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6화 (37/67)

EP.36 새벽녘(3)

두 번째로 일어나자 새벽녘이었다.

내 오른편에 열린 창으로는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들어왔다.

나무로 된 창문은, 마차가 덜컹거리는 박자에 맞추어 조금씩 위아래로 흔들리고는 했다.

그리고 내 왼편에는 코페시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띈 채.

“아니, 너는… 진짜 멀리서 오긴 했나 보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그런 거 가지고 난동 피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얼마 전에 일어났던 남근 부적 사건을 전해들은 것일까. 수치스럽다.

도저히 눈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개미 한 마리 없이 깨끗하다. 이게 바로 로마군의 위생 수준인 건가.

“그래서 대체 뭔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 건데? 뭐 성노예로 잡힌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거야?”

코페시의 추측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이걸 어떻게 맞춘 거지.

하지만 그건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단 말이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웬 요상한 좆을 목에 걸고 있는데, 성노예로 잡혔다고 오해해도 그리 이상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냐고.

하지만 아직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쪽팔림이 충분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쪽팔림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런 변명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역시 추한 행동이다. 그런 것 멋지지 않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너는 사람이 어떻게 된 게…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러면 네 고향에서는 부적으로 대체 뭘 쓰는데?”

고비다.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나와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색함을 피할려면 직접 말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 뭐, 붉은색으로 글자 새긴 노란 파피루스지 같은 거 쓰고 그러던데요...”

사실 부적이라면 나름 많이 본 편이긴 하다.

외가 쪽이 전통적으로 그런 방면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던지라. 실제로 효험이 있었냐 하면…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어머니는 토속신앙 같은 걸 무지하게 싫어하긴 했다. 지나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외할머니가 싫어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니, 때려치우자. 이런 생각은 해봐야 의미가 없다. 기분만 안 좋아지지.

“그런 거 말고, 이렇게 가지고 다니는 거 말이야. 이런 거 없어?”

과거에 대한 회상은 코페시의 질문 앞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어… 나무 구슬 여러 개 꿰어서 가지고 다니는 그런 건 있는데…”

금속으로 된 거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염주도 나름 부적이라 칠 수는 있겠지.

아니면 말고. 사실 불교 쪽은 잘 모른다.

“…후, 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그래, 이민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코페시는 그리 말하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이마를 드러내니 어째 더 예뻐진 느낌이다. 조금 더 쾌활해보인다고 해야 할까.

코페시는 말을 이었다.

“그거 파시눔(fascinum)이라고 파시누스의 남근을 표현한 부적인데, 원래 다치거나 아파서 골골대는 사람이나 어린애들이 많이 차고 다니는 거라고. 뭐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알겠지?”

지식이 늘었다.

어째 알면 알수록 내 정신이 뒤틀리고 오염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아마 기분 탓이겠지.

그나저나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왼쪽 눈썹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검투사로 싸우다가 부상당한 흔적 같은 건가.

부상이라.

부상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 군의관은 멀쩡하답니까? 바닥에 넘어트렸는데 혹시-“

“멀쩡해. 머리에 혹이 난 것 같다고 징징대기는 하던데, 그건 그냥 엄살 같더라."

다행이다.

혹시라도 뇌에 손상 같은 거 입었으면 심히 곤란해질 뻔 했는데, 남녀역전된 세상이라 그런지 여자들도 내구성이 높은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냥 편하게 말 놔라.”

“…예?”

느닷없이, 코페시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반말을 하라고?

물론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페이아랑은 이미 말을 놨으니까. 근데 그건 이미 떡을 친 상태여서 그랬었던 거고, 지금은 아닌데?

…설마 기절해있는 동안에 날 따먹었거나 그랬었던 건 아니겠지?

“…편하게 말 놓으라고. 군대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뭔 미친 전설이 되가지고는, 군단병이고 검투사들이고 죄다 시커먼 남전사가 야만인 족장 모가지를 땄다느니 기병을 두동강을 냈다느니 그러고 있다고. 근데 그런 인간이 나한테 꼬박꼬박 존대하면 뭔가 꼽주는 것 같아서 불편하단 말이야.”

다행히 성적인 사건과는 무관계한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내 존재가 좀 지나치게 유명해진 모양인데. 배에 창 맞고 쓰러졌다 일어난 사이 전쟁영웅이 되어 있었다니. 의도치 않게 명예와 영광을 얻어버렸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그래도 명성을 얻어서 크게 나쁠 건 없겠지.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선임이고 나발이고 이제는 의미도 없으니까.”

