋지게 지어놓기는 했을 테니까.

그리 나 또한 나름의 기대에 젖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 드넓은 푸른 평원 너머에서, 백색의 도시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벽 없는 대리석의 도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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