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전쟁을 준비하는 자세(1)
"이야, 드디어 저 중장비들이 왔네. 뭔 달팽이 새끼들 마냥 느려터져서 평생 안 올 줄 알았는데."
저 멀리에서 점검되는 투석기와 발리스타 등을 보며, 코페시가 중얼거렸다.
근데 전투의 규모에 비해 너무 과하게 준비하는 거 같은데 말이지.
검투사 부대에 시리아인 궁병대까지 준비해놨다는데, 뭔 공성 병기까지 끌고 온다냐.
물론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지만 이건 좀 많이 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고작 야만인들 상대하는 것 치고는 좀 과한 무장 같은데요."
"저 빌어먹을 야만인들이 2개 부족의 연합체를 결성하고는 요새를 지어놓지만 않았더라면 네 말이 맞았겠지."
"...요새를 지었다고요?"
요새를 지었다면 저렇게 중장비를 끌고 오는 것도...
아니, 잠깐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공성전은 좀 큰 문제다.
존나 큰 문제라고.
이거 잘못하다간 염병할 사다리나 올라가다가 뜨신 기름으로 샤워 씨게 하고는 응기잇하면서 뒤지는 엑스트라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코페시는 매우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었다.
"목책으로 지은 요새야. 좀 크고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또 무슨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이나 바빌론의 정신나간 8차선 두께의 성벽 같은 걸 지었나 했지.
그래, 이런 음습한 숲에서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로마군이라면 모를까, 게르만족이 축성을 제대로 하기나 하겠냐고.
"그럼 그 요새를 뚫는 게 목표인 겁니까?"
"그래. 자세한 전술은 대장 돌아오면 물어봐. 해가 막 뜰 때 회의 하러 갔으니까 지금쯤 돌아오겠지."
회의라면 전술 회의를 간 것일까.
식중독 때문에 병력 절반 나가리 된 건 어떻게 처리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다른 부대에서 40명 정도 빼오는 건가?
한창 그리 잡생각에 잠겨있을 때, 코페시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 악어도 지 말하면 온다더니. 대장이 벌써 왔네."
코페시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 호플리테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게임이나 그림에서나 볼 법한 생김새의 고대의 방패보병이 그곳에 있었다.
철로 테두리를 마감한, 인체의 흉부를 그대로 묘사한 검붉은 가죽 갑옷 로리카 무스쿨라타.
그 위에 초승달 모양 청동 장식과 붉은 깃털로 위엄을 더한 그리스식 철제 투구 밑에는 금빛 섞인 갈색 머리가 물 흐르듯 흘러내리며, 바람에 따라 사자 갈기처럼 휘날렸다.
반묶음으로 땋은 뒷머리도 여전했다. 다른 검투사들은 저런 머리 안하던데, 스파르타인의 전통 같은 건가?
등에 멘 큼직한 원형의 청동 방패와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3개의 버클러, 양 다리에 모두 찬 정강이받이, 그리고 오른팔에만 착용한 손목 보호대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웅장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존나 반할 것 같다.
오해할까봐 덧붙이는 건데, 난 갑옷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물론 그걸 입고 있는 사람도 갑옷과 상응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내가 그녀를 쳐다본 이유는 단순히 감탄하기 위함 뿐만이 아니다.
"테스티아님,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대답의 유무는 묻는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와서 그런가,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딱딱했다.
원래 이런 때일수록 공손히 말하는 게 중요하다.
"식중독으로 실려간 선임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대를 시키기로 결정했다. 물을 것은 그뿐인가?"
"손실된 병력은 보충이 되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테스티아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아니."
이건 영 좋지가 않은데.
병력이 보충이 안 되었다고?
내가 혼란해하는 사이, 테스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라면 6개의 검투사 타격대로 1개 대대를 구성해, 480명이 같이 갈 계획이었다. 타 부대에서 병력을 구해 손실을 무마하려 했지만 기각되었지."
"그래서 정확히 몇 명이서 같이 싸우는 겁니까?"
"같이 움직이는 병력은 정확히 300명이다. 레기온의 군사들과 중장비병들을 합치면 2500명 정도 되겠지."
오, 이런.
이건 안 좋은데.
왜 하필 또 300명이야?
"스파르타에서 옛날에 이런 전투가 있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놀라운 우연이군요."
스파르타인 검투사 테스티아가 내 말에 답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였지. 300명의 라케다이몬인이 그리스 연합의 일부로 참전해 용맹히 페르시아와 맞섰다."
"...근데 그때 싸운 사람들 다 죽지 않았던가요?"
"그랬지. 허나 저들은 페르시아보다 약하고, 우린 그리스인들보다 강하다."
테스티아의 말은 단순한 변명이나 말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승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묻어나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무장을 갖추고, 막사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때가 되면 부르겠다."
말투가 심히 비장하다.