“응?”

“우리 전쟁 끝났어.”

이번 건 더 충격적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이젠 아예 전쟁이 끝나있어?

빙하 속에서 냉동됐다가 70년 만에 살아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다. 기절해있는 사이에 오만가지 일들이 다 일어나는구만.

그러면 그 게르만 잔당들도 결국엔 다 잡아서 족쳐놨다는 건가?

“야만인들이 돈이고 남자고 있는대로 바칠 테니까 제발 전쟁을 끝내달라면서 사신을 보냈다더라. 한심한 새끼들이 따로 없지, 애초에 국경 넘어서 들이박은 게 누군데.”

“아니, 잠깐만. 그러면 내가 못 죽인 새끼들은, 걔네들은 어떻게 됐는데?”

“우리도 못 잡았어. 서쪽에서 한 번 더 전투가 있기는 했다는데, 야만인들은 대부분 토껴서 별 재미 못 봤다더라. 실질적으로는 서로 평화 협정 맺고 끝낸 거지.”

이건 내 예상과 다른데.

좀 많이 다르다.

“…못, 잡았다고?”

누구는 며칠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혼수상태로 골골거리고 있었는데, 그 씹련은 날 창으로 족쳐놓고는 룰루랄라 저 너머로 튀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이런 개 같은 일이 다 있나!!

“그 개년이 씨발, 내 배에 창을 처 꽂았는데 여전히 살아서 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누구는 여기서 골골대고 있는데?!!”

아직 살아남은 마마이트가 있다.

저 마마이트를 죽여야 해.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살아돌아오고 말 거다.

저 망할 숲에서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기다리다가 국력이 쇠했을 때 다시 기어나올 거라고.

이건 잘못되었어.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한다.

저 야만인 씹련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싸그리 죽여야 한다.

죽여야만 해!

“전쟁!! 전쟁!! 결코 다시 전쟁!!”

“아니, 잠깐만, 지, 진정해! 난동 부리지 말고!”

역시 검투사는 강하다. 필사의 의지가 담긴 발악을 한낱 어린애 버둥거림마냥 취급하면서 강제로 진정시켜버리다니.

물론 내 근육이 아직 반병신 상태이기는 하다. 하지만 만일 온전히 회복된 상태라 가정한다 쳐도, 힘싸움으로 코페시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최소한 내 검술인으로서의 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무슨 심정인지 이해는 가지만, 들어봐. 걔네들이 보낸 배상금이 무려 300만 데나리우스라고. 거기에 노예들도 몇 백명 가량 붙어서 오고. 그리고 너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 망할 험지에서 겨울을 세 번이나 보냈는데, 이 짓거리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이만하면 됐잖아, 안 그래?”

한편 코페시는 내 분노를 이성으로 잠재울려 하는 것인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나갔다. 평화 협정으로 얻게 되는 막대한 이익들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그 설명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난 300만 데나리우스가 얼마 정도의 돈인지 모른다.

“…그래서 300만 데나리우스가 얼마 정도의 돈인데?”

“그야 당연히 300만 테트라드라크마 정도의 돈이지.”

“…테트라드라크마는 또 뭐야?!”

내 질문에 코페시는 잠시 멍한 표정을 한 채로 멈춰 있다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맞다, 너 엄청 먼 데서 왔다고 했지. 계속 까먹는다니까… 음, 300만 데나리우스면 고급 노예 4천 명 정도는 거뜬히 사고도 남겠지. 내 말은 진짜 엄청나게 비싼 고급 노예들 말이야. 평민들이 사는 거 말고, 막 귀족들이 사는 그런 거 있잖아.”

고급 노예 4천 명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일반 노예로 치환하면 8천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노예 8천 명을 살 수 있는 돈이라면 결코 적은 건 아니겠지.

최소한 손해는 안 봤다는 걸까.

“그리고 그 야만인들이 엄청난 금광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돈도 결국은 다 어디서 털어온 거라고. 그러니 한동안은 진짜 거지새끼마냥 살겠지. 나름 복수라면 복수를 한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쓸데없이 열불내지 말고 진정해.”

분명 코페시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을 했지만, 뭔가 억울하다.

피해를 본 건 나인데 대체 왜 내가 진정을 해야 하냐고.

물론 지금 내가 좀 흥분한 상태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행동이라고. 배에 단 한 번이라도 투창을 맞아본 사람이라면 분명 내 기분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일부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래, 그래. 뭔 소린지는 아는데, 자꾸 열불내봤다 머리만 아프고 좋을 게 없다고. 좀 진정하고, 쉬고 있으라고. 평온한 상태에서.”

