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 비처럼 내리는 고난(1)
뭐지?
대체 뭐지? 어째서 축복이 끊긴 거지?
"...설마."
아니다. 로마군일 리는 없다.
방패도 타원형의 파르마가 아닌 게르만의 라운드 쉴드다.
그리고 투구 너머로 삐져나온 금발과 빛 잃은 벽안은 저 여자가 분명한 게르만인임을 증명해주었다.
좀 어려 보이는 게 특이사항이긴 한데. 갓 스무 살이 된 듯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깡!
"이런, 시발...!"
어지럼증과 고통, 그리고 이명.
과거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다.
방호구를 쓴 채로, 검에 머리를 존나 세게 처맞았을 때.
균형감각이 일그러짐과 함께, 지면이 날 덮쳐왔다.
-깡! 깡! 깡!
게르만 놈이 내 머리를 뭔가로 후려패고 있다.
이대로,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이대로 쓰러져 있을 순 없어.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이아아아아아!!"
오른손으로 흙탕물 속에서 뒹굴던 쯔바이핸더의 리카소를, 왼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 상태로, 누운 채 옆으로 굴렀다. 그러며 검을 내려친다.
-캉!
힘이 부족해서인지 축복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검은 깨지지 않았다.
"이야아악!!"
찌르기를 시도하는 동시에, 무게중심의 변화를 이용해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공격도, 자세의 전환도.
찌르기는 빗나갔고, 난 일어나자마자 미끄러운 진흙 탓에 발을 헛디뎌 상대 위로 넘어졌다.
-AAAAAARGH!!!
쓰러진 여전사가 내 머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깡!
현기증의 정도가 심해지며, 이명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러다간 진짜 쓰러져 버릴지도 몰라.
반격.
반격을, 해야, 해.
양 손으로 검을 굳세게 잡는다.
“제발, 좀 꺼져!!”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밀쳐내며 내 밑으로 깔아뭉겠다.
-쾅! 쾅! 쾅!!
그러고는, 손잡이 밑에 달린 마늘 모양의 폼멜로 상대의 얼굴을 수차례 내려찍었다.
"이아아아아!! 아아아!! 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대며, 팔근육을 혹사시켜대며 얼굴을 찍어대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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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거래》발동, 해제까지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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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전사의 얼굴은 찢겨나가고 으스러져 있었다. 끝도 없이 얻어터진 끝에, 골격조차 무너져 내린 것이겠지.
“후, 시발, 살았다. 살았어.”
상황은 끝났다. 적군은 죽었어.
죽어서, 저 땅바닥에 힘없이 놓여 있는 거라고.
진정하자.
-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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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피비린내 나는 거래》가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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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은 하늘에 날렸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도통 쉽지가 않았다.
발은 젖은 땅 위에서 계속 헛돌았고, 팔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아 도통 짚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버둥친지 몇 분이나 되었을까.
의욕을 상실해 반쯤 포기하고 주저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괴한 형상의 세상은 술에 취한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굳어버린 핏덩이와 온 사방에 널린 살점, 절단된 대장에서 기어나오는 오물덩어리들.
흙탕물과 진흙에 범벅이 된 시신들과,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다리의 파편.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형상에서는 성별조차 구분할 수가 없었다. 조각나고, 찢겨나가고, 으스러진 존재들.
그리고 바로 그 위에서, 방패를 든 여전사들은 맹렬히 싸우며 더 많은 파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더 많은 시체, 더 많은 죽음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불행 중 다행으로, 이명은 점차 잦아들었다.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웅웅거리고 있긴 하지만.
"우욱..."
하지만 내 신체 상태는, 여전히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어지럽고, 호흡은 불안정하며, 때때로 비릿한 신맛이 목끝까지 올라온다.
산성은 신 맛을 띈다지. 위액이 역류하는 것일까.
게다가 전신이 아프다.
온 몸이 불타는 듯 했고, 조화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내가 모르는 사이 여기저기 베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타박상으로 인해 멍이 들어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우리 편이 이기고 있는 건가? 아니면 밀리고 있는 건가?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니, 전장의 상황도 뭣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지휘관 투구의 붉은 깃도, 화려한 방패의 문양도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체이고, 냄새는 악취밖에는 없었으니.
순간, 이 모든 게 멀게만 느껴졌다. 그저 비현실적인 꿈의 한순간과도 같았다.
어쩌면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내 안온한 집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야, 야!! 임마!!
