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말들의 살해자(2)
"어, 그… 족장님, 왜 그러십니까?"
마르코반니의 족장 옆에 선 한 호위병이 그리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단순히 안위를 묻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족장이 굳어버린 탓에, 그 이유를 파악하고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족장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아, 아니야..."
자신의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충격을 느꼈기에.
"이, 이러지 마. 이럴 순 없어..."
"예? 족장님? 괜찮으십니- 족장님!"
호위병은 털썩 주저앉은 족장을 황급히 부르고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화살이나 투창의 흔적은 없었으니 부상으로 인한 쓰러짐은 아니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족장의 얼굴은 허옇게 변한 채,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용맹하시던 족장님이 이렇게 되었을까. 호위병은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족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시다면 말 좀 해주십시오."
지극히 평범하고 간단한 질문. 그러나 족장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아,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족장님 제발-"
그러나 호위병 당최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당혹할 뿐이었다.
그나마 뭔가를 유추할 수 있는 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족장의 손가락 뿐이었다.
호위병의 시선은 그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쭉 따라가 저 멀리의 어느 사람에게 닿았다.
전신이 기이할 정도로 새카만 그 자는 자신의 옆모습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 자가 아주 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과 같은 길이였지만, 결코 창은 아니었다. 그 전체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하지만 동시에 검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것은 검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크고, 길었으며, 기괴한 형태의 칼날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불꽃을 담은 듯한 칼날을.
저런 무기를 다루는 자는, 로마군과 게르만 연합군을 통틀어 오직 한 명 뿐이다.
"…거인."
긴 검을 들고 아군을 도살했던, 그 사악한 거인을 목격한 호위병은 족장을 대신해 주위의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젠장할, 거인이 살아있다!! 기병이든 뭐든 불러서 어떻게든-"
하지만 그녀의 명령은 끝을 맺지 못했다.
온 몸이 피로 물든 거인이 가뿐히 군마의 머리를 베어내는 광경을 목도하였기에 그러하였다.
충격적인 사건에 정신이 반쯤 나간 탓이다.
"무, 무슨..."
손이 벌벌 떨리고 오금이 저려왔다.
거세게 내리는 비 속에서, 번개의 광채를 등진 거인은 호위병과 눈을 마주쳤다.
철가면 안에서 빛나는 새카만 눈.
그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가면은 그야말로 온 얼굴을 다 가리는 구조였으니.
하지만 그러했기에 두려웠다. 저 존재에게 진정 얼굴이 존재하기는 한단 말인가.
저 가면 너머에,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가 심연을 넘어온 망자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족장의 어깨를 흔들어대며 애원하듯 물었다.
"조, 족장님, 저게 대체 뭡니까?!"
그것은 자신의 불길한 상상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금이라도 족장이 정신을 차려 그렇지 않다고, 저건 그저 좀 긴 검을 든 키가 좀 큰 사람에 불과하다고, 그리 말해주기를 내심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족장은 답하지 않았다.
20기의 기병이 15기, 10기로 줄어드는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며, 호위병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흰 뭘 해야 합니까?! 족장님? 족장님!!"
그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검을 든 자가 기수와 군마와 보병을 베어넘기자, 때때로 붉은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나와 안개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기현상을 마주한 아군은 제정신을 잃은 채 도망치기 바빴다.
-도망쳐어어어어!!
-저, 저 새끼 뭐야, 죽었다면서! 죽었다면서!!
발할라고 나발이고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저 검에 베여 죽은 자의 영혼은 괴로운 운명에 처해 고통받게 되리라.
전장에 선 모든 게르만인은 특유의 본능을 통해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깨우쳤다.
그러했기에 그들의 사기는 증발했고 대열은 붕괴되어, 얕은 골짜기 안으로 뛰어들어 숨기 바빴다.
"족장님!! 대열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명령을-"
"아하, 하, 하하..."
호위병은 간절히 청했으나, 족장은 쓰러진 채로 허망히 웃으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기병대가 무너져 간다.
마지막 희망, 마지막 계책이 사라져 간다.
정체도 이름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에게.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는 거인에게.
저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살해하는 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저것에게 죽은 자는, 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아니, 안됩니다, 제발..."
모른다.
그렇기에 답할 수 없다. 무엇을 상대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 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뿐이다.
