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병영의 한가운데에서(2)
대략 12년.
종류의 구분 없이 검술이라 불리는 무술을 배운 기간을 다 합친다면, 대략 그쯤 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검도도 검술이라 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 중 롱소드 검술을 배운 기간은 3년 가량, 지금 연습하고 있는 쯔바이핸더 검술을 배운 기간은 대략 2년 반 정도다.
그 2년 반 동안 배워낸 것들, 그리고 총합 12년간 익힌 검술의 기본기를 되새기며, 병영 한가운데의 공터에서 쯔바이핸더를 휘두른다.
-후우웅!
바람소리. 검을 크게 횡방향으로 휘두르자, 공기가 밀려난 결과다.
자세와 무게중심에는 그닥 큰 문제는 없다. 관절의 움직임, 힘의 소모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제 메뉴얼을 머리 속으로 복기해보자.
먼저, 방패를 든 적과 대면하는 경우.
머리 위로 검을 회오리치는 형세로 돌려 적이 당횡케 하라. 방패를 위로 들면 무게중심이 불안정해지고, 강한 충격으로 상대의 방어를 꺾는다.
다음, 갑옷을 온 몸에 두른 적을 대면하는 경우.
투구의 눈구멍, 관절, 이음새를 찌를 때, 그리고 쓰러진 상대를 끝장낼 때는 하프 소딩을 이용한다.
왼손으로는 리카소를 역수로 잡고, 오른손은 정수로 손잡이를 잡아 내리찍는다. 머리 위, 머리 높이, 또는 허리 부근에서 시작한다.
상대가 검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 근접전이 허용되는 경우.
다른 종류의 하프 소딩이 필요하다. 오른손을 리카소에, 왼손을 손잡이에. 둘 다 정수로 잡는다.
손이 무게중심에 가까워지므로 더 다루기 쉽지만, 사정거리는 짧아진다. 하지만 이 경우엔 상관이 없지.
통상적 롱소드 검술을 기반으로 몇 가지만 꼬아서 쓴다고 생각하자. 패링 훅으로 칼날을 잡은 채 휘어감아 무장을 해제하거나, 그 상태에서 폼멜로 얼굴을 타격해 미간을 뭉겐다.
아마 내가 맞서는 상대의 검은 길어봤자 아밍 소드 정도겠지. 강철 제련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2세기의 특성상 그 정도가 한계다.
그러니 원칙적으론 상대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맞지만, 세상 일이 전부 내 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숲 속에서 난전 벌이다 보면 거리 좁혀지는 건 금방일 테니.
"뭐야, 넌 안 자고 뭐하냐?"
그렇게 한창 연습하던 찰나, 내 오른쪽 귀 바로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껄렁거리는 말투와 음색. 분명 이페이아의 것이다.
검을 땅에 짚고, 숨을 가다듬으며 말한다.
"연습."
너무 대답을 짧게 한 것인지,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대화하기 귀찮았던 것도 있고.
"잠깐만, 나 봐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페이아였다.
"응?"
근데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요구란 말인가.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이페이아는 양 손으로 내 머리통을 잡아 아예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러고서는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더니, 손을 놓고선 나지막히 되뇌였다.
"음... 테스티아가 단순히 고기 먹으라고만 말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네."
"뭔 소리야?"
"눈빛이 달라졌어."
역시 초인은 눈썰미도 좋은 모양이다. 뭐, 수풀 속에 숨어있던 멧돼지도 한 번에 투창질로 저격해서 잡는 인간이니까.
"늠름하네. 야해졌어."
"...뭐?"
"좀 더 전사의 눈빛에 가까워졌다고."
이페이아는 이 뭔지는 몰라도 '전사의 눈빛'이라는 거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모양이다.
지금 내 눈빛이 결투에서 이페이아가 보여줬던 눈빛과 비슷하다는 소리인가?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내가 결투에서 이페이아와 비길 수가 있었던 것이지?
그녀가 숲에서 보여준 놀라운 신체능력들을 감안하면, 그때 날 압도적인 기량 차이로 발라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의도적으로 봐준 건가?
"아, 하여튼... 이 망할 남쪽에는 제대로 생겨먹은 남자란 게 한 명도 없지. 죄다 애새끼마냥 생겨가지고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이페이아의 한탄 섞인 혼잣말을 통해 추측하자면, 남유럽 남자들은 단신이 많은 모양이다. 북부 쪽은 상대적으로 단신이 적은 편일테고.
그리고 이 켈트인은 너무 단신인 사람은 오히려 장신인 남자보다 싫어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 세상의 상식에 비추어 사고해보면, 이페이아의 미적 기준은 타 지역 출신들과는 상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0 초반 키의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190 중반에 해당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많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얼굴의 문제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세상의 정보에 대해 좀 물어봐도 나쁘진 않겠지. 이페이아가 켈트인이라 해도 로마에서 몇 년 살아본 건 분명해 보이니까.