저절로 손발에 힘이 들어가는 듯한 말투라 해도 되겠지. 음성화된 카리스마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예,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체력을 비축하고 정신을 가다듬어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기도를 드려라."
테스티아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일종의 사무실 개념으로 써먹던 지휘관용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홀로 남겨져 게르마니아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씨발, 전쟁이다.
내 인생의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떨려온다.
갑옷을 챙겨입고, 검을 든 채 막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이 괴이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후우, 후우, 후우..."
분명 일주일 간 끊임없이 훈련하고 연습해오며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나, 역시 전쟁은 전쟁이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어도 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저 여유롭게 무기를 손질하는 7명의 자태를 보며 불안을 가라앉혔다.
그래, 괜찮다.
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인물 검투사들이 내 곁에 있다.
내 윗대가리들은 그 전설의 로마군이고, 21세기 똥별들과는 다른 합리적 마인드로 무장한 자들이다.
난 지금 존나 로마군이다. 전쟁의 귀재들은 모두 나의 편에 서 있고, 적의 기세는 우리와 비교하자면 보잘것 없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선임들이 다 이겨놓은 전쟁에 숟가락 하나 놓고 시민권 얻어가는 것 뿐이다.
"그래, 괜찮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무엇보다 난 존나 선택받은 자다. 무려 정의의 여신이 날 선택했다고.
그리고 저 게르만인들은 국경 지대의 로마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살육한 자들이다.
내가 받은 축복 《피비린내 나는 거래》의 설명에 따르면, 죄인의 피를 검에 묻힐 시 물리력이 75% 증가한다고 한다.
이 3.6kg 짜리 쯔바이핸더의 위력이 75% 증가한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정도면 상대가 누구든, 능히 죽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근데 왜 호흡은 여전히 이 모양이지?
"글라폴레스, 너 괜찮냐?"
"예?"
느닷없이 들려온 코페시의 물음에, 난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숨 쉬는 게 좀 힘들어 보여서."
너무 헐떡거렸나. 어째 좀 수치스러운데.
사실 지금 약간 과호흡이 올락말락하는, 그런 상태인 듯 하다.
비록 진짜 과호흡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느낌이라는게 있지 않은가.
"어, 그게..."
근데 내가 0.3 과호흡 상태라 해서 코페시에게 내 정신 상태를 정확히 증언하는 게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아직 PTSD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않았을 2세기니까. 물론 이 경우에는 외상 전 스트레스 장애(Pre-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더 가깝겠지만.
그냥 날 쫄보 새끼라 여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때, 코페시가 입을 열었다.
"굳이 숨기고 그럴 필요는 없어. 조언을 원한다면 기꺼이 해줄게. 필요없다면 말고."
내 표정으로부터 속내를 읽어낸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히 털어놓는 게 더 낫겠지.
"그, 솔직히 좀 떨리고 긴장도 되고 하는데, 혹시 대처법 같은 거 있습니까?"
"음, 긴장과 떨림?"
그리 말한 코페시는 한동안 관자놀이를 쓰다듬다 답변을 내놓았다.
"뭐가 널 두렵게 하는지 생각해봐. 상대를 죽이는 거가 무서운지, 아니면 내가 죽는 게 무서운 건지."
뭐가 무서운지 생각해보라...
괜찮은 대처법이다. 옛말에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원인이 뭔지 알아야 그에 대한 대처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다음에는요?"
"그러고 나면 너만의 계획이나 규칙을 세워봐. 무기를 버리는 자는 어떻게 대할지, 상대가 항복하는 것 같으면 믿고 살릴지 아니면 안전하게 죽일지, 뭐 대충 그런 거 말이야."
젠장할, 나 계획이나 규칙 같은 건 좆도 못 만드는데.
하다못해 난 방 정리도 제대로 안하고 산다고.
그래도 한 번 생각은 해보는 것이 좋겠지. 진짜 실전에서 그런 애매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어버버하다가 칼 맞고 죽는 것 보다는 10배쯤 나을 테니까.
-전원 집하아아아압!! 막사에서 나와서 대형을 맞춰라아아아!!
사고의 장벽을 뚫고 들려오는 테스티아의 고함. 참으로 요란하다.
코페시가 짐짓 웃으며 말했다.
"대장이 우릴 부르네."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지만 그녀의 행동에서는 베테랑의 기품이 흘러나왔다.
휘어진 칼집에 집어넣어지는 코페쉬와 내 손에 들린 쯔바이핸더를 번갈아 보았다.
저 코페쉬는 내 검의 재료에 비하면 제대로 된 강철도 아니다.
조악하고, 나약한 철이라 해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빛을 발하지 않는가. 주인의 손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러니 현대의 강철로 빚어진 이 검을 들고서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헛되이 죽어선 안된다.
"...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히 되뇌였다.
나 자신과 코페시, 그리고 저 밖에서 게르만과 맞설 수많은 로마군 모두를 향해서.
"전쟁이, 우릴 부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