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 함정의 문턱에서(2)
"군단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구태여 더 말하지 말아라. 자네가 무슨 말을 할 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레기온을 이끌고 게르만의 요새에 입성한 부군단장은, 자신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요새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물론 투석기와 발리스타로 매서운 공격을 퍼부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웬만한 군대라면 그렇다.
그러나 게르만의 병사들은 '웬만한 군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용맹하다.
지금까지 로마군이 겪어온 맹렬한 전투의 기억들이 이 명제를 증명한다.
"부군단장, 이 요새를 샅샅이 뒤져라. 병력이 전부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 요새 내부 어딘가에서 매복하고 있을 것이다."
"예, 군단장님."
군단장의 말을 들은 부군단장은 요새로 침투한 레기온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자 잠시 혼란에 빠졌던 정규병들은 곧 제정신을 되찾고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군단장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래, 뭔가 이상하군."
저번 전투에서 후퇴한 게르만 병사 1800명 중 900명이 숲 속에서 사라졌다.
대개 이런 경우는 숲 속의 맹수에게 잡아먹히거나 길을 잃고 조난당해 비전투 손실이 일어났다 보는 것이 맞지만, 군단장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 사라진 900명이 아직 병사로서 기능하며 저 깊은 숲 어딘가에서 로마군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 말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익숙한 악취가 사방에 진동하는 듯 했다.
'뭐지?'
느닷없이 튀어나와 후각을 괴롭히는 냄새에, 군단장은 재빨리 자신의 기억 속을 뒤졌다.
그렇다. 숲 속이었다.
어린 시절, 갈리아의 숲에서 지낼 때 비 오기 전과 후에 자주 났던 냄새.
그것이 현 상황에서 의미하는 바는 매우 자명했으나, 동시에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눈이 휘둥그레진 군단장이 순간 혼란에 휩싸였을 때,
"군단장님! 검투사 대대가 서신을 보냈습니다!"
왼팔에 전서구를 얹은 연락병이 그녀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군단장은 답했다.
"뭐라 쓰여있지?"
연락병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양피지를 펼쳤다. 혹시 모를 손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 적들의 행태가 괴이하여 요새를 버리고 북동쪽의 '얕은 골짜기'에서 매복해 본대를 덮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판단, 본 대대 300명이서 적들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어라?"
눈을 대여섯 번쯤 깜빡인 연락병은 눈을 부릅뜨고는 찬찬히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서신의 내용은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어, 그, 그게... 대대의 총 인원인 300명이 게르만들이 매복 준비를 마치기 전에 공격해 발목을 잡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본대를 보내달랍니다. 이미 얕은 골짜기를 향해 떠났다고 합니다."
연락병은 분명 읽은 내용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300명이 900명에게 덤비겠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런 자살 행위에 가까운 짓거리를 본대의 허락도 맡지 않고 진행했다. 이미 결정은 내려졌으니 그에 응하라는 반강제적인 내용.
고작 대대장이 군단장에게 전하는 서신이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양피지를 다시 둘둘 말아놓은 연락병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군단장님. 실례지만 한 가지 말씀만 전해도 되겠습니까?"
군단장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300명이 900명에게 덤빈다는 것도 그렇고, 상부에 작전 허가도 안 받고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저 검투사 대대가 좀...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군단장의 대답을 기다리며 연락병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군단의 총 지휘관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군단장의 대답을 강제하기로 했다.
"작전을 취소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300명이서 900명과 싸운다니, 이건 승산이-"
"아니."
"...예?"
연락병은 되물었고, 군단장은 함축된 의미를 풀어 다시 답했다.
"900명이 아니다. 1800명이지."
"천, 천 팔백..."
1:3도 아니고 1:6의 싸움을 하겠다니, 이건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짓이다.
헌데 어째서인지 군단장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안심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답신을 보내라. 요새를 수색하는데로 바로 지원을 갈 테니, 적을 얕은 골짜기에 묶어 놓으라고."
"예?!"
연락병은 충격에 휩싸인 채 외쳤다.
눈앞의 군단장이 평소 비합리성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는 인물이었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되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요새를 다 지어놓고서 그걸 버리고 다른 곳에서 싸운다니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에 연락병은 합리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비록 그녀와 군단장의 계급 차이가 이런 대담한 행동을 원칙적으로 차단하고 있긴 했으나, 그런 것을 따지기엔 상황이 너무 충격이었다.
