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 말들의 살해자(3)
-본대다!! 본대가 왔다아아!!
마침내 나타난 본대의 모습에, 검투사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환호성을 내질렀다.
붉게 칠해진 큼직한 직사각형 꼴의 방패 스쿠툼과 빰을 가리는 은빛의 철제 투구가 이렇게나 반가워 보인 적이 있었던가.
로리카 세그멘타타의 철판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파열음과, 천 명이 넘는 병력이 땅을 밟으며 만들어내는 발소리.
평소라면 그저 소음에 불과했을 소리들은 어느새 희망을 전하는 승리의 음악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청각의 열기 사이로 로마군의 상징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의장병(Aquilifer)의 손에 들린 깃대와 그 위에 선 독수리 모양의 우상, 아퀼라(Aquila).
그 찬란한 황금빛 우상은 아주 잠깐 동안 구름을 뚫고 비친 햇살을 받아 고고히 빛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대장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엄청난 감동에 휩싸인 채 되뇌였다.
"그래, 정확히 제 시간에 와 주었군. 우리를 구하고자 와 주었어!!”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자 흘러나온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 약간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검투사들을 향해 외치었다.
"검투사들이여!! 로마의 상징, 승리의 상징이 우리와 함께한다!! 용맹히 저들을 처죽여라!!"
아퀼라는 로마군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로마 그 자체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로지 정규군인 군단병들만이 그 신성한 우상을 들고 로마의 강함을 과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아퀼라가, 보조병 검투사들 앞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아름다운 진격을 본 검투사들의 내면에서 두려움이 쓸려나가고 투지와 열정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마치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개선식과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이 눈앞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듯 했다.
곧 누리게 될 영광과 명예, 그리고 시민권을 생각하자 검투사들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로마군에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절대 낡지 않는 구호가 있다.
-ROOOOOMA INVICTAAAAA!!!
로마에 승리 있으라.
검투사들은 한 목소리로 그리 외치며, 용맹히 적에게로 달려들었다.
***
악몽.
이것은 악몽이다. 현실에 도래한 거대한 악몽.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한 채 로마의 정규군을 맞닥뜨리다니.
게르만 연합군은 순식간에 절멸의 위기에 놓였다.
적군은 늘어났으나, 병력은 1/3이 줄어 12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나마 전황을 뒤집을 만한 존재인 기병도 벌써 절반이 사라져 10기밖에 남지 않았다.
보병을 지휘하는 마르코반니의 족장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아군의 사기는 증발하였다.
이 정도면 싸움 따위는 포기하고 항복하는 게 더 합리적인 일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기병들이여, 당황하지 말아라!!"
그럼에도, 이 악몽을 수습하고자 온 힘을 쏟아붓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모두 저 자에게서 떨어져라! 헛되이 목숨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게르만 연합의 기병대장이자 콰디족의 족장인 투르바레.
그녀는 말을 달리며 남아있는 기병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일단 대검을 휘두르는 저 미친 거인으로부터 아군 기병대를 떼어놓아야 한다.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든 기병대의 병력 수를 보자 피눈물이 흐르는 듯 했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았다.
보병의 지휘관인 마르코반니의 족장마저 행방이 묘연해진 이 상황에서, 투르바레 자신마저 무너지면 게르만 연합은 진정 끝장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포에 질린 아군은 항복을 선언하게 될 것이고, 그 끝은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지하 깊숙한 곳의 광산으로 끌려갈 것이고, 남자는 기이한 이상성욕에 찌든 귀족의 성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되리라.
비록 로마군의 포로가 어떤 운명을 맞는지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대다수의 게르만족 병사들은 그 사실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투르바레는 로마에 대한 저주를 내뱉으며 말을 달렸다.
"망할 로마년들 같으니!"
그녀의 검이 빗방울을 튕기며 검투사 대대 사이사이를 가로질렀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겼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콰디의 족장은 점차 늪에 빠져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용맹히 싸운다 한들 아군이 이 지경이 된 상태에서 과연 무엇을 이뤄낼 수 있겠는가. 전열도, 사기도 다 사라진 이 상황에서.
회의감, 아주 강렬한 회의감이었다.
그 공허한 감각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하지만 투르바레는 알았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되고, 계속해서 싸워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오딘이시여!!”
본래 전투는 끝날 때까진 끝난 것이 아니다.
