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4화 (35/67)

EP.34 새벽녘(1)

클라우디아 갈레나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온갖 지식과 기술들이 모이는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수많은 학습과 실험, 관찰을 이어나간 끝에 결국 황실 주치의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릴 방도가 없다니.

물론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모든 환자들을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 10여년 간, 역병에 기를 쓰고 맞서며 얻어낸 교훈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때로는, 그저 아스클레피오스의 가호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본디 이성에 앞서기 마련이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환자가 죽어가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는 것.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환자가 로마 전역을 통틀어 가장 고결한 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황제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 저를 믿고, 신임해주셨는데도, 저는…”

갈레나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자책하며 말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새하얀 머리의 노인을 향해서.

하지만 그 노인은 단순한 노인이 아니었다.

대제국의 최고 지도자이자, 위대한 카이세리스와 아우구스타, 그리고 최고 시민이라는 대단한 칭호를 소유한 자였으니.

하지만 그녀조차도 모로스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과로가 문제였을까. 춥디 추운 게르마니아의 최전선까지 달려가, 비바람을 맞아가면서까지 군단을 지휘하는 그 열정이 문제였을까.

흰 비단 이불이 덮인 침대 위에서, 황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끝없는 의무들에 짓눌린 채로.

“아니… 아니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푸석푸석하고, 말라비틀어진 건초와도 같았다.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다. 단, 한 가지도…”

갈레나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흠을 탓하지 않는 그 고결함 때문에.

어쩌면 이미 삶의 희망을 버렸기에 그러할지도 모른다.

“다만, 부디 약조해주게나, 페르가몬의 갈레나여… 루킬라, 내 후계자는, 건강할 수 있게…”

환자의 부탁, 아마도 마지막 부탁이 될 테지.

갈레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더 이상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오지 않게 하고자 애썼다.

죽음의 당사자보다 더 슬퍼할 자격이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의사는 영혼으로는 슬퍼할지언정, 환자의 마지막을 눈물과 비탄으로 더럽혀서는 안된다.

이미 슬픈 일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최소한 갈레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제 모든 역량을 다하여, 신들께 맹세코 그리 하겠습니다.”

황제는 안도하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운명이 결정지어진 것을 알았기에.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떠오르는 태양에게로 가라.”

그녀는 말했다.

올곧고 결연한 어투로, 관료들과 군인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나의 태양은, 지고 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철인황제는 그 뒤로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았다.

황실 주치의는 노인의 목에 잠시 손을 대보았다.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붕어하셨습니다.”

3월 17일 목요일, 새벽.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던 태양은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다.

마르키아 아우렐리아는 빈도보나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자신이 건설한 기지의 한가운데에서.

제2차 마르코반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정확히 5시간 전의 일이었다.

***

고요한 마차에는 세 사람이 타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큰 키의 사내, 글라폴레스.

살짝 그을린 피부에 탄탄한 근육을 가진 붉은 튜닉의 스파르타인, 테스티아.

그리고 두 천으로 가슴과 골반 부근만 가린 켈트인 이페이아.

적막을 깨고, 이페이아가 입을 열었다.

"너 괜찮은 거 맞아?"

붉은 옷의 스파르타인은 창가 자리에 누운 사내를 바라보며, 이페이아의 질문에 영혼 없이 대답했다.

"...멀쩡해."

저것은 결코 진실된 어투일 수가 없다. 이페이아는 그리 생각했다.

아무리 평소에 감정을 둔감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런 식의 반응은 진실된 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새파란 눈의 켈트인은 그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름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는 약간의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테스티아, 솔직해져 봐. 벌써 4일 전의 일을 떠올리면서도, 표정은 방금 애인이 마차에 치여 죽은 사람 수준이잖아. 슬픔과 비탄이 한가득이라고."

"…그런 게 아니야."

그러나 테스티아는 여전히 어떠한 진실됨도 담기지 않은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가끔씩 진짜 슬픈 사람들은 그런다더라. 지가 슬픈지도 모르다가 느닷없이 펑펑 울고 막-"

"이페이아, 아니야. 나,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이페이아의 말은 집요할 정도로 계속해서 이어졌고, 약간의 짜증마저 느낀 테스티아는 눈을 돌리며 격정이 담긴 대답을 내뱉었다.

이제는 제발 좀 조용히 하라는, 그런 간절한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만일 이페이아의 의도가 테스티아의 대답에 감정이 담기게 하려는 거였다면, 그녀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켈트인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아니, 너 슬픈 거 맞아."

