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1화 (32/67)

EP.31 황소의 자세(2)

'안된다. 동요해서는 안된다.'

투르바레는 등에 메어 놓았던 도끼와 원형 방패를 꺼내며,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였다.

정신을 진정시켜야만 한다.

저 거인의 사특한 말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선, 저 놈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지 않기 위해선 그리 해야만 한다.

"저, 저기요? 들리십니까?"

거인은 짐짓 순진한 척을 하며 5분만 쉬자는 둥 헛소리로 해대었으나, 투르바레는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8기의 기병을 쓸어넘긴, 교활하기 짝이 없는 말들의 살해자가 이렇게 멍청한 말을 진심으로 내뱉는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믿는 이는 이 세상에 1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투르바레는 그리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보이고, 상대에게 저급한 속임수는 때려치우라는 뜻을 전달하고자 입을 열었다.

"...아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증오와 울분이 끓어올랐다.

자신의 병사들을 무참히 베어 죽인 걸로도 모자라, 망아지 때부터 키워왔던 애마마저 살해한 것에 대한 증오였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해, 전사들의 영혼에 수작을 부리고 명예를 더럽힌 저 사악한 거인을 향해 울분이었다.

저 뻔뻔한 말투와, 전사의 예의 따위는 내다버린 태도가 강한 경멸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콰디의 족장은 구태여 그 감정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넌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서 어떠한 자비도 기대하지 말아라. 결코 베풀어주지 않을 것이니."

그녀의 말을 구성하는 모든 음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영혼의 다짐, 그리고 구체화된 감정의 덩어리가 생성해내는 힘이었다.

투르바레는 다짐했다.

저 자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리라고.

"내 기필코, 네놈의 사지를 뜯고 머리를 잘라 신들의 전당에 바칠 것이다."

팔다리가 찢긴 초라한 거인의 투구를 벗기고, 눈과 혀를 뽑아 아주 병신을 만들어주리라. 오직 그 볼품없는 몸뚱아리와 좆만을 남겨 평생을 장난감으로 살게 할 것이다.

그러다 정력을 모조리 뽑힌 채 늙고 병들어 굶어죽어가며 죽음을 애원하면, 강물 속에 그 대가리를 처박고 익사를 시킬 것이다.

허나 그 시체 또한 편히 쉬지는 못하리라. 말안장에 밧줄을 매달고 질질 끌며, 게르마니아의 모든 부족에게 그의 추태를 감상케 할 것이니.

내 필히,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복수를 거행하리라.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해야 한다.

“아니, 그, 일단 진정해보시죠.”

적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비록 저 거인은 지금 누가 봐도 조롱조가 가득한 말투로 상대를 비웃고 있지만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감정에 휘둘려서는 승리할 수도, 복수를 이룰 수도 없다는 사실을 투르바레는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끊임없는 생각과 되새김으로 내면의 폭발을 억제했다.

거인이 선을 넘기 전까지는.

"응애!”

“…뭐라?”

“응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으으… 으으으…”

고통스러웠다.

저런 저급한 도발을 일삼는 자에게, 그 많은 전사들이 허무하게 도륙당하다니.

“…으으으으!!”

저들을 구해냈어야 할 내가, 제 일을 하지 못해서. 그래서 이리 된 것이다.

자신을 한낱 아기라 낮추며 콰디의 모든 전사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어이없는 도발에, 투르바레는 그만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내지르며, 그녀는 돌진해 도끼를 휘둘렀다.

-캉!

서로 다른 종류의 두 날붙이가 맞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

온갖 발악을 행하며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던 글라폴레스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게르만 전사가 뿜어내는 광기에 가까운 호전성 속에서, 글라폴레스는 집착을 엿보고야 만 것이다.

오직 광인만이 저런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 따위 버려서라도, 상대를 족치려는 정신나간 집착을 일삼는 자만이.

이 전투는 이제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저 망할 야만인은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만 것이다.

체력이 점점 사라져 간다. 대검을 든 사내는 그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검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검을 멈추는 순간 방어는 끝나고, 관성에 의해 신체는 경직된다.

명백한 빈틈이 생기는 것을 용인한 대가는 오직 죽음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내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

심상 속에서 다짐을 되새기며, 글라폴레스는 검을 쭉 내질러 여전사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반응 속도는 투르바레가 더 빨랐다.

방패에 막힌 쯔바이핸더는 순식간에 왼쪽으로 젖혀졌다.

글라폴레스는 잠시 당황해 머뭇거렸고, 투르바레는 그 짦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벅지의 근육을 이용해 튀어 나감과 동시에, 그녀는 상대의 어깨에 도끼를 박아넣었다.

-치잉!

사슬 갑옷의 어깨부분을 감싸던 체인 일부가 끊어졌고, 도끼날은 갬비슨의 두꺼운 외피와 그 안에 빽빽히 채워진 솜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밑에 놓인 글라폴레스의 어깨살까지 잘라내지는 못했다.

