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전쟁을 준비하는 자세(3)
"드디어 끝나는군요."
게르만의 요새 앞에서, 부군단장(Tribunus Laticlavius)가 중얼거렸다.
"아직은 아니지."
군단장(Legatus Legionis)는 차가운 어투로 답변을 내놓았다.
이에 약간 심사가 뒤틀린 부군단장은, 말투에 약간의 반발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거진 승패가 결정난 전투 아닙니까. 저들은 하찮은 나무 성벽 뒤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구걸할 겁니다."
"그리 될 것이다.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부군단장은 열정이 넘쳤으나 군단장의 태도는 여전히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군단의 총지휘관은 어떠한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저들을 얕보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저건 쥐도 아니고 거의 지렁이 수준인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군단장은 불평을 중얼였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단장의 감각은 그녀의 미약한 목소리조차 잡아냈다.
"저번 전투에서 도주한 게르만의 수는 대략 1800명쯤 된다. 근데 흥미롭게도, 저 요새에는 900명쯤 되는 병력들밖에 없지."
"설마 요새 바깥에서 900명의 병력이 매복을 노리고 있다는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죠?"
"그렇지 않을 이유도 없잖은가?"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들어간 군단장의 질문에, 부군단장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답했다.
"저들의 우두머리가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둘로 나눌 만큼 멍청하진 않아 보이는데 말이죠."
"무엇을 보고 그리 생각했지?"
"소규모 기습전을 계속해 주의를 끈 사이 다리를 끊어서 저희 병력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재빨리 요새로 숨는다는 전략을 세운 자가 그리 낭만적으로 나올 리가 없잖습니까."
군단장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흡족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녀는 뒤로 돌아 투석기들을 바라보았다.
투석기를 가져오는 대가로 가져오지 못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애석했다.
"말도 분해해서 다리 너머로 가져온 다음 조립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병력 절반밖에 못 데리고 왔는데 다시 무너질 줄이야."
"걱정 마십시오. 우리 군사의 병력은 저들보다 많고, 병사 개개인의 질 또한 저들보다 우월합니다."
부군단장의 말투에서는, 다른 모든 로마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에 대한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왔다.
군단장의 경우에도, 레기온을 구성하는 정규병들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이번 전투에 투입되는 보조병들의 능력이었다.
"부군단장, 자네는 저 검투사들이 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지금까지의 전공이 그들의 용맹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와서 영광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리라곤 상상하기 어렵죠."
부군단장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군단장의 마음 속에는 약간의 불신이 남아 있었다.
그 불신이 정규군 훈련도 못 받은 자들이 정규군 만큼 잘 싸울 리가 없다는 자존심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동물적 직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작전을 너무 급하게 시행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무르기엔 너무 늦은 것 같지만."
부군단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무 늦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격 명령을 하달하신 분은 루킬라 폐하 본인이시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 재정 상태가 위태롭다 하시더군. 원로원에서도 그런 얘기가 간간히 나오고 있고."
군단장은 담담히 말하는 듯 했지만, 그 안에는 원로원에 대한 미묘한 개탄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 또한 원로원의 일원이었기에, 이는 따지고 보면 약간의 자기비하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었다.
부군장은 짙은 게르마니아의 안개처럼 눅눅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던졌다.
"마르키아 아우렐리아께서 지휘하셨다면, 다른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예?"
문장에 포함된 속뜻을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부군단장의 정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랬기에 군단장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병이 더 악화되셨다는 소문이 있네. 루킬라께서 공동 황제가 아니게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의원들의 입에서 나돌고 있지."
침묵이 깔리고, 엄숙함의 기류가 그들을 감쌌다.
철인황제께서 위독하시다니. 그리고 곧 있으면 다시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니.
평생을 업무와 병에 시달리던 덕 있는 황제가 전쟁의 끝을 보지도 못한 채, 최전선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건 매우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부군단장은 이 예정된 사건의 비극성을 나름이나마 줄여보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저희가 그분께 승리를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겠군요. 영영 엘리시움으로 떠나시기 전에 말입니다."
우울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투지가 불타올랐다.
철인황제를 병들게 하고, 그를 쉬지 못하게 한 존재들에 대한 강한 증오가 그녀의 정신을 휩쓸었다.
로마를 위해,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오현제의 일원을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리라.
부군단장의 불타는 눈을 본 푸른 눈의 군단장은 화답했다. 말과 눈빛으로써.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 투석기가 제 역할을 다해야만 하겠지."