군단장은 연락병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저 목책의 단면을 봐라."
투석기로 발사된 돌을 맞아 단면이 드러난 목책.
그 안은 새카맣게 썩어 특유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정신이 멍해진 연락병을 향해 군단장이 말을 이었다.
"눈속임이다. 저건 제대로 된 요새를 지을 수가 있는 나무가 아니지. 이곳은 저들이 우리를 기만하고 유인하기 위해 만든 속임수에 불과하다."
갈리아에서 나고 자라 로마의 군단장까지 된 그녀는, 나무에 관한 것이라면 원로원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지식이 해박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썩은 나무 특유의 악취를 맡고 미리 게르만들의 술책을 파악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짓 요새를 세워 적을 방심시키고 함정으로 유인한다니,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어이없는 전술을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려 들겠는가.
군단장은 다시금, 게르만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체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300명이서 1800명을 상대하는 건 말도 안됩니다. 저희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죽을 겁니다!"
"그래,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이성적으론 이해가 가지만 도저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연락병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일단 정찰병이라도-"
"아니, 정찰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 그때쯤이면 저들은 이미 거의 다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이에 연락병은 새로운 방책을 제안했는데,
"최소한 숲에 불이라도 질러서 확인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콰광, 콰르르 쾅!!
안타깝게도 그 이용가치는 제시되자마자 상실되었다.
저 멀리에서 천둥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어둑어둑한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한 것을 보아, 곧 비가 올 것은 매우 자명해 보았다.
히스파니아의 농가에서 자란 연락병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절망하여 되뇌였다.
"...정말이지 되는 게 없군요."
"그게 바로 게르마니아의 매력이지. 더 이상 말싸움 할 시간은 없다. 최대한 빨리 답신을 전하도록."
연락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서 깃펜과 잉크를 꺼내 양피지의 뒷면에 답신을 속기하기 시작했다.
군단장은 전서구가 날아오를 때까지 한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비둘기가 날아오르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그녀는 나지막히 기도했다.
"군신 마르스님의 가호가 따르길."
비 한 방울이 군단장의 이마에 떨어졌다.
그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큰 소리로 휘하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요새 안에 숨어있는 병력이 없는지, 최대한 빨리, 샅샅이 수색해라! 300명의 검투사 대대가 적들의 발을 묶으러 갔다!
신의 가호가 300명의 검투사들에게 깃들길,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길 간절히 빌며,
로마의 군단장은 외쳤다.
"우리가 제 시간 안에 지원을 가지 않는다면 저들은 죽을 것이다! 서둘러라!"
***
비가 온다.
"대대장님, 본대에서 답신을 보냈습니다. 지원을 약속한다더군요."
빗방울이 온 사방에 떨어져 흙과 나무와 금속, 그리고 갬비슨을 적신다.
갬비슨이 젖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두께가 꽤 되어서인지 아직은 물기가 안쪽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안면갑을 쓴 덕택에 눈으로 빗물이 침투하는 일도 거의 없고. 역시 내가 투구를 참 잘 골랐다.
대대장이 입을 열었다.
"좋다. 이제 우린 해야할 일을 하면 되겠지."
빗방울과 수풀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게르만 전사들이 보인다.
원형 방패에, 도끼나 검을 들고 동물 가죽을 걸치거나 사슬 갑옷을 입은 자들. 예상과 대충 모습이 비슷하다.
저들은 곧 우리가 '해야할 일'의 희생양이 되겠지. 우리가 1800명이고 쟤네가 300명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 근방의 지형은 상당히 위험하다. 골짜기의 깊이는 사람 키 정도로 얕고 넓지만, 절벽의 각도가 가팔라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골짜기 위에서 싸우도록."
대대장은 비를 맞으며 명령을 내렸다.
이제 무광처리용으로 바른 재들도 슬슬 쓸려내려 가겠지. 그렇게 되면 저들도 우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린 그 전에 공격해야만 하고.
"...제군들."
대대장의 목소리는 강인했고, 299명의 눈빛은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나까지 포함하면 300명의 비장한 눈빛이 빗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휴."
내가 숨을 내쉬고 크게 들이마신 그 순간에,
대대장은 말을 이었다.
"저 야만인들을 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