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병영의 한가운데에서(4)
이페이아의 손가락은 길고 얇다. 얼핏 보면 전사의 손가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직접 만져보면 알 것이다. 사방에 배긴 그 수많은 굳은 살들을 관찰한다면, 분명히 알 것이다.
저것은 누가 뭐래도 전사의 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많이 다쳤네, 팔이랑 손."
짜잘한 흉터들을 훑으며 이페이아가 말했다. 한창 롱소드 검술 배울 때 피더(연습용 검)으로 처맞은 흔적들이다.
호구랑 방어구랑 다 끼고 하긴 했는데, 그렇다 해서 본래 철로 두들겨 맞는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뭔 풀플레이트 입고 대련하는 거 아니면.
"대련하다 보면 원래 다들 그렇지 뭐. 공격을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어구 끼고 한다고 해서 충격이 완전히 감쇄되진 않으니까."
"그래, 그러면서 실력 느는 거지."
그래도 자기 자랑은 안하네. 자기라면 안 맞았을 거라느니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이페이아 몸에는 상처가 적은 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없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
물론 단순히 내가 못 봤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문신에 흉터가 가려지는 일은 꽤나 흔하니까.
아니면 그냥 회복력이 좋은 걸 수도 있고.
궁금해진 김에 한번 물어나 보자.
"근데 처음으로 싸워본 게 언제냐?"
"뭐, 검투사로서? 아니면 전사로서?"
"기왕이면 둘 다 말해주면 좋겠는데."
내 옆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이페이아.
그녀의 얼굴을, 천막을 투과해온 미미한 달빛이 푸르게 비추었다.
"음... 검투사 처음은 뭐, 단순해. 그냥 곰 하나 때려잡은 건데, 별로 재미는 없겠지. 그러니까 후자의 이야기만 해줄게."
존나 재밌을 것 같은데. 사람이 곰을 때려잡았어? 그게 사람인가?
"내가 갓 성인이 되고 어릴 때, 마을 근처에 늑대 무리가 나타났어. 양들을 잡아먹고 사람들을 물어뜯은 채 사라졌지."
실감나는 입체적 목소리로 이페이아가 속삭였다.
꼭 구연동화라도 듣는 기분이다. 의외로 말도 꽤나 흥미롭게 하는구만.
"그때 난 이 문신을 새기고 숲 속으로 들어갔지. 맨몸에, 2개의 창을 들고서. 늑대 무리는 금방 찾았지만 수가 많더라고."
그리 말하고서는, 잠시 속삭임이 멈추었다. 내가 잘 듣고 있나 확인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귀르가즘 느끼면서 슬슬 졸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눈을 감고 있긴 했는데, 그것만으로 내 정신상태를 파악할 수가 있는 건가?
뭐, 초인이니까. 안될 것 없겠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우두머리를 노려서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지. 그래서 투창을 2번을 했는데 다 이상한 데에 맞더라고. 맞으면 비명은 지르지만 죽지는 않는 곳 있잖아."
맞아도 안 죽는 곳이라... 그건 팔다리 정도밖에 없을 텐데 들짐승이 그런데 맞으면 사실상 치명타 아닌가.
어째 늑대가 좀 불쌍한 거 같기도 하다.
"그래서 굴러다니던 짱돌을 대충 던졌는데, 그게 그 자식 불알을 맞더라고. 반응이 참 볼 만했지."
아니, 정정한다.
그 늑대는 존나게 불쌍한 새끼다.
상상만 해도 아프다.
"그러더니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도주하더라. 무리도 흩어졌는지 다시는 오지 않았고. 근데 창은 못 가져와서 다시 만들었지."
이페이아는 그리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과연 그 늑대는 살아남았을까?
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한 늑대가 지나가던 초인에게 찍혀서 다리 두 쪽에 창을 하나씩 맞고 고자가 된 채 휘하의 무리를 전부 잃고 추하게 도주했다는 소리다.
그 늑대는 절뚝거리며 히오옹거리다 객지에서 픽하고 뒤졌을 가능성이 높겠지.
잔혹동화가 따로 없다.
"뭐야, 불알 떨어지는 얘기 하니까 겁나?"
"...그런 거 아닌데."
"그렇다고 하기엔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데?"
이페이아의 말에 난 내 손을 만져보았다. 진짜 식은땀이 나서 그런지 차가웠다.
무의식적인 반사란 과연 이런 것일까.
“확실히, 남쪽 애들 사이에선 그런 소리가 있긴 하던데.”