말을 마친 군단장은 안개가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현실 감각을 잃고 낭만의 세계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현실적 문제에 집중해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어둑어둑한 날이라면 검투사 대대가 불화살을 보지 못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아진다.
따라서, 날이 개이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리라.
군단장은 나지막히 명령을 내렸다.
"장비에 이상이 없다면, 공격을 시작하도록."
***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과 떨어진 영국의 시내에서는 아이들이 참호전을 하고 놀았다고 한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어릴 적에도 비슷했다.
눈이 많이 오면 눈과 나뭇가지 같은 걸로 참호 같은 걸 만들어놓고, 하교하는 중학생들에게 눈덩이를 던지며 낄낄대는 것이다.
물론 그딴 멍청한 짓을 한 시기는 당연하게도 철없던 초등학생 애새끼 시절이었기에 그 큼직한 중학생들이 대충 큰 소리 치면 잔뜩 쫄아서 튀는 걸로 놀이가 마무리 되곤 했지.
아, 그 시절엔 눈이 참 좋았는데. 전역하고 나선 한동안 눈이 천지신명이 싸지르는 염병할 똥덩어리로밖에 안 보이더라.
이런 좆같은 굳건이 새끼 같으니라고, 마마이트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새끼.
내 유년 시절의 동심은 그 좆 같은 개새끼 때문에 영원히 사라지고야 만 것이다.
그 씨발새끼가 날 납치하지만 않았으면 난 지금 대졸이었겠지, 망할. 난 아직도 복학 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제 휴학이 되겠지만. 아무튼 내가 갑자기 이딴 소리를 왜 했냐 하면,
-대체 불화살은 언제쯤 쏘는 거야?
-나 엉덩이가 배기는 것 같아.
-어떤 새끼가 내 발 밟았냐.
지금이 딱 그 꼴이기 때문이다.
299명의 검투사들과 1명의 21세기 사람, 1명의 대대장과 전서구를 든 3명의 연락병이 수풀 속에서 엎드려 있다.
금속이란 금속엔 죄다 재를 발라서 무광처리를 한 채로, 시꺼먼 망토를 뒤집어 쓰고서 말이다. 냄새가 참 향기롭다.
그나저나 저 비둘기들은 좀 똑똑해 보인다. 그 멍청한 닭둘기들처럼 병신같아 보이지 않는게, 뭔가 믿음직스럽다. 일을 제대로 해주면 좋겠는데.
어쨌든 난 이 303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규칙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아까 전에 코페시가 말한 그 규칙 말이다.
살인에 대한 꺼리낌에 대한 해답. 난 그것을 찾고자 한다.
일단 논리적으로 내가 이 상황에서 살인을 꺼리는 건 어떠한 선도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내가 게르만을 죽이지 않는다면, 게르만이 나와 로마군을 죽일 테니까.
그리고 로마의 국경지대를 약탈해 선공을 시작한 것은 게르만이기에, 로마군은 방어자의 의무에 따라 상대를 제거할 권한이 있다.
따라서 로마군을 살리는 게 게르만을 살리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고로 내가 로마에 부역하는 것은 정의로우며 로마를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도 정의로운 행위다.
이때, 남자든 여자든 전사로 싸우는 이상 전쟁에서의 역할은 같으므로 그에 대한 처우도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난 눈에 보이는 게르만을 어떠한 자비도 없이 모조리 죽일 것이다.
모든 게르만 전사들을.
물론 항복을 하거나 PTSD에 시달리는 불쌍한 병사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난 지혜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저들을 상황에 무관계하게 전부 죽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전쟁에 나온 게르만들 중 만약 어린 소녀가 있다고 해도, 난 그 소녀를 죽이는 것이 옳다.
난 이 세상에서 그 소녀가 가지는 무력이나 강력함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그녀가 끼칠 피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잔다르크마냥 강대한 소녀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여긴 남녀역전 세계이지 않는가.
내가 이 짓을 했다가 PTSD를 겪고 환각을 보거나 수전증에 걸릴 가능성도 있겠지.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죽으면 PTSD조차 못 겪는다.
따라서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일체의 도덕을 버린다.
현대인의 도덕 관념은 잠시 내팽겨치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상대를 더 쉽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 지 고민하는 것에 모든 정신을 쏟자.
그게 옳은 일이다.
"그럼 내가 마주칠 수 있는 가장 빡센 상황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자."
지금은 2세기지만 쯔바이핸더의 칼날로 가하는 타격을 무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질 좋은 철로 프레임을 두른 방패를 사용하거나, 사슬 갑옷 위에 곰 가죽을 덧입고 싸우거나.
