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30화 (31/67)

EP.30 황소의 자세(1)

좋지 않다.

여러모로 좋지 않다.

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고통의 정도도, 내가 검을 놓쳐버렸다는 사실도.

모두 다 좋지가 않다.

역시 이런 짓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칼로 군마를 베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그딴 불가능한 짓을 계속 해대니까 이 꼬라지가 되지. 다치고, 비틀거리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헤메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단병이 왔을 때 잽싸게 풀숲 속에 숨어있기나 할 걸 그랬다.

젠장맞을.

-히히힝…

구슬픈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피에 찌든 진흙을 뒤집어 쓴 내 쯔바이핸더가 놓여있었다.

혹시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재빨리 검을 향해 다가갔다.

검이 부서졌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말이다.

“제발, 제발…”

진흙을 성급한 손길로 걷어내고, 날의 상태를 확인한다.

다행히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크게 상하지도 않았고.

“휴…”

역시 비싼 돈 주고 산 보람이 있다. 이렇게나 튼튼하다니.

극한의 안도감에 어지럼증조차 가시는 듯 했다.

그런데, 가만.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데.

...그 기수는 어디로 갔지?

-쾅!

내가 그리 생각하자마자, 대략 내 뒤 2m 정도 거리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엎어져 있던 기수가 주먹으로 땅을 치며 일어난 것이다.

"역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나는 선현의 지혜에 감탄하는 한편 험악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는 게르만족 전사를 유심히 관찰했다.

눈가를 가리는 안면 보호대가 달린 투구, 사슬 갑옷 위에 추가로 두른 회색의 짐승 가죽.

타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저 여자도 갑옷을 두 겹씩 입고 있다.

중장갑 기병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이거나 단순한 병력 보호의 일환, 대충 둘 중 하나가 원인이겠지.

실제로 방어력은 꽤나 강했다. 상반신 몸통에 한정한 이야기기는 했지만.

근데 정확한 각으로 잘 찌르기만 한다면 저걸 뚫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난이도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니 지금껏 계속 그래왔듯, 머리를 노리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겠지.

설마 투구마저 두 개를 쓴 것은 아닐 테니까.

"흐으음..."

그나저나 자세히 보니 얼굴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

투구 밑으로 빠져나온 긴 금발과 화장기가 없음에도 꽤나 붉은 입술, 그리고 서양인 특유의 푸른 눈.

비록 얼굴의 일부가 가려져 있긴 하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상당한 미인이라 할 수가 있겠지.

아니, 집어치우자. 어차피 죽여야 할 상대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대로 있다간 진짜 허무하게 죽어버릴 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힘들다.

너무 많은 고난을 겪어버렸다.

"그, 혹시 5분만 쉬었다가 하면 안될까요?"

저 게르만족 기병이 라틴어를 알아먹을 리는 만무하지만, 일단 한번 내뱉어 보았다.

진짜 존나 힘들어서 그렇다.

솔직히 체감상 내가 평생 한 운동 다 합친 것보다 오늘 하루 죽기살기로 칼질한 게 더 힘든 것 같다.

거기에 유사 낙마로 인한 다중 타박상이 더해졌으니, 그 결과는 대략 예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승산을 높이기 위해 나름의 제안을 했는데, 상대방이 등에 멘 도끼와 방패를 꺼내드는 걸 보니 별 효력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도끼가 꽤 크다. 한손으로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서워라, 젠장할.

"저, 저기요? 들리십니까?"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게르만인이 라틴어를 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고.

"...아니."

근데 놀랍게도 라틴어를 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 역시 뭔가 있다.

방패도 단순히 나무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철로 테두리를 잘 마감되어 있는 데에다, 나름 유창하게 라틴어까지 한다니.

게르만 사회 내에서 좀 높으신 분, 그러니까 대충 족장이거나 뭐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넌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서 어떠한 자비도 기대하지 말아라. 결코 베풀어주지 않을 것이니."

그나저나 답변의 내용이 내 기대와 너무 다른데.

이건 문제가 좀 있다.

"내 기필코, 네놈의 사지를 뜯고 머리를 잘라 신들의 전당에 바칠 것이다."

문제가 좀 많이 있는 것 같다.

말의 내용과 화법 모두에서 유혈과 폭력 행위에 대한 본능이 진득하게 묻어나오고 있다고.

이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이러니까 야만인 소리를 듣지.

