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19화 (20/67)

EP.19 전쟁을 준비하는 자세(2)

도열한 군사를 실물로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1세기 군대보다 통일성도 떨어지고 신장도 더 작다는 걸, 이성으로 알며 감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그 원인은 아마 병사들의 투지가 아닐까 싶다.

게르마니아 전선의 모든 검투사들이 대열을 갖춘 그 모습은 실로 비장했으며, 이는 주변의 공기마저 무겁게 만드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선, 단상 위 대대장(Prefectus Cohortis)의 카리스마 또한 대단했다.

이 대대를 구성하는 절대적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민권이 없는 자유민, 속주민 출신 검투사들인 것과는 달리 그녀는 명백한 로마 시민 출신이다.

여기서 유일한 로마인이라는 사실에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대대장의 목소리에는 실로 힘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각 타격대의 장들은 병력의 수를 보고하라!"

허스키하면서도 위엄찬 소리다. 테스티아에게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용맹한 느낌.

비유하자면 의인화된 전쟁이 내지르는 함성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지.

한편, 테스티아를 포함한 6명의 타격대장들은 4열 종대로 늘어선 각 타격대의 장병들을 1열씩 앉히며 수를 세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온갖 다양한 모습을 한 검투사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먼저 양 끝에 선 2개의 타격대는 전원이 중무장을 한, '크루펠라리우스'들로 이루어졌다. 발음이 좀 개성적이긴 하지만, 코페시가 잘못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이 발음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큰 숨구멍이 많이 뚫린 큰 투구와 로리카 세그멘타타, 철제 정강이받이와 팔보호대를 입었고 글라디우스와 작은 정사각형꼴의 방패를 무기로써 패용했다.

철제 방어구로 온몸을 감싼 둔중한 모습은 판타지 소설 속의 골렘을 연상케 했다.

그들의 앞에서는, 장병들과 비슷한 무장을 했지만 투구 위에 초승달처럼 펼쳐진 붉은 깃털을 붙여 지위를 나타낸 타격대장(Optio)들이 대대장에게 병력의 수를 보고하고 있었다.

-제 1타격대, 병력 57명!

-제 6타격대, 병력 65명!

제 2타격대와 제 5타격대는 방패를 쓰지 않고 쌍검을 쓰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양쪽 허리춤에 곡도인 팔크스와 롬파이아를 패용한 '디마카에리'와, 왼손에 갈고리를 끼고 스파타를 사용하는 '시소르'들이었다.

그들이 쓴 얼굴을 가린 투구는 얼핏 보면 레기온의 것과 비슷했고, 방어구로는 사슬갑옷인 로리카 하마타를 입고 있었다.

각 타격대장들의 무장도 대략 장병들의 것과 비슷했다.

제 2타격대의 대장은 붉은 깃털이 달린 레기온식 투구와 2개의 팔크스를 패용했고, 제 4타격대의 대장은 평균의 2배쯤 되는 길이의 갈고리를 꼈다.

-제 2타격대, 병력 56명!

-제 5타격대, 병력 41명!

마지막으로, 내가 속한 부대인 제 3타격대와 제 4타격대다.

삼지창을 들고 단검을 찬 '레티아리우스', 글라디우스와 방패를 쓰는 물고기 투구의 '무르밀로', 쇳조각을 박아넣은 채찍과 곤봉를 들고 방패를 왼팔에 묶어놓은 '파에그나아리', 그리고 그 외 방패를 든 자들과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든 자들이 이 부대에 속했다.

레티아리우스들은 방패를 들거나 그물을 들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그물을 든 자들은 왼쪽 어깨에 가죽으로 된 보호대를 착용했다.

흉갑은 거의 로리카 하마타로 통일되어 있었고, 무스밀로를 제외한 나머지 병종들은 대개 레기온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무스밀로는 그 특유의 물고기 눈을 닮은 철제 투구를, 나는 안면갑이 달린 중동식 투구를 썼고, 이페이아는 타원형 방패와 창만 들었을 뿐 그 어떤 갑옷도 입지 않았다.

제 4타격대의 타격대장은 타원형의 파르마 방패와 오지창을 들고 테스티아의 것과 비슷한 그리스식 투구를 썼다. 가죽을 덧씌우지 않아 투구가 은빛인 것이 차이점이었다.

-제 3타격대, 병력 32명!

-제 4타격대, 병력 49명!

공터에 여섯 여자들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소리가 마침내 잠잠해질 즈음에 대대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로마의 군사들이여!"

대대장의 부름에, 검투사들은 오른손을 쭉 뻗었다 왼쪽 가슴에 갖다대는 로마식 경례로 화답했다.

대대장이 말을 이었다.

"전쟁의 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게르만들이 로마의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해왔고, 문명의 파괴자들은 시체가 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넓은 공터에 그녀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마이크는 커녕 확성기도 없는데 말이다.

원래 로마의 장교가 되면 다들 발성법 교육이라도 받는 것일까?

하긴, 전쟁터에선 크게 말하지 않으면 뭐라 하는지 알 수도 없겠구나.

"이제 저들은 궁지에 몰려, 좁고 음침한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목책으로 만든 원시적인 요새를 지어놓고는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굳게 믿고 있지."

대대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허나 저들의 믿음은 틀렸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울려퍼진 고성은 천둥과도 같은 힘으로 내 정신에 직격타를 날렸다.

아마 모두들 그리 느꼈으리라.

"그대들은 오늘, 로마의 명예를 모욕한 야만인들을 단죄하리라! 그대들의 무예와 검과 창으로! 레기온의 발리스타 화살과 시리아인들의 불화살이 저들의 머리 위로 비처럼 내릴 것이고, 야만인들의 피는 강처럼 흐를 것이다!"