이페이아는 테스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슬픈 눈이야. 자책하는 눈."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페이아는 자신의 친구, 또는 그 이상의 위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게 건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하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너랑 내가 그리 가벼운 사이도 아닌데, 이런 것도 못 알아채는 건 예의가 아니지."

당황한 표정의 테스티아에게, 이페이아는 핀잔을 주듯 말을 툭툭 뱉었다.

"최소한 네가 기뻐하는 모습은 잘 알아. 사실 웃는 것보다는 거의 우는 걸 본 적이 많긴 했지만, 뭐. 거의 웃었던 거라 봐야지."

테스티아가 이페이아의 말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그녀는 피식하며 웃었다.

그러자 이페이아는 기분도 좀 띄워줄 겸 해서, 둘 사이의 오랜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처음 할 때 기억나냐? 네가 너무 심하게 버둥거려서 침대 박살나는 줄 알았다고."

"그러다 진짜로 박살났고."

"그래, 여관 주인이 헐레벌떡 뛰쳐나와서는 우리들 보고 썩 꺼지라고 했었지. 기억 나?"

이페이아의 말을 들으며 과거를 떠올린 테스티아는, 피식거리며 상대의 말을 받았다.

"근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비가 왔었어... 맞아. 그때는... 재밌었단 말이지."

4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던 테스티아는, 친구와의 추억에 잠겨 잠시 미소를 지었다.

'친구라… 그래, 친구. 그저 가끔씩 조금 더 가까워질 때가 있을 뿐이야.'

우정의 시작은 참으로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는 이렇게 감정이 깊숙히 얽히게 될 것이라고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 이렇게나 친밀한… 서로 아끼는 절친이 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훈련소 막사 바깥에서 만나 친구가 된 첫 번째 사람이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항상 함께 일어나고 훈련하며 만나던 사람과 자연스레 우정을 쌓아왔기에, 4년 전의 자신은 인간 관계에 있어 실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이페이아가 없었다면 많은 것이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도시에 던져져,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또 없을 테니까.

그렇게 테스티아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이페이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그리고 다시 즐거워질 예정이지. 전쟁도 끝났는데 뭐. 이제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그 따스한 지중해 햇살 속으로 돌아가 떼돈을 벌어들이는 일 정도겠지."

언제나 그렇듯, 즉흥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어투였다.

이페이아의 고향인 히베르니아의 겨울은 로마에서도 유명하다. 그 이름부터가 라틴어로 겨울의 섬이라는 뜻이니.

그랬기에 테스티아는 간혹 궁금해했다.

음울한 북부의 섬에서 왔음에도 낙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음울한 곳에서 왔기에 낙천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려 4년의 시간 동안 교류해왔음에도.

이페이아 본인조차 자신의 성격이 어디서 유래하였는지 몰랐던 탓이었다.

질문의 대상자마저 모르는 답을 질문자가 얻어내는 것은, 당연히도 불가능한 일이다.

"넌 로마 날씨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여름 날씨는 짜증이 좀 나지. 하지만 세상에 따스한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봄이니까,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

이페이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곤, 잠시 사내를 내려다보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진 마. 내 장담컨데, 글라폴레스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될 테니까."

"…그걸 어떻게 알지?"

테스티아는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을 했다.

이페이아는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감이지. 그리고 내 감은,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거든."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논리도 없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없었다.

아침이 오면 수탉이 울 것이라거나, 비가 오면 습기가 찰 것이라는 등의 당연히 일어날 일을 말하는 듯한, 확신에 찬 말투였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군의관이었다.

"곧 있으면 출발하겠네. 난 간다."

이페이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군의관은 그녀와 교대하듯 올라탔다.

부상자를 수송하는 마차 행렬의 저 앞에서 출발 구호가 들려오자, 마부는 채찍을 철썩거리며 말을 움직이게 했다.

테스티아는 나무로 된 창을 열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과 촘촘히 박힌 별들은 하늘의 절반을, 떠오르는 태양이 발산하는 주홍빛 광채는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벽.

가장 어두운 밤과 가장 밝은 빛이 공존하는, 모순적이라면 모순적인 시간이었다.

그 양분된 하늘 아래에서,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와 검투사 대대, 그리고 부상자와 의무병들을 실은 마차의 행렬은 반듯한 돌이 깔린 가도 위를 달렸다.

남쪽으로,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도시를 향해 말들은 달렸다.

누군가는 그들의 목적지를 영원의 도시라 말하리라.

아아, 로물레아의 성역이여.

성벽 없는 천년의 도읍이여.

한없이 찬란한 대리석으로 가득한,

로마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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