“저희에게 지혜와 용기를, 그리고 전사의 끝에 걸맞는 축복의 인도를!!”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진 격언을 되새기며 투르바레는 오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우리를 그대의 황금 방패로 된 발키리의 전당으로 이끄소서, 영광된 망자들의 신이시여어어!!"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는 한편, 전방에 몰려드는 방패병들을 응시했다.
로마군이 방패 너머로 서서히 창을 들어올리는 광경이 투르바레의 눈에 선명히 비쳤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 아군의 기병대라는 것은 뻔하디 뻔한 사실.
그걸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기병들이여, 투창에 대비하라!! 남쪽에서 멀어져라, 속도를 높이고 최대한 흩어져 자세를 낮춰라!!"
투르바레의 명령을 들은 기병들은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투창의 명중률을 낮추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 군단의 지휘관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겨냥해라!! 기수가 아닌, 군마의 머리를 노려 빗나가지 않도록 하라!!
-예!!
군단병들이 단순히 한쪽 방향에서만 공격해 들어갔다면 기병들은 그저 반대 방향으로 도주했으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군단병들은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천 명씩 진격해왔다.
그리고 투르바레가 경고한 방향은 남쪽이었던 탓에, 대다수의 기병대는 북쪽에서 군단병의 투창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투창!!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리자, 수많은 필룸들이 하늘을 날아 게르만 기병들에게 내리꽂혔다.
천 명 가량의 병사들이 동일한 동작을 취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광경은, 어찌 보면 나름의 행위예술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정렬된 로마의 군단병을 상대하는 자들은 그런 여유로운 감상을 남길 처지가 안되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일제히 쏘아대는 투사체들을 모두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작 10기 남은 기병 중 7기는 고슴도치와 같은 외형으로 변모해 낙마하거나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투르바레는 몸을 낮게 숙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실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무력히 죽어나가는 꼴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그들이 죽어가기에 슬픈 것은 아니었다.
아군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영광스러운 죽음이나, 사랑하늣 가족 곁에서 검을 잡고 목을 쳐지는 죽음이라면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여태껏 키워낸 최강의 전사들이 이런 난장판에서 어떠한 의미도 없이 죽는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로마에 대한 증오 속에서, 투르바레는 위대한 에인헤랴르들이 죽은 자들을 오딘의 전당으로 무사히 인도해주기를 빌었다.
그리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아아... 아아아악!!"
분노와 슬픔이 이성을 잠식했고, 투르바레의 본능은 한 명의 전사를 목표로 지목했다.
어째서인지 눈앞이 조금 흐려졌지만 그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콰디족의 족장은 검과 고삐를 굳세게 잡은 채 말을 몰았다.
자신이 그렇게 피하라 했던, 대검을 든 거인을 향해서.
***
희망이 보인다.
본대가 도착했고, 내 갑옷은 아직까지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
비록 내 몸 상태를 결코 최고의 상태라 부를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내 앞으로 또다른 기병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
"이 개같은 새끼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기병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기병이 날 찾아오는 꼬라지가 되었다.
“대체 문제가 뭐야? 왜 나만 죽이려고 지랄인 건데?"
이젠 팔이 아파오는 지경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순간의 실수와 빈틈이, 내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니까.
호흡을 고르며 상대를 노려본다.
목을 자르기에는 너무 거리가 가깝다.
그렇다면 다른 방안이 필요하겠지.
"어디 한 번 와 봐라, 이 좆같은 기병 새꺄."
나의 오른쪽 허리 뒤로 검을 빼어놓았다, 온 힘을 다해 횡으로 휘둘렀다.
말의 다리를 자르고 뼈를 부수는 감각이 그대로 내 손으로 전혀져 왔다.
이제 저 말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어?!"
그때, 느닷없이 허공을 날아오는 한손검이 내 눈에 들어왔다.
던졌다.
저 미친 기수가, 검을 던진 거다.
표창마냥 던진 거라고.
-캉!
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한손검은 전속력으로 내 투구에 충돌했고, 이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두통이 몰려왔다.
내 자세를 흐트러트리기에는 충분한 수준의 고통이었다.
순간, 앞으로 고꾸라진다.
말이 무너져내리는 방향으로.
-쾅!!
사슬갑옷이 뜯겨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물이 튀기는 소리, 흙이 분쇄되며 튀기는 소리.
그 소리들이 투구 속에서 서로 엉켜 시끄러운 소음이 되었다.
…아파.
온 몸이 아프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난 말의 시체에 치여, 진흙탕 속을 구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