"어억…?!”

그러나 충격은 전달되었기에, 글라폴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투르바레를 발로 차 거리를 벌림과 함께 도끼를 뽑아내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내 명예를 잘도 모욕했군. 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강인한 게르만의 전사는 자세를 다잡으며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으나,

"...뭔 개소리야?"

글라폴레스가 게르만어를 알아먹지 못했기에 제대로 된 반응은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투르바레는 라틴어를 알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썩을 놈 같으니!!!"

콰디의 가장 강한 전사는, 또다시 분노하며 공격에 나섰다.

***

"족장님, 족장님은 어디 계신가!!"

궁지에 몰린 게르만 전사들은 울부짖었다.

골짜기 속으로 내몰려, 동굴 안으로 숨어드는 신세가 된 그들은 간절히 최고지휘관을 찾았다.

"이제는 한계입니다,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직은 안된다!! 조금만 더 버텨라!! 족장님들께서 대피하실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골짜기 위에서는 죽은 아군과 살아남은 아군이 뒤섞여 비 오듯 내리고, 동굴로 향하는 길목의 좌우에서는 맹렬히 압박해 오는 로마군들을 방패벽으로 간신히 막아서고 있는 형세.

그나마 다행인 점으로는 동굴 하나에 병력이 집결된 탓에 궁수들이 많이 모여 골짜기 위에서 밑로 뛰어내리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자들을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였고,

이 동굴의 끝이 깊은 숲 속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나머지 하나였다.

물론 로마군들의 사슬 갑옷과 판갑은 대부분의 경우 합성궁의 화살 따위에 뚫리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초근거리에서는 또 이야기가 달랐다.

게르만 연합군의 목표는 어느새 로마군에 맞서 승리가 아닌, 최대한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족장님, 족장님께서 다치셨다!! 치유사는 어디 있는가!!"

시체 더미 속에서 그리 외친 병사는, 마르코반니의 족장을 부축하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재빨리 뛰쳐나왔고, 족장을 둘러메어 동굴 안으로 데려갔다.

그러자 머리에 사슴 두개골을 쓴 치유사 두 명이 헐레벌떡 뛰쳐 나왔는데, 두 명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족장의 모습은 참담했다.

로마군의 검투사들이 쓰는 개조된 채찍에 베인 탓에 목에선 피가 흘렀다.

그리고 한때 방패였던 조각이 끼워진 왼쪽 팔은 아주 작살이 나 있었다.

치유사들은 재빨리 그녀에게서 갑옷을 벗겨내고는 진찰을 시작했다.

"...망할."

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략적인 부상의 원인이나 상처의 상태 등은 꽤나 명확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또한 명확하였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명확하였다.

"...너무 늦었습니다. 의식을 준비해주시죠."

치유사들은 담담한 어조로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 말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치료 과정과는 관계가 없었다.

치유사들의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기에, 게르만의 전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했다.

그들은 족장이 입고 있던 짐승가죽을 깔아놓고는, 그 위에 부상자를 고이 눕혔다.

호위병은 자신의 창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족장은 자신의 검을 잡은 채, 간헐적으로 피를 토하며 호위병을 향해 말하였다.

"아직, 아니다... 끝나지, 쿨럭, 않았어..."

기도가 손상된 탓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바람이 심하게 섞여 나왔다.

"투르...바레, 콰디의 족장... 그 애를...구..."

호위병은 족장의 말을 경청하는 한편 옆에 서 있던 치유사에게 무언의 질문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족장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러했다.

"그녀는 절대, 쿨럭, 죽으면... 우리 모두, 끝..."

그렇게 족장의 목소리는 서서히 멎어갔고, 치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푹

호위병의 창날은 족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오딘의 전당에서, 언제나 행복하시길."

전사로서 명예롭게 죽었으니, 그녀의 영혼은 신들의 세상으로 넘어가 행복을 누리리라.

그것이 영광되게 죽은 전사가 누려야 할 올바른 보상이다.

마법이나 속임수에 의해 더럽혀져서는 안되는, 신성한 운명.

그러나 산 자의 운명, 산 자의 의무는 가혹하다.

지상에서의 절망을 해결하는 것, 그것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이다.

호위병은 고개를 돌려 동굴 바깥을 보았다.

눅눅한 구름 사이로 빛 줄기 몇 가닥이 쏟아졌고, 그것들 중 하나는 골짜기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곳에 거인이 있었다.

도끼를 든 강인한 전사와 맞서 싸우는 대검을 든 거인이.

"저 괴물을 죽이고, 부디 살아서 돌아와주시길."

박력과 민첩함으로 상징되는 움직임으로, 전사는 거인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전사의 정체는 꽤나 자명했다.

그 정도으로 강한 전사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까.

"투르바레, 콰디의 족장이여."

호위병은 자신의 무기를 굳게 붙잡았다.

어머니의 피가 묻은 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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