한참을 웃던 족장은 겨우 숨을 고르고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졌어."
무겁게 가라앉은 말투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우린 졌어, 이 전쟁에서 진 거라고."
모든 걸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서일까. 족장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호위병은 달랐다.
그녀는 오히려 손에 쥔 단창을 굳게 잡고서, 어떻게든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믿었다.
비록 깊숙한 무의식 속에선 그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닙니다. 저 거인만 잡는다면 아직은-"
"거인 때문만이 아니다."
이에 족장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답했다.
"너무 늦었어."
그때, 느닷없이 수많은 뭔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게르만 전사들의 등에서 무엇인가가 자라났다. 나뭇가지를 닮은 무언가가.
등에 무엇인가가 자라난 전사들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픽픽 쓰러지거나, 얕은 골짜기 밑으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설마?"
게르만족들이 그 '무언가'의 정체가 다름 아닌 화살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골짜기 너머를 바라보았고,
-ROOOOOMA!!
그곳에서 붉은 방패의 물결과,
-INVICTAAAAA!!!
황금빛 독수리를 보았다.
***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ADIUTRIX).
구조자라는 뜻의 이명을 지닌 이 군단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검투사 대대를, 야만인들의 공세로부터 구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인 궁병들이 발사한 화살은 비를 가르고 게르만인들의 몸을 꿰뚫었고, 말들의 살해자 글라폴레스는 기병과 보병을 고루 죽이며 게르만 연합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이 괴로운 상황에서 대다수의 게르만 병사들이 도주를 택하리라는 것은, 그리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부군단장은, 화살이 비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뚫고 입을 열었다.
"군단장님, 저들이 골짜기 안으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슬슬 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제안. 하지만 군단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다.
"아니."
약간 뜸을 들인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병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다. 또한 저 위에 아직 상대의 보병 또한 남아있으니, 서두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군단장은 잠시 골짜기 위의 전황을 둘러보았다.
난전이 한창이니, 궁병으로 마무리하기엔 무리가 있다.
허나 기병을 상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원거리 무기를 이용하는 것.
얼핏 보면 모순적인 상황이지만, 로마 정규군의 무장 용도를 잘 아는 군단장에게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군단병들에게 필룸을 준비하라고 명해라."
"알겠습니다."
부군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러가려 했다.
군단장이 그녀를 불러 세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깐만."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부군단장의 시야에,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군단장의 손이 들어왔다.
"저 자는 누구지?"
골짜기 너머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든 그 자는, 놀랍게도 군마를 베어내고 있었다.
부군단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중얼중얼 대답했다.
"글...쎄요, 키로 봐서는 일단 좀 특출나게 큰 악숨 출신 병사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저렇게 큰 검은 처음 봅니다."
지금 기병을 운용하는 측은 게르만족이었으므로 저 기이한 병사는 로마군의 일원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군단장은 약간의 충격에 빠져 살짝 질려 있었다.
"세상에, 검으로 말을 참수시키는 게 가능하다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군마를 찔러 죽이는 일은 있어도 베어 죽이는 일은 엄청나게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론적으로야 가능하지만, 로마군이 사용하는 가장 긴 검이라 해도 말의 다리를 베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군단장은 그 사내의 활약을 지켜보며 조용히 되뇌였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저 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군 그래."
그때, 누군가가 군단장의 뒤에서 입을 열었다.
"군단장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고지휘관께서 군단장님에게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전서구를 어깨에 얹은 연락병이었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군단장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귓속말로 전달하는 게 적합할 듯 한데,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군단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연락병은 그녀의 귀에 입을 갖다대었다.
"그래, 알았다."
약간 초조한 표정의 연락병은 군단장의 대답을 듣고는 빠른 걸음으로 후방으로 돌아갔다.
"뭐였습니까?"
부군단장은 물었으나, 군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군단을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부군단장은 여전히 약간의 궁금증을 품고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군인의 의무를 다했다.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
-예!!
“공세를 시작하라, 저들을 쓸어라! 로마의 이름으로!!”
-로마의 이름으로오!!
-로마의 이름으로!
-로마의 이름으로오오!!!
그리 명령을 하달하는 부군단장과, 힘있게 답하며 진군하는 군단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드디어 전쟁을 끝낼 때가 왔는가. 끝내야만 할 때가…"
군단장, 마르키아 발레리아 막시미아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