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2화 (33/67)

EP.32 죽음의 일격(1)

지쳤다.

이젠 지쳐버렸다.

-캉!

내 체력의 80% 정도가 고갈된 것 같다.

어쩌면 90%, 아주 어쩌면 95%가 고갈된 것일 수도 있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만이 아니다.

팔은 반쯤 굳어버렸고, 전신은 불타는 듯 고통스럽다.

사슬 갑옷은 세 갈래로 찢어진 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끊어졌으며 갬비슨 일부는 외피가 터져 솜이 드러났다.

그리고 내 주위에는 어떠한 아군도 없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절망의 구렁텅이 한가운데에서.

-캉!

지금 내 상태가 멀쩡했다면, 와인딩을 해서 패링훅으로 도끼머리를 걸어 무장해제를 시키는 등의 발악을 해서라도 최대한 공세를 이어갔을 것이다.

심리전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몰아붙이려 들었겠지. 보통 그게 내 방식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힘이 없다.

상대는 존나 빡쳤는지 엄청나게 매서운 공격을 내질러 대는데, 내 공격은 점차 느려지기만 한다.

물론 나도 안다.

전투에서 수비적 태도로만 일관했다간 대가리 깨지거나 팔다리 잘리기 딱 좋다는 사실을.

근데 어쩌겠는가.

난 신도, 천마, 영웅도 아닌데.

난 필멸자다.

존나 명확한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고.

기병 8기와 30명 가량의 보병을 썰어내고서 지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인의 피를 검에 묻히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타개하긴 어렵겠지.

-캉!

그리하여 난 땅끝에 내몰렸다.

내 뒤, 저 밑에서 수없이 많은 냉병기들이 부딪히며 갈아내는 격렬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 로마군이 승리를 잡아가는 과정이겠지.

그래야 할 텐데.

-끼기기긱!!

쯔바이핸더의 검신과 도끼날이 서로 붙어 마찰했고, 심히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이를 악문 채, 날 쏘아보는 여전사의 눈빛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짐승의 기세와 같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

힘에서나, 체력에서나.

"으으으..."

내가 신음을 흘리는 것을 듣자, 상대는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날 저걸로 후려패고자 하는 것일 테지.

용인하지 않는다.

“멈춰!!”

재빨리 검의 각도를 틀어, 길고 장대한 크로스가드로 손을 보호한다.

-깡!

하지만 힘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내 체급과 기술조차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젠장할.

내 평생 여자에게 힘으로 밀리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기분이 심히 더럽다.

-캉!

지치지도 않는지, 저 미친 도끼전사는 또다시 날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고는 방패를 검신에 맞대어, 몸의 질량을 이용해 날 계속해서 뒤로 밀어붙였다.

이대로 가다간 떨어지고야 말 것이다.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원래 죽기 직전이 되면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고 한다.

살기 위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혹시 과거에 습득한 지식들 중에 써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내기 위한 뇌의 발악.

오늘 오전에 브리핑이 있었다. 그때 이곳 지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여기와 골짜기 안쪽과의 높이 차이는 사람 키 정도 된다고 했었지. 고대 로마 기준 평균 키라면 163cm 정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추락의 부상은 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심해봐야 발목이나 좀 삐는 정도로 그칠 수도 있겠지.

나의 아군도 저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얕은 골짜기 밑바닥에.

로마군 진영으로 떨어진다면 참 좋겠는데.

물론 확률적으로 따진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기야 하겠지.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불운이 날 덮칠 가능성도 0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방도가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이 상황이 연장된다면, 남는 것은 패배와 죽음 뿐이다.

"제발 좀, 꺼져!!"

오른손을 리카소로 옮겨 다루기 쉽게 잡고는, 온 힘을 다해 미친 도끼전사를 밀쳐내었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골짜기 위로 뛰었다.

마치 허공을 밟으며, 하늘을 나는 것처럼.

내 밑에, 시체가 널린 바닥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할 틈 따윈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팔로 머리를 감싼지 몇 초나 지났을까.

등에 전해지는 충격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났다. 고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이름모를 시체를 발판삼아 안전히 낙하한 것이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비록 고인은 피떡이 되어버렸지만.

"망할, 뭔 시체가..."

하지만 시체는 하나가 아니었고, 그랬기에 불쾌했다.

화살에 꽂혀 싸늘하게 변한 여자들의 시체, 그 중에서도 사후경직이 일어나 기괴하게 변한 얼굴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화살을 맞았는지 생각하다 보면, 꽤나 섬뜩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에.

-쉐에엑!

"옘병할, 화살!!"

등 뒤에서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몇 개는 내 몸에 박혔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갬비슨과 사슬갑옷의 조합은 기본적으로 매우 든든하다.

