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26화 (27/67)

EP.26 비처럼 내리는 고난(2)

기병.

사전적 의미로는 말 탄 병사를 뜻하고, 군사적 의미로는 2개의 생명체가 합쳐져 탄생한 전술 괴수들을 뜻하는 단어이다.

특히 로마군은 파르티야의 중장갑 기병, 카타프락토이들의 존재 덕에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게르만족 또한 로마군만큼은 아니어도, 부족 간의 잦은 내전을 통해 기병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궁지에 몰린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20기나 되는 기병을 끌어모아 최종병기로 사용한다는 비장의 전술을 세워놓았다.

왜 하필 20기였나 하면, 말 5마리는 일주일 전에 늙어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군에게는 1개 군단마다 120기의 기병대가 존재했기에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면 뭣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벌었다.

기병대가 요새를 향해 움직이기 전에 다리를 붕괴시킨다는 책략을 통해서.

주변의 나무가 거의 대부분 연약한 재질이라는 사실과,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요새까지 1주일은 더 걸리는 지형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시행했고 성공을 거둔 기발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병이 발생했다.

"뭐라? 300명의 로마군이 우리 병력을 압도하고 있다고?"

사실, 이 20기의 기병들은 전투에서 좀 더 늦은 시점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얕은 골짜기 안쪽으로 침투한 로마군은 동굴 속에 숨은 궁수들과 일반 병사들이 처리하고, 골짜기 바깥의 절벽 위를 탐색하는 로마군은 기병들이 처리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젠장할, 어쩔 수 없군."

콰디족의 족장 투르바레는 기병용 긴 한손검과 도끼, 그리고 라운드 쉴드를 장비하고 말 위에 올랐다.

그녀의 무장은 다른 기수들이 그렇듯 꽤나 두터웠는데, 사슬 갑옷 위에 늑대 가죽까지 둘러 나름 중장갑 기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제군들이여! 로마놈들을 쓸어버릴 준비를 해라! 우린 오늘 마르코반니와 콰디, 우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투르바레가 이끄는 게르만 연합군의 기병대는 전투를 고대하는 함성과 함께 숲 속을 달렸다.

그녀 휘하의 기수들이 기습의 피해를 만회하고 전황을 뒤엎을 수 있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리라.

***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농담이 아니고, 진지한 생각이다.

게르만 기병의 수는 대략 20기 정도. 더 많을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300명의 병력으로 20기의 기병을 상대하는 건 더럽게 어렵다는 것이다.

-연락병!! 본대에게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해라! 이대로 가면 우린 전멸한다!!

대대장은 후방에서 대기하던 연락병을 향해 외쳤다. 절박하기 그지없는 외침이었다.

사실 아직 기병의 힘은 그렇게까지 강력하진 않을 것이다.

2세기 유럽의 기병들은 아직 말에 갑옷을 씌우지도 않았고, 등자도 발명하지 못했으며 랜스차징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기병을 맞닥뜨린 자들 중에는 방패벽을 형성해 말을 삼지창으로 찌르려는 시도를 하는 레티아리우스들도 있었고, 실제로 성공한 자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지금 보니 투창에 기병이 맞아 죽는 사례도 꽤나 있었다.

저기 날라가는 창은 이페이아의 것일까? 제발 그러길 빈다.

동정을 떼간 상대가 1주일 만에 픽하고 뒤져버린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없을 테니까.

"다들 살아만 있어라 제발..."

그러나 이 모든 파훼법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병이 전장에서 보병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절대 보병이 기병을 압도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요소 때문이다.

기동성.

그 어떤 병과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의 기동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부류의 무기로 타격을 날리던, 물리법칙에 따라서 그 공격력은 보병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으로 증가한다.

만약 적당히 전장을 헤집으며 깔짝깔짝 위협만 한다고 쳐도, 그들은 이미 상당한 활약을 한 셈이 된다.

왜냐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기병대뿐만이 아니니까.

-대형을 버리지 말아라!! 등을 비우면 안된다, 진형을 유지하라!!

1800명의 게르만들 중 몇 명이 죽었는지, 또 몇 명이 저 너머의 얕은 골짜기로 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의 수는 우리보다 많다.

그리고 검투사 부대가 저들을 압도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원인은 효율의 극한을 뽑아내는 대형과 유기적인 병종 간의 연계 공격이었기에, 아군이 무너지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소리가 울려퍼지고, 저 멀리에선 중장갑의 크루펠라리우스들이 도끼로 작신작신 두들겨 맞아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이 판단은 후방의 수풀 속에서 전황을 관망하며 내린 판단이니, 이게 100% 옳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아마 내 생각은 옳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해서 판단하든 결론은 똑같다.

