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함정의 문턱에서(1)
"뭐라? 함정?"
대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상당한 양의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근데 솔직히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함정이라니, 이게 뭔 미친 소리야? 아직 적은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거 아니었나?
테스티아 또한 자신의 주장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길 보십시오. 게르만들이 다 도망쳐서 요새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제대로 된 공성전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대략 3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수풀 너머의 광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 5초 정도가 지나고, 대대장이 답했다.
"그래. 다들 빠져나가고 있군. 갓 성문이 뚫린 상황에서 나오는 반응이라기엔 영 이상한 것도 맞지. 하지만 저들이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닙니다. 저들은 결코 쉽게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장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테스티아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완강해진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들의 신은 오로지 전사를 키워내는 것에만 몰두하기에, 게르만의 군사들은 군공과 경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장에서 죽으면 무조건 엘리시온과 비슷한 낙원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전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저들의 저항이 거세었던 것은, 게르만의 믿음이 그것을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지.
테스티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서 생각이 났다.
스칸다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온 게르만 민족들, 그들 또한 북유럽 신화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전투에서 죽으면 에인헤라리가 되어 발할라로 가고, 마침내 라그나로크가 오면 오딘의 곁에서 신들과 함께 싸울 것이라고 저들은 믿었다.
그러니 어째서 게르만의 전사들이 전투에서 도망치겠는가?
전장에서 칼 맞아 죽으면 발할라에 가서 영원한 쾌락을 누릴 수가 있는데!
하다못해 늙어 죽을 때에도 발할라에 가고 싶다며 지 자식들에게 목을 쳐달라 부탁하던 괴이한 풍습을 가진 자들이 바로 게르만 민족이다.
그런데 이런 전사들이 기껏 세워놓은 요새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니.
확실히, 의구심이 든다. 그것도 꽤나 많이.
하지만 대대장의 표정은 여전히 반신반의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음... 제 3타격대장, 그 정보는 어디서 알아낸 것이지?"
"일주일 전, 게르만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알아냈습니다. 세 명의 간첩을 심문했는데 전부 공통되게 전장에서 죽기를 희망하더군요."
대대장은 테스티아가 말한 정보의 출처를 듣고 나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만일 테스티아가 게르만족의 신념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낚일 뻔 했다.
로마인들 중에 게르만의 신 몇 명을 같이 믿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정신나간 사후세계관마저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좋다, 자네 말대로 놈들이 우릴 유인해 함정에 빠뜨릴려 한다고 치지. 그럼 대응은 어찌 할텐가?"
대대장의 질문에 테스티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들은 레기온을 방심시켜 미리 병력을 잠복시켜놓은 곳으로 유인, 일제히 덮쳐 큰 피해를 주려는 계획을 세워놨을 겁니다. 아마 궁수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고, 저들은 좁은 길목이나 얕은 골짜기 쪽으로 우릴 끌고 가려 들겠죠."
"...아마 그렇겠지. 근데 자네에게 물은 것은 놈들의 계략에 대한 대안책이었는데 말이야."
"저들은 저희 300명의 존재를 모릅니다. 그러니 저들이 후퇴하여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하고, 준비를 마치기 전에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약간의 침묵이 지속되었다.
대대장의 입가는 약간 어색하게 일그러졌는데, 그녀의 안에서는 분노와 어이없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했다.
미약하게 격양된 어조로 대대장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뭐지? 놈들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주의를 잡아끈 채 레기온이 요새의 수색을 마치고 지원 오길 기다리겠다? 우리가 미끼가 된 사이에 본대가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정확한 분석입니다, 대대장님."
테스티아는 언제나처럼 딱딱하지만 확신에 찬 어투로 대답했다.
개인의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그 특유의 어법은, 마치 군사적 사고를 위해 탄생한 사이버펑크의 인조인간이 내뱉는 무미건조한 계산식과도 같았다.
스파르타인들은 다 저런가?
진정 저 건조한 어법이 스파르타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저들은 태생과 교육을 통해 본래 감정의 변동이 적도록 설계된 괴물같은 존재들인 걸까.