하지만 내 반박에도 불구하고 코페시는 계속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계속해서, 날 진정시키려 한다.

근데 듣다 보니 목소리가 은근히 좋았다. 눈나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한, 약간은 저음의 목소리.

어째 진짜로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바로 음악치료인가 하는 그건가.

“알겠지?”

“…알았어.”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지금 아무리 전쟁 영웅의 면모를 가져갔다고는 해도, 전쟁에서의 중요한 일들은 다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거다.

지금 당장 지휘관 막사로 찾아가서 말도 안되는 평화 협정 때려치우고 야만인들 모가지나 따러 가자고 말하면 곧바로 무시당하고 쫓겨날 거다. 그게 군대의 본질이니까. 상명하복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는 공간이라는 소리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불안정한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 밖에는 없다.

그래, 진정을 하자.

“휴우…”

깊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코페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산들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뿐.

그렇게 평화로운 소리를 들으면 안정을 취한 지, 대략 3분 정도가 되었을까.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네. 테스티아가 널 아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데. 영원히 안 깨어났으면 뭔 지랄이 났을지 상상도 안 간다, 진짜.”

코페시가 나지막히 그리 말했다.

“테스티아? 그 스파르타인 지휘관?”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파르타인이라 하면, 솔직히 뭔 감정없는 전쟁 기계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니.

의외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근데 생각해보면 내가 혼자 위기감에 빠져 혼란해하고 있을 때 진정성 넘치는 조언을 하고 휙 사라진 적도 있기는 했으니까, 그냥 사람 성격이 본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민족성이니 뭐니 해도, 태어난 천성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나랑 그 야만인 자식이랑 테스티아, 이렇게 셋이서 번갈아가면서 안 죽고 멀쩡히 살아있나 확인했는데, 나랑 교대할 때마다 눈빛이 장난이 아니더라고. 아주 뭔 온 세상의 회한을 다 짊어진...”

“근데 잠깐만, 왜 의무병들이 간호를 안하고 검투사들이 간호를 한 건데?”

“아, 그거.”

내 질문에 코페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다친 검투사들이 너무 많아서, 간호 노예들이 부족하다면서 군의관들이 우선순위를 정해놨더라고. 어느 정도 호전되는 사람이면 우리끼리 알아서 간호하라나 뭐라나.”

확실히 전투가 격렬하긴 했던 모양이다.

진짜 이긴 게 기적이지.

"슬슬 마차가 멈추는 걸 보니 아침 시간일 것 같은데, 난 이제 가야겠다.”

코페시의 말대로,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곧 멈춰섰다.

아직 아침을 먹기엔 살짝 이른 것 같기도 한데, 행군의 효율성을 위해서 식사 시간을 조정한 게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도 그 망할 보리죽이겠지… 젠장할. 너도 그 맛대가리 없는 환자식 같은 거 잘 먹어라. 맛없다면서 막 뱉거나 발광하지 말고.”

“아니, 누굴 애새끼로 아냐고.”

“그게 싫으면 애처럼 굴지 말던가.”

코페시의 말에, 그녀와 나 모두 피식하며 웃었다. 내가 애새끼라면 그건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애새끼가 될 테니까. 184cm짜리 애가 어디 있냐고.

“나 진짜 간다?”

문 밖으로 나서는 코페시를 향해, 슥슥 손을 흔들어주었다.

창밖에는 빛이 만연해있었다.

저 밖에서는 강인한 여전사들이 무용담을 떠들며 낄낄거리고 있겠지. 어쩌면 내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즐거움에 끼지 못하고 나만 홀로 골골거리며 소외되어 있는 것은, 어째 아무래도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병자로 지내며 괴로워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니까.

빨리 이 몸을 회복해야 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정신 건강도 피폐해지고 말 거다. 최대한 빨리 새롭고 즐거운 추억들을 쌓아서, 전쟁의 나쁜 경험들을 잊어먹어야 PTSD가 안 온다고.

그러기 위해선 코페시 말대로 잘 먹고 잘 쉬어야겠지. 거기에 걷는 연습이라도 어떻게든 해서 재활치료 같은 것도 좀 해야할 거고.

현재 내 목표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보행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지팡이를 짚는다 하더라도 홀로 걸을 수는 있을 정도로 근육을 회복시킬 것이다.

물론 내가 마음먹은 대로 회복이 빠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지나간 전쟁의 상처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털고 일어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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