2세기의 저열한 성능을 가진 합성궁 상대로는, 과장 좀 보태면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정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전쟁터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법이고, 방어용으로 쓸 수 있는 건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그게 시체라 할 지라도.

"우욱..."

재빨리 뒤로 돌았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쯔바이핸더를, 왼손으로는 시체의 멱살을 붙잡아 치켜올렸다.

이걸로라도 화살을 막아야 한다.

젠장, 뒤통수가 보이게 들었어야 하는데.

하지만 여기서 멘탈을 놔버리면 모든 게 끝이다.

난 그리 생각하여 구토감을 억눌렀고, 그와 동시에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앞에는 화살을 쏟아내는 동굴이 있었고, 좌우에는 방패벽을 구성해 로마군을 막아내는 게르만 병사들의 뒤통수가 있었다.

기를 쓰고 날 죽이려 드는 이유가 있었구만.

-AAAAAGH!!!

익숙한 소리, 도끼전사, 미친련.

내 위쪽!

"뜨아핫!"

좀 괴이한 기합과 함께 시체를 내팽겨치고 바닥을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에 험악한 기세의 도끼가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U-RGH!!"

짧고 굵은 기합을 내지르며 도끼를 뽑아든 여전사.

그녀를 살짝 피해, 내 뒤로 가게 했다.

-쾅!

그러고는 뒤로 돌며, 쿼터스태프를 잡듯이 그립을 전환했다.

왼손으로는 칼날을 굳세게 잡은 채, 패링훅으로 투구를 찍는다.

“윽…!”

도끼전사는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타격이 들어가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둥근 부분으로 공격을 받아낸 탓에 빗맞았으니.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확인하는, 일종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아군이 맞을까 염려가 되는 탓인지, 동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살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로마군 또한 날 돕지는 못한다. 게르만들의 방패벽에 막혀,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이기에.

따라서 여전히, 오로지 두 명 간의 대결이다.

여기서 끝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난 죽는다.

더는 못 버틴다. 육신과 정신 모두 충격을 견딜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다.

당장 쓰러져 발광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그러니, 끝내야만 한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씨발."

칼날에 피가 살짝 눌러붙었다.

대다수의 경우에서는, 그리 중요한 흠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쓸 때는 모든 요소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법이다.

"…후."

6번째 공격법.

상대를 벨 수도, 찌를 수도 없다.

공격의 속도와 제어도는 기존 공격의 절반 정도로 약화되며, 자기 자신을 해할 위험도 커진다.

그러나 한 가지 이점이 있다.

상대를 확실히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강철 투구를 썼든, 코히프를 뒤집어 썼든, 그레이트헬름이든 바이저를 썼든 상관없다.

맹수이건 사람이건 상관없다.

방패를 들었건 패링용 대거를 들었건 상관없다.

6번째 공격을 머리에 맞으면, 상대는 죽는다.

예외는 없다.

손을 재빠르게 놀려, 검을 거꾸로 잡았다.

검신을 손잡이처럼 쥐었고, 폼멜은 하늘을 향했다.

이것은 더 이상 3.6kg 쯔바이핸더가 아니다.

이것은 폴암, 8파운드 폴액스다.

상대를 주시하며, 계획을 세워본다.

내 눈앞의 적을 죽이자마자 전력질주를 해 방패벽의 뒤를 공격한다.

그리해 혼란을 초래하고, 화살세례가 내 갑옷을 완전히 아작내기 전에 대치상태를 붕괴시키고 전투를 끝낸다.

그리고 나는 살아서 돌아간다.

쯔바이핸더 검술 교본은 이 기술의 운용을 다루지 않는다.

그 어떤 문헌도 이를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먹힐 것이다.

검술에서, 이것보다 더 강한 위력을 지닌 기술은 없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위험한 기술 또한 없다.

심장을 진정시키며, 거꾸로 잡은 검을 오른편 어깨에 얹었다.

준비한다.

검의 무게를 한 곳에 집중시켜, 복구 불가능한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기술.

타격의 극의에 달한 공격을.

-파밧!

두려움 없이 달려나가 도약한다.

하늘에 떠 검을 들어올린다.

고도의 집중으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상대의 움직임이 면밀히 읽힌다.

여전사는 방패를 들었다. 본능에 가까운, 습관적인 움직임.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양팔의 관절을 완전히 펼치자, 검의 무게 중심은 나의 머리 위에 정렬되었다.

이제, 내려찍는다.

온 힘을 다하여,

마지막 남은 모든 의지를 합하여,

행한다.

-콰아아아앙!!

모든 방어를 멸하는, 죽음의 일격.

모르드하우(Mordhau)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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