고작 곰 가죽이 뭐냐 싶을 수도 있지만, 곰은 숲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기본적으로 질긴 가죽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당연한 소리다. 그걸 잘 말려서 굳히기까지 하면, 꽤나 제대로 된 갑옷으로도 가공할 수가 있을 테고 말이지.
하지만 투구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투구를 베어낼 수는 없겠지만, 깨버리거나 우그러지게 만들 수는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다. 완전히 충격력을 0으로 감쇄시키지 못하는 이상, 죽이진 못하더라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긴 충분한 것이다.
방어구를 쓴 상태여도,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정신이 띵해지니까. 내가 맞아봐서 잘 안다.
그렇다면 공격은 이쯤하면 되었고, 방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내가 입은 갬비슨+사슬 갑옷 조합을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도검이나 화살은 최소한 내 상체를 뚫고 들어오진 못할 것이다. 내 눈앞에서 활을 쏴버린다면야 화살이 관통이야 하겠지만, 애초에 궁병이 초근접을 하게 용인한다는 건 그냥 자살을 하겠다는 소리다. 구태여 고려할 필요는 없겠지.
약점은 팔과 다리, 그리고 눈구멍.
여기서 눈구멍은 진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앞이 보이긴 해야할 것 아니냐고.
만약 어느 미친 인간이 이 눈구멍 사이로 화살을 쏴서 맞춘다? 그러면 난 존나 불평없이 죽을 자신이 있다.
왜냐하면 화살을 맞는 즉시 뇌가 블랙아웃 되면서 즉사하게 될 테니까. 시체는 불평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적진에 아폴론이 산다는 기괴한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좀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지.
팔이나 다리를 노리는 경우라면 어떨까.
적이 다리를 노린다면, 적은 정강이받이와 갬비슨 사이의 조그마한 틈에 공격을 우겨넣어야만 한다. 그것도 꽤나 강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이건 곧 상대의 하단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되기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
난 어느 미친년이 내 다리를 썰겠답시고 달려오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니까. 내 다리를 잘라가려면 먼저 대갈통에 사람 키만한 칼을 맞고서 살아남아야 할 거다.
팔을 노린다면 시야각 측면에서야 적이 이득을 볼 수가 있겠지. 하지만 이 경우엔 전혀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내 어깨에 두르고 있는 망토가 무기를 휘감아, 제대로 된 타격을 어렵게 할 것이다.
이리 된다면 베기 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 날을 그리 날카롭게 갈아놓지는 않는 시대 특성상, 갬비슨을 잘라내서 내 살가죽을 베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이 모든 발악 같은 준비를 싸그리 무시하고, 그냥 적 먼 거리에서 투창을 던져버리면 그 결과는 말 그대로 신에게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건 감도 안 잡히니까.
쟤네들이 쓰는 창이 가벼운 편에 속하길 비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빗나가기를 비는 거랑.
씨발, 난 창이 싫다.
어쨌든 종합해보면, 내가 1대1 상황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의 대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투창과 도끼와 방패를 들고, 사슬갑옷 위에 짐승 가죽을 덧입은, 뛰어난 기술의 베테랑 전사.
"...씨바, 이걸 어떻게 이기지?"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사정거리 안으로 붙어서 '그 기술'을 쓰면 된다.
근데 이걸 쓰면 검을 다루기 너무 힘들어질 뿐더러, 공속도 느려지고 빗나갔을 때 리스크도 커지며 체력 소모도 심해져서 최대한 안 쓰고 싶다.
무엇보다 기술 사용의 결과물이 너무 잔인하다. 기술명 자체가 그걸 암시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쯔바이핸더로는 그 기술을 쓰는 게 아니다. 그런 건 교본에도 적혀있지가 않다고. 위험한 짓거리다.
그리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전원 대기! 대기하라! 공격 신호다!"
대대장의 명령이 들렸다. 불화살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아, 이건 못 참지.
불화살이 쏟아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자, 비처럼 내리는 빛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안에 있는 게르만은 얼마나 쫄릴까. 사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이 아닐까?
"내 명령에 따라,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하나, 둘-"
재빨리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근육이 수축되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쯔바이핸더를 강하게 잡는다. 절대 미끄러지지 않도록.
"세-"
"잠깐만, 멈추십시오!!"
뭐, 뭐야.
느닷없이 테스티아가 대대장의 말을 끊었다.
"제 3타격대장, 지금 뭐하는-"
대대장의 표정은 ‘어이를 잃었다’는 표현의 전형과도 같았다.
그러나 테스티아의 이어진 말을 듣자,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건 함정입니다! 게르만들이 함정을 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