본대가 빨리 오지 않는다면 우린 전부 죽는다.

저 염병할 기병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내가, 저 기병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아니, 이, 이런 좆 같은 새끼들이…”

쯔바이핸더로 기병을 상대할 수가 있는가?

일단 내 방어구 상태는 꽤나 괜찮은 축에 속한다.

재빨리 벗어서 확인해본 결과, 등에 칼을 한 번 맞았음에도 사슬 중에 깨진 부위는 단 하나도 없다. 투구는 뒷통수 부분이 좀 일그러지긴 했지만, 전면부는 여전히 건재하다.

문헌에서 읽은 그대로다.

갑옷이 제 역할을 한다.

물론 난 갬비슨까지 껴 입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론으로 아는 것과 현실에서 체험하는 건 전혀 다른 소리다.

어쨌든 이렇게 중무장을 했는데, 한번쯤 말에 치일 각오를 하고 돌격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냐,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무의식 깊은 곳에서 거부 반응이 올라온다.

마치 내면의 누군가가 '이 미친새꺄 뒤지고 싶어 환장했냐'며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말에 치인다 해도 그렇게 큰 중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최소한 중세에는 말에 치이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근데 생각해보면 중세인의 2/3은 항생제도 없던 시대에 흑사병으로부터 살아남은 초인 새끼들이라는 걸 감안해보면, 걔네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게 또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씻팔. 어쩌지?"

심장박동이 가빠지고 손이 슬슬 떨리기 시작했다.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이 분명 옳은데.

어째서인지 내 몸은 이성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런 씨발, 본대는 언제 오는거야?!

-아무나 저 망할 기병놈들 좀 떨궈!!

도움을 부르짖는 아군의 목소리였다.

이 괴이한 남녀역전의 세상에 떨어져 축복을 때려맞은 탓에, 라틴어가 마치 모국어처럼 느껴진다.

한국어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지만, 어느새 라틴어는 한국어만큼 익숙한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간 함께 지낸 31명의 검투사들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그보다는 훨씬 오랜 시간 동안 나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저들의 절규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들 방패를 써라, 방패를 써!! 전열을 유지해라!!

카리스마가 가득 담긴 스파르타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테스티아의 목소리가.

분명 지금쯤 온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병의 공세에 맞서 버티고 있는 중이겠지. 분열되고 찢겨져 나가는 전열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면서, 맞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후방에서 빌빌거리는 동안에.

"...옘병."

그래.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테스티아는 일주일 전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다 내 안에 있을 것이라고.

그 말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일어선다.

양손으로 검을 굳세게 잡는다.

그러며, 기병의 예상 경로 앞으로 다가간다.

한손검으로 아군을 베며, 날 향해 달려오는 기병이 선명히 보였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희뿌연 안개도 내 시야를 가리진 못한다.

"...할 수 있다."

기병은 내 오른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오른손에 쥔 한손검으로 날 타격하기 위함이겠지.

저 공격이 얼마나 강할지, 그리고 얼마나 빠를지,

난 알지 못한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상관없다.

저 자는 날 제대로 맞출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

이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일주일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가진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가진 것을 잘 가다듬었을 뿐.

하나의 점, 하나의 사건. 이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

“후우우…”

왼쪽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머리 위로 검을 올려 높은 탁을 취한다.

정수리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려찍는 강한 검격, 샤이텔하우를 준비하며 상대를 주시한다.

와라, 기병이여.

전력을 다해 내게 와 보아라.

나는 기필코 살아남아 빛을 보리라.

"이-야-아아아아아아아!!"

한 자루의 쯔바이핸더를, 굳게 쥐고서,

비처럼 내리는 고난조차 베어버릴 것이니.

-콰드드득!

모든 과정이 느리게 보였다.

몸은 머리를 잃는다.

목에선 피가 쏟아져나온다.

기병의 검은 스스로 적의 손에서 빠져나온다.

균형이 사라진 탓이다.

이상현상에 놀란 기병은 다급히 고삐를 찾지만, 너무 늦었다.

고삐 따윈 없다.

관성이 담긴 시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내 앞을 스쳐지나간다.

-콰과과광!

머리 없는 말은 땅을 갈아엎으며, 피의 파도와 함께 기수를 덮쳤다.

쯔바이핸더.

군마조차 베어내는 대검이여.

참으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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