아니면 그저 감정을 숨기고 공동체의 부품으로써 기능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걸까.
테스티아를 만난 지 고작 1주일 밖에 안된 나로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하기엔 영 쓸데없는 생각이기도 하고.
"하아..."
대대장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찰병들은 저 요새 안에 900명가량의 병력이 있다고 했었지. 만약 저 병력이 자네 말대로 고작 유인책에 불과하다면, 최소 900명의 지원 병력이 숲 속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테고."
900명에 900명을 더하면 1800명이 된다.
그리고 1800명이라는 인원은, 30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6개가 있어야 탄생하는 꽤나 큰 집단이기도 하다.
1:6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싸움이다. 1에 해당한다는 집단이 공격자의 입장인 경우라면 더더욱.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테스티아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록 1:6의 병력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저희 군사는 무장도 잘 되어있고 개개인의 훈련 수준도 우수하니-"
그때, 대대장이 말을 끊었다.
"자네, 스파르타에서 왔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대답하는 테스티아. 격정에 찬 대대장의 말투는 그녀의 것과 꽤나 큰 대비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인으로서 대답해보게. 자네는 여기에 레오니다스 1세에 비견될 만한 맹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단 300명의 병력만 가지고도 전략적 승리를 이끌 수 있는 영웅이 이 숲, 이 대대에 있다고?"
스파르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말도 안되는 방법을 밀어붙이는 것이지, 타격대장? 본대와 요새에서 합류해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가?"
대대장의 말도 나름 일리는 있었다.
본대와 우리 300명을 합치면 대략 2500명 정도의 병력이 되니, 전면전에서 패배 가능성은 확 낮아진다.
하지만 문제는 2500명이 모일 경우, 우린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스티아는 목에 힘을 주어, 단어 하나하나의 발음을 분명히 하며 답했다.
"그리하면 저희는 비합리적으로 죽게 될 겁니다. 매복이 있으리라는 걸 추측할 수야 있겠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을 테죠. 하지만 저희 300명의 대대가 먼저 저들을 치고, 저희 뒤에 위협이 없다는 걸 확인한 본대가 지원을 와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잠시 말을 흐린 테스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만일 죽더라도, 결코 헛되게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2500명이서 게릴라에 대항해 승산을 모르는 싸움을 할 것이냐, 아니면 300명이서 전면전에 나서 목숨을 희생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 것이냐.
딜레마.
확률적 딜레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2500명에 묻혀서 안전하게 가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살아남는 게 보장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단순히 수를 믿고 간다는 생각을 정당화하기엔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반례들이 너무나 많다. 한민족 선조들이 너무 언더독을 잘했다고. 가장 극단적인 예로는 살수대첩이 있겠지.
즉, 함부로 병력의 수와 승리 가능성을 등치시킬 수 없다는 소리.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검투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언제나 제 3의 길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오는 법이다.
"대대장님, 제 3타격대장의 주장은 애초에 말도 안됩니다. 고작 미끼로 쓰겠답시고 그 많은 나무들을 베어다 목책을 만들고, 요새를 만든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모든 병사가 신앙에 따라 움직이진 않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요새로 침입해 레기온과 함께 놈들을 치는 게 맞는 작전입니다."
제 4타격대장이 대대장에게 그리 말함으로써, 대대장이 택할 수 있는 선지는 3개로 분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검투사들이 웅성대고 군기가 흐트러지는 것은, 어찌 보면 꽤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대장이 좋아할 리가 없겠지.
"...그만, 그만!"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대대장은 그리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단순히 분노만이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혼란과 고뇌도 내적 갈등의 폭발 직전의 상태에 크게 일조하고 있었다.
나름 철학적 딜레마에 대해 익숙함이 있는 21세기 사람인 나도 이 지경인데, 대대장은 오죽할까.
이건 단순히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같은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이건 300명, 더 나아가 2500명의 목숨과 전쟁의 승패가 걸린 문제다.
그러니 그 책임 또한 무거울 수밖에.
"연락병!"
"예, 대대장님."
대대장은 마침내 눈을 뜨고 분연히 명령했다.
"전서구의 상태를 확인하라. 본대에 서신을 보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