“무슨 소리?”
“남자들이 여자한테 잘못 먹혔다가 좆 부러질까봐 겁낸다던데, 솔직히 어이가 없다고.”
뭐 그런 소문이 다 있다냐. 따지고 보면 의학적으로 불가능하진 않을 테지만.
"어쨌든 걱정 말라고. 네 좆이든 불알이든 소중하게 대해줄 테니까."
이페이아의 말이 끝나자, 잠시간의 고요가 찾아왔다.
그야,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내가 대체 뭔 말을 해야 하는 건데 이 상황에서.
"그나저나 우리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 맞다. 너네 막사에 테스티아 있다고 했지."
사실 로마군 내 규정 중에 섹스 금지 항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들켜서 좋을 건 없다.
내가 옷 입는 모습을 이페이아가 빤히 구경하고 있길래 몇 마디 했다.
"그래서 뭐, 매일 밤 여기서 하는 건가? 아니면 장소 적당히 바꾸면서 할 꺼냐?"
근데 반응이 이상했다.
"아니, 이 정신 나간 새꺄. 아무리 발정이 났고 나한테 따먹히는 게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지, 함부로 좆물 싸재끼다간 전투에서 힘 못 써."
맞다, 정액은 남자 힘의 정수라 그랬지. 그럼 사정을 할 때마다 힘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생각하는 걸까?
뭔 개소리인가 싶지만 여긴 신이 존재하는 과학 혐오적인 세상이니 이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미신이 미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둘 필요가 있어.
여기에 원래 세상의 관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아마 대부분 멍청이짓이 될 거다. 물리법칙이야 그대로겠지만, 다른 것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니까.
일단 여러모로 조심하는 게 좋다. 괜한 리스크를 떠안을 필요는 없겠지.
"일단은 1주일 동안은 참아. 전투 끝나면 내가 마음껏-"
"자, 잠깐! 멈춰!"
이페이아가 느닷없이 불길한 소리를 하길래, 급히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갑자기 왜 발작을-"
"그… 고향 관습인데, 원래 전쟁 나가기 전에는 전쟁 끝나고 뭐 할 거라느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죽어. 죽는다고."
이 세상에선 미신이 단순한 미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망 플래그 또한 현실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페이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날 이상한 눈으로 보았으나, 곧 표정을 풀고 담담히 답했다.
"뭐, 굳이 그런다면야. 아무튼 당분간은 몸 섞지 마. 진지한 조언이야."
그나저나 정액을 밖으로 뽑지 말라는 건 딸도 못친다는 얘기인데, 그게 가능할려나.
물론 내가 1회차 군생활을 할 때는 반강제적 금딸이 되기는 했지.
근데 그건 온 사방에 꼬추새끼들 밖에 없을 때의 얘기고, 지금은 온 사방이 여자란 말이다.
하지만 만약 딸을 친 대가로 목이 따여서 평생 딸을 칠 수 없게 된다면, 금딸을 하는 게 맞기는 하다.
“…하, 젠장할.”
뭐가 미신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 진짜.
어쨌든 그리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옷을 주워입다 보니, 달빛을 받으며 뒹굴거리는 이페이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쟤는 그냥 여기서 잘 작정인가, 왜 계속 누워 있지?
"넌 니네 막사로 안 돌아가냐?"
"좀 있다가 갈 꺼야. 먼저 가든가."
달빛을 받으며 월광욕 비슷한 걸 할 생각인가 보다. 아니면 그냥 움직이기 귀찮은 거든가.
일단 나는 쓸데없이 선임들에게 민망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굳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내 자리는 막사 중간인데, 들어가다가 들키는 거 아닐까.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걱정은 내가 막사에 돌아갔을 때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내 자리가 막사 입구 쪽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것도 가장 외풍이 잘 드는 거지 같은 자리로.
"히히, 씨발."
조용히 그리 되뇌이며, 난 조심조심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갬비슨 입고 자야겠다.
염병할.
추워.
***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불행히도 막사에서의 내 자리는 바뀌지 않았고, 갬비슨은 갑옷뿐만 아니라 잠옷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난 밥 먹을 때 빼고는 주구장창 쯔바이핸더를 휘두르며 연습에 매진했다. 실전에서 최대한 실수가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 약간의 긴장감과 체력을 기르며 생활하던 와중에,
-이야, 저 새끼들 드디어 왔네.
-야만인 새끼들 똥줄 좀 타겠는데? 흉악하다 흉악해.
병영 저 너머에서, 투석기가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