힘이 가득 실린 연설에 검투사들의 집중이 대대장에게로 일제히 모였다.

"산다면 너희는 로마의 시민으로 살게 될 것이고, 죽는다면 로마의 영웅으로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굳세게 싸워라, 마지막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300명의 검투사들이 뿜어내는 전투에 대한 의지가 갑옷을 뚫고 공기를 데웠다.

봄의 꽃샘 추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대장은,

"ROMA INVICTA(로마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 투지에 단 두 마디로 화답했다.

-ROOOMMMAAA INNNVICTTAAA!!!

-ROOMMAAA INNVIIICTAAAAA!!

-ROOOOMAAA INNVICTTTAAAA!!!

로마에 대한 찬양은 우레와도 같은 함성에 실려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흠.

검투사들이 충성심이 높다는 말이, 딱히 과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대략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다."

테스티아는 누런 동물가죽 위에 그려진 지도를 가리키며, 총 31명의 검투사들에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300명의 검투사 대대는 모두 요새 동쪽의 수풀 속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레기온이 공격을 개시하면 움직일 것이다."

테스티아의 손가락이 요새 안 쪽을 흐르는 개울로 향했다.

"우린 요새 안으로 흐르는 개울을 통해 침입할 것이다. 정찰병의 말에 따르면 수심은 무릎 위쪽까지 닿는 정도로, 그리 깊지 않다더군."

"잠깐, 질문이 있습니다."

한창 브리핑이 이어지던 그때, 코페시가 손을 들고 질문을 요청했다. 그녀의 말투 또한 평소보다 건조하게 변해 있었다.

테스티아가 턱짓으로 질문을 허락하자, 코페시는 말을 이었다.

"레기온이 공격을 시작한다는 건 어떻게 알아냅니까?"

"레기온이 게르만의 요새를 서쪽 성문에서 압박하기 시작하면 하늘에 불화살을 쏠 것이다. 구체적인 변경점이 있다면 레기온이 전서구를 보낼 것이고. 다른 질문 있나?"

손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테스티아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요새 안에 침투한 시점에, 레기온은 투석기를 이용해 이미 성문을 뚫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임무는 레기온을 저지하는 게르만들의 후방에서 저들의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테스티아는, 손을 지도에서 떼 각 검투사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레티아리우스들은 양 익에서 선봉을 서는 크루펠라리우스들의 옆과 뒤에서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적들을 제압한다. 적이 많다면 그물을 던져서 발목을 잡아라."

삼지창을 든 검투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티아는 코페시와 방패병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방패병들은 중앙에서 디마카에리와 시소르들과 함께 난전을 지원한다. 쌍검사들이 날뛸 수 있게 공간을 비워두되, 부상자가 있거나 적의 공격이 거세면 밀집해 방패벽을 세워 아군을 보호하도록."

코페시를 포함한, 무르밀로 등의 방패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티아는 마지막으로 이페이아와 투창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투창병들은 성벽 위에서 돌이나 기름을 쏟는 방어병들을 1순위로 제거하고, 도끼나 둔기로 크루펠라리우스들을 해하려는 놈들을 2순위로 노려라. 질문 있나?"

잠깐, 난 뭐해야 하는데.

재빨리 손을 들고 약간 빠른 속도로 물었다.

"그, 전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글라폴레스, 넌 쌍검사들과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난전을 통해 적들을 박살내라. 단, 방패병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말도록."

쯔바이핸더는 크게 호를 그리며 싸워야 하니 밀집대형은 불리하겠지.

상당히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 역시 스파르타인이라 이건가?

“아, 그리고, 모두 이걸 받아라.”

테스티아가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색 천 같은 것을 든 시종 대여섯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우리의 목표는 기습인 만큼, 대기할 때 망토를 걸치고 숨어있는 게 위장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거추장스럽다면 전투에 임할 때는 벗어던지고 싸우도록.”

검은 망토는 좀 많이 헤진 상태였다. 약간 누더기에 가까워 보이는 외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로.

그래도 위장용 망토라니까 입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내 키가 커서 그런지, 딱히 이동에 불편을 겪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근데 이거 어떻게 입는 거지.

“아니, 넌 어떻게 된 게 사람 키만한 검은 잘만 휘두르는데, 망토 하나를 제대로 못 입냐? 그거 이리 줘봐.”

낑낑거리는 걸 보다 답답해져 분통이 터진 것인지, 코페시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내게서 망토를 반강제로 갈취해갔다.

그러고는 능숙한 솜씨로 매듭을 지어, 내 어깨 위에 고정시켜놓았다. 오른쪽 어깨 위로 망토의 양 끝이 모이게 하고, 비교적 왼쪽에 치우쳐 늘어지게 한 것이 나름 멋이 있어 보였다.

“도대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망토를 입어본 적이 없는 거야? 네 고향도 겨울이 있을 거 아냐? 딱히 따뜻한 나라에서 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제 고향에서는 아무도 망토를 안 두르고 다녀서 말이죠.”

“그러니까 겨울은 있는데, 망토는 안 입는다고? 이상한 동네가 따로 없네. 대체 동방에는 뭔 기괴한 나라들이 있는 거야?”

이 곳에서 망토는 대략 외투의 개념을 겸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제군들, 승리의 여신 니케께서 그대들과 나를 보우하실 것이다. 용맹히 전투에 임하도록."

그 사이, 테스티아는 그리 말하곤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러다, 다른 타격대장들과 함께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일어-서!"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31명의 검투사들. 그건 다른 타격대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멀리서 브리핑을 지켜보던 대대장이, 300명의 전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전원, 목표 지점으로 진군!"

로마의 군대는 숲 속으로 향했다.

3년 간의 전쟁, 그 끝을 결정지을 최후의 전장으로.

저 곳에 내 자유가 달려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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