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27화 (28/67)

EP.27 말들의 살해자(1)

게르만의 기병은 무력한 상태로 죽음을 예감했다.

명백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윽..."

머리가 잘려나간 군마의 시체, 그 무거운 고깃덩이에 하반신이 깔린 그녀는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새어나온 피는 땅과 새싹을 적셨고 말의 중량은 다리를 짓눌렀다.

그랬기에 그녀는 엎어진 채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대검과 흉측한 철가면, 그리고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전사들보다도 큰 덩치.

"이런...젠장할..."

자신이 죽는다면 발할라의 명예로운 전당에 입성하게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어째서, 어째서 두렵단 말인가?

기병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원한 의문에 도저히 답할 수가 없었다.

평생 그 어떠한 짐승도 어떠한 전투도 두렵지 않았으나, 저 거인만은 심히 무서웠다.

저 자의 존재가 무서웠다.

말을 베어넘기고 피를 뒤집어쓴 채 걸어오는 저 거인의 존재가 무서웠다.

저 검의 정체가 두려웠다.

저 말도 안되는 길이의 검의 정체가 두려웠다.

저것을 과연 인간의 검이라 부를 수 있는가?

웬만한 사람의 키만큼 크고, 군마의 목조차 베어내는 검을?

아무리 그 위대한 오딘이나 토르라 할 지라도, 이 극심한 초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저 기괴한 칼날의 대검이, 자신의 영혼을 찢어발길 것만 같다는 근본없는 두려움이 그녀의 정신을 지배했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다.

저 검의 너머에 깃든, 알 수 없는 것이 불길한 감정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그러하였다.

죽어서도 온전히 죽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를.

"아, 아니야... 싫어!"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기병이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거인은 서서히 다가왔다.

그와 함께 기병의 정신도 서서히 무너져 갔다.

"오지 마, 가! 가란, 아윽, 말-"

거인은 거칠게 그녀의 투구를 벗겨 내어 저 멀리로 내던졌다.

첨벙 소리를 내며 흙탕물 속에 파묻힌 투구.

기병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하지만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후에 닥칠 일을, 저 물결치는 칼날에 의해 살해당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아, 안-!"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기병은 간절히 되뇌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대검의 검격이 두개골을 으깨었고,

-띠링!

상쾌한 알림음이 거인의 청각을 자극했다.

기병은 죽은 것이다.

***

-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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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피비린내 나는 거래》가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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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분산된 적을 상대할 때에는 축복이 의미가 없다.

한 명을 죽여야 발동하는데, 지속시간도 꼴랑 3초밖에 안 되니 축복을 얻는 의미가 없다.

그럼 이제 침착하게 판단을 해보자.

이 혼란해진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당장 지원을 가는 게 맞겠지만, 주위에 기병들이 너무 많다.

저것들을 빨리 썰어내지 않으면 지원을 가는 의미가 하나도 없다.

일단 기병을 노린다. 최대한 많은 기병을 견제한다.

그게 현 상황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다.

-다그닥,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 좌측.

쯔바이핸더를 재빨리 치켜올려 옥스를 취하고, 목표를 겨낭했다.

내 우측으로 달려온다. 타격지점은 다리.

오른편으로 거세게 튀어나가며, 몸 전체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려 검을 휘두른다.

옥스에서 뒤로 반 바퀴 돌려 행하는 낮은 쯔버크하우. 드리프트를 연상케 하는 움직임에 운동화 옆으로 진흙이 가득 튀었다.

순간적인 움직임에 기병은 당황했으리라.

이게 추측인 이유는 내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드드득!!

양 앞다리가 아작나자, 말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움직이다 요란하게 땅을 굴러 자신의 주인을 덮쳤다.

기병의 머리를 포함한 상반신은 시체에 깔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건 확실히 죽었다.

그렇기에 내가 뭔 말을 해도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해치웠나?"

부활 주문을 썼는데도 여전하다. 확실히 죽은 모양이지.