"아니, 그, 일단 진정해보시죠.”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내 신체가 조금이라도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지금 이 상태로 붙었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문제는 저 망할 도끼전사가 씩씩거리며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는 것.

안타깝게도 내 주위엔 아군이 하나도 없다.

죄다 저 멀리 골짜기 근처에서 게르만들을 열심히 밀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진 지원을 와주지 않겠지.

심지어 거리도 꽤나 된다. 내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 도끼전사는 라틴어를 알아먹기에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곧바로 날 죽이려 들 것이다.

저 여자는 강하다. 그것도 존나게 강하다. 내 예리한 감이 그리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해서 장비의 측면에서 내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쯔바이핸더라 해도, 철제 프레임으로 보강까지 해놓은 방패를 물리적으로 부숴버릴 수는 없다. 축복이 부여된 상태라면 해볼만 하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축복을 얻어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만약 깰 수 있다고 해도, 날이 아예 두 동강이 나버리겠지.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내 상태는? 개판 그 자체다.

사슬 갑옷은 반쯤 찢겨나가서 너덜너덜해졌고, 다리는 후들거리는 데에다가 팔은 슬슬 떨리기까지 한다.

허리춤에 매놓았던 작은 방패도, 한손검도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 상태의 내가, 저 개년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그럴 확률은 낮다.

"아냐, 어쩌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살아날 방도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세상은 남녀역전 세계니까, 난 원래 세상으로 치면 여군의 위치에 있다는 소리다.

또한 이 세상에선 근본적으로 남자가 보호받는 입장일 터.

내가 여기서 저 미친년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어떨까.

그래서 어떻게든 저 미친 여전사를 감동시킨다면, 그리 한다면 아주 어쩌면 전투를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 겉보기엔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꽤나 간단하다.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의 특징을 모방해 타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것이 바로 불쌍한 척의 본질이다.

이른바 '해줘'의 시대인 21세기를 살아온 나다. 이까짓 술수는 케이크를 먹는 것처럼 손쉽게 성공할 수가 있지.

나는 현대인이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

좋아. 이론은 완벽해.

논리 회로가 정렬되었다.

그리고 거지 같은 신체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의 성대는 최적의 상태로 맞춰졌다.

내면의 나약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입을 연다.

“응애!"

그러자 순간, 도끼 전사가 멍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내게 되물었다.

“…뭐라?”

좋아. 어떻게든 진정을 시켰다.

이 말도 안되는 전략이, 설마 진짜 먹히는 것인가?

그래. 옛 말에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자가 일류라고 했다.

나는 지금, 일류가 된다!

“응애!!”

누구나 확실히 들을 수 있게 외쳤다. 크고 분명하게.

아무리 귀가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으으… 으으으…”

도끼전사는 머리를 감싸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행동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격성은 줄어들었다.

어쩌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귀여운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자신의 악행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하는 긍정적인 현상이 틀림없어.

“…으으으으!!”

도끼전사가 내는 소리가, 갑자기 구속구를 문 짐승 같은 괴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악!!!!

그러더니, 저 도끼전사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어디서!! 어디서 내게 모욕을!!”

도끼를 치켜들고, 여전사는 날 향해 돌진해왔다.

분노에 가득 차 포효하듯 말을 내뱉으면서.

미친듯이 도끼를 휘둘러 대는 것을 칼날로 가드해 간신히 막아내었다.

그러나 이 미친년은 도통 멈추지를 않았다.

“죽음!! 죽음을!! 네놈에게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으으을!!!”

-캉! 캉! 캉!!

이를 악물고 날 죽이려 달려들면서 끊임없이 도끼를 내려치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겼다.

이대로 가다간, 버틸 수가 없다!

여기서 끊어야만 한다!

“좀 꺼져!!”

주의가 빈 다리를 차서 밀쳐내고, 충분한 거리를 만든다.

이렇게 된 이상,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어쩌면 내가 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싸움이 시작된 이상 도망칠 수는 없다.

짐승을 상대할 때의 대원칙은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소한 난 그렇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하게 등을 보이고 죽는 것 보다는, 살고자 검을 휘두르다 죽는 게 덜 억울할 테니까.

"...반성을 모르는, 야만인 같으니."

양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부여잡는다.

그러고는 검을 머리 오른편에 같은 높이로 올려, 상대를 겨냥하듯 칼날을 겨누었다.

옥스, 황소의 자세.

게르만 전사는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우며 내게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두려워하며 눈을 감지 않는다.

위협에 압도되어 떨지도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테지.

황소의 자세로,

검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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