뭐야 이건. 난 분명 자취하는데.
-글라폴레스!!
내 본명이 아니다.
내가 새로이 얻은 이름을, 누군가 엄청난 소리로 불러대고 있다.
"글라폴레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자궁과 그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해와 달. 검푸른 빛의 문신.
밝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칠흑과도 같이 새카만 머리칼.
이페이아다.
“왜 멍하니 주저앉아… 뭐야, 못 일어나겠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자연스레 그 주위의 검투사들 또한 보였다.
주변에 게르만이 없는 걸 보면, 아군이 잘 밀고 나가는 모양이다. 잘 된 일이다.
난 이페이아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며 질문에 답했다.
"머리를, 맞았어."
"왠지 멀리 나간다 했어 하여튼. 뒤로 가서 한숨 돌리고 잽싸게 복귀해."
나름 신경을 써주는 어투다. 역시, 내 예상대로다.
일상생활은 또라이같이 하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제대로다.
근데 언제 또 알몸으로 변한거지.
"그, 그래...”
하지만 내 몸 상태는 그런 시시콜콜한 사항을 물어볼 만큼 좋지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성대를 움직여 대답하는 사이, 이페이아는 저 멀리의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대었다.
“얌마, 코페시!! 글라폴레스 좀 후방으로 옮겨놔라!!”
-나 지금 이 씹련들 대가리 쪼개느라 바빠!!
저 멀리서 코페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잘 살아있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그래도, 검투사들 중에서는 나름 친한 사이였으니까.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으음, 나도 슬슬 쟤네들 꿰어놓으러 가야 하는데… 혼자 갈 수 있겠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전하자, 이페이아가 뛰어나가며 쾌활한 투로 답했다.
“그럼 잽싸게 따라붙어!”
창과 방패를 든 채 안개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켈트인을 보며, 난 서서히 뒷걸음쳐 방패벽 뒤로 숨었다.
"휴우우..."
작은 둔턱에 몸을 기댄다.
안면갑을 올려 호흡을 최대한 확보하고는, 몸 상태를 점검한다.
여전히 개판이다.
존나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숨도 쉬기가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갬비슨 내부가 아직 거의 젖지 않았다는 것 하나뿐이다. 안에 채워넣은 솜이 물을 머금어서 그런지 좀 무거워지긴 했지만.
갬비슨도 다 젖었으면 난 저체온증으로 뒤졌겠지.
아무튼 일단 숨을 좀 쉬자.
숨을 쉬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코로 들이마셔서 입으로 내쉰다.
그리고 이 행위를 대략 천 번쯤 반복한다.
그럼 숨을 쉴 수가 있다.
"휴우우... 씨발. 뒤질 것 같네."
산소가 들어가자 드디어 정신이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멀쩡해진 건 아니다.
그래도 내 앞쪽에서 아군들이 생각보다 잘 밀어붙이고 있으니 급하게 굴 것 까지는 없다.
정신과 신체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아니고 그냥 워리어스 다잉(Warrior's Dying)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PTSD인 건지 축복을 쓴 후유증인건지, 아니면 그냥 근육을 너무 빡세게 쓴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얻은 그 축복이 느닷없이 해제가 됐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모른 채 전투에 나섰다가는 크게 좆되거나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
원인을 밝혀 재발을 막아야만 한다.
"왜지?"
내가 죽인 게 여자이긴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남자고 여자고 싹다 죽였는데 축복은 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최소한 나는 민간인을 죽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그저 축복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 사라졌다는 소리인데, 그것도 말이 안되긴 매한가지다.
난 분명 그 여전사의 피를 내 검에 묻혔고,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근데 스며들지는 않았지."
그게 의미하는 바가 과연 뭘까.
저 자갈들은 방방 뛰고 있는 건 또 무엇을 의미하고?
…자갈이 방방 뛰고 있다고?
"아, 땅이 울리는 거였구나."
지표에 손을 대어보자 알 수 있었다.
땅이 울리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했다.
"뭐지, 지진? …중부 유럽 한복판에서?"
그때, 뭔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타격음. 땅을 때리는 소리.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이걸 어디서 들어봤더라.
뭔가, 말발굽 소리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씨발, 뭐?!"
설마.
아냐. 그럴 리가 없다.
이 야만인 새끼들이 설마 그걸 끌고 왔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기병이다!!
없어야 했는데.
-놈들이 기병을 끌고왔다!! 기병이다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