확실히, 첫번째와는 다르게 말을 써는 게 그리 어렵지가 않다. 아마 정신 상태의 변화 때문이겠지. 첫번째보다 확실히 부담감이 줄어들기는 했으니까.

-Urrrgaaah!!

누군가의 고함소리. 게르만의 전투함성이다.

내 집중을 어지럽히는, 특유의 저주받은 고함소리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겠지. 심히 짜증이 난다.

씨발련들.

"개병대 새끼들. 저걸 최대한 빨리 싸그리 족치든가 해야지."

다시금 내 목표를 되새긴다.

아군을 구하고, 본대와 함께 저들을 격퇴한다.

순간의 감정에 취해서 멋대로 튀어나가서는 안된다. 그 끝에는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성적으로, 지성을 이용해서 싸워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 다짐하며 쯔바이핸더를 강하게 붙잡는다.

그러고는 말발굽 소리를 향해, 또다른 군마를 향해 뛰어나간다.

***

"뭐, 뭐야? 그놈 어디로 갔어?!"

마르코반니의 족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아군의 지원을 바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게르만 기병대의 합류로 로마군의 대열을 깨트려 우위를 점한 상태였기에, 그리고 총지휘관으러서 전선 후방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딱히 필요하지가 않았다.

아군인 게르만 연합군이 로마의 기습대 상대로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한 상황.

"그 거인, 거인이 어디로 갔는지 본 사람 없나?"

그러나 족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저 숲 어딘가의 심연 속에서, 그 사악한 이교의 거인이 우리를 비웃으며 급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바퀴벌레가 사라졌을 때가 바퀴벌레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피범벅이 된 안면갑 안에 대체 무엇이 있을지, 그 붉은 섬광의 정체도 알지 못하는데 이제는 그 자의 위치조차 모른다.

어쩌면 그 자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냐, 집중하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심히 혼란스러웠으나, 족장은 어찌저찌 정신을 다잡았다.

잡념을 잊고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고자, 그녀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거인!! 거인은 어디 있나! 거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아까 전에 제가 봤습니다!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더군요, 분명 죽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휘하의 병사들 중 하나가 희망적인 내용의 보고를 전해 왔다.

"휴우..."

족장은 잠시 이 보고가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를 고려해봤으나,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이 불길한 예측이 딱히 사실과 가까워 보이진 않았다.

그 거인의 외형적 특징은 명확했다.

큰 키, 큰 검, 검은 누더기 망토와 소름끼치는 표정의 안면갑.

아무리 혼란스러운 전쟁터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잘못 보고 오정보를 전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최소한 족장은 그리 판단했다.

"어찌저찌 해치웠군, 다행이야."

사실 당연한 일이다.

기병대는 기본적으로 강하고, 보병과 협력하면 더욱 더 강해지는 법이니.

물론 기병이 죽인 건지 아니면 보병이 죽인 건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기병을 부르기도 전에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다.

그 거인이 게르만 연합군에게 입힌 피해는 막대했고, 로마의 본대가 오기 전에 승리를 거두고 매복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는 지원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직은 늦지 않았어.'

우려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지체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본대가 요새를 공략한 위치는 서쪽이고 얕은 골짜기의 위치는 동쪽이라는 걸 감안해도, 이쯤에서 슬슬 싸움을 끝내지 못하면 영 위험해진다.

저들을 최대한 빨리 격퇴해내고 로마군 본대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저 300명 가량 되는 기습부대가 쳐들어왔다는 건 본대도 대략적으로 우리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소리.

하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를 제거한 상황에서 쓸데없이 비관적으로 굴 필요는 없다. 최소한 마르코반니의 족장은 그리 생각했다.

'정 안된다면 북쪽으로 신속하게 후퇴하는 게...'

그리 비상사태에 대비해 나름의 전략을 짜고 있던 족장의 눈에 뭔가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어?"

전신을 가리는 검은 옷 위에 사슬 갑옷을 걸친, 정체모를 형체가 있었다.

그것, 새카만 누더기 망토를 휘날리는 그 형체는 말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물결치는 칼날의, 거대한 검을 휘두르면서.

저 너머에 거인의 형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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