“그나저나, 여기 남자들, 그러니까 그 ‘남쪽’ 남자들은 보통 뭐 하면서 사냐? 집안일?”
“일단 확실한 건 전사는 하나도 없다는 거지. 그 외에는… 글쎄다, 빈민가에서 썩어가는 가난뱅이들 빼면 죄다 집안일은 노예한테 시키는 것 같던데.”
예상된 바다.
그나저나 어쩌다 이쪽 세상은 이런 기이한 구조를 띄게 된 거지. 여자가 임신이 가능하다면 쉽사리 탄생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말이다.
단순히 어느정도 성평등적인 사회는 원역사에서도 꽤나 전례가 있다. 남녀 상관없이 쌈질하던 데인인들이나 여자도 파라오가 가능했던 고대 이집트 같은 경우가 있으니.
하지만 아예 역전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이유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달리, 내조에 힘쓰는 여성과 바깥일하는 남성의 스테레오타입은 사회적 억압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호르몬의 부재와 10달의 임신 주기는 여자들로 하여금 정주적인 성격을 지니게 했고,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 관념을 지니게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상대적'인 것이다. 고려시대나 바빌로니아의 여자들 성 관념이 빅토리아 시기 남자들보다는 한 20배쯤 자유분방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여간 빌어먹을 영국인들 같으니, 사회 분위기가 그따위니까 마마이트 같은 거나 만들었지.
어쨌든 그 원인이 궁금한 건 사실이다.
"근데 남자들은 군인으로 안 받는 이유가 있나? 남자는 근육이 여자보다 덜 붙는다거나, 뭐 그런 건가?”
"보통 그런 것 같긴 한데, 가끔씩 남자 검투사들도 있기는 해. 근데 걔네들은 남자들끼리만 싸우지.”
예상되는 원인은, 신체적 조건의 변화.
난 생물학자가 아니니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마 호르몬이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원래 세상과는 다른 쪽으로 신체를 변화시키는 거지.
호르몬 종류 자체가 아예 바뀌었다는 가설은 말이 안된다. 당장 이페이아만 해도, 웬만한 남자는 뛰어넘는 무력을 지니고 있지만 외모는 여성성의 극치니까. 이건 다른 여자 검투사들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하니까.
실제로 대다수 동물들도 암컷의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직 의문 하나가 더 남았다.
그것도 꽤나 중요한 의문이.
"그나저나 너 자궁에 정액 잘못 받다가 임신하는 거 아냐?"
어째서 여기 여자들은 이렇게 섹스에 미쳐있는 것일까. 물론 여자만 있는 군대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느낌이 너무 유사하다. 내가 연태까지 봐왔던 섹무새들의 은근한 향기가 그들에게서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일시적 욕구불만이 아닌, 쥬지...나 뷰지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사고방식이 느껴진 것이다.
"프, 프하하핫!!"
뭐지. 왜 웃는 거지?
"단순히, 푸핫, 몸만 섞는다고 임신이 되겠냐? 1달 동안 매일매일 같은 사람하고만 해야 겨우 임신이 될까 말까인데. 마음도 섞는 게 아니면 그러긴 어렵지."
"...마음을 섞는다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숨을 가다듬으며, 웃음을 멈춘 이페이아가 대답했다.
"여기 남부 애들은 애인과의 관계를 셋으로 구분하드라고. 몸만 섞는 사이, 마음만 섞는 사이, 몸과 마음 같이 섞는 사이. 근데 사실 2번째는 거의 본 적이 없어."
"아하."
대충 섹파/플라토닉/연인으로 나누는 식인가 보다. 이페이아의 언급에 따르면 우린 섹파 정도쯤 되는 모양이고.
그나저나 여긴 대다수의 사람들이 난임을 겪는 세상인 건가? 애를 낳아도 대다수가 여자애고?
그러면 여자들이 이렇게 구는 게 말이 되지. 임신 걱정이 내 세상의 한 1/100로 줄어드는데, 음란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럼 우린 몸만 섞는 사이인 거?"
"지금으로써는. 다른 거 다 제쳐놓고… 네 자지가 되게 마음에 들었거든."
이페이아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떠오른다. 부끄러움이 아닌, 흥분의 홍조다.
"너처럼 진하게 나오는 건 드물어. 대부분 향도 없고, 양도 많이 안 나오거든. 보통 자지에도 힘이 잘 안 들어가고."
흠.
이건 좀 이상한데.
난임의 보편화에, 남자들의 평균적인 신체기능 약화라니.
이건 호르몬 기능이 바뀌었다기 보단, 그냥 신체적 기능 자체가 저하된 거에 가깝지 않나? 내 가설이 맞다면 이 세상은 거근쇼타가 적지 않은 세상이여야 할 텐데 말이지.
그저 자연적인 우연으로 설명하기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떤 미지의 요소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
그 요소가 내게 개입하려 한다면, 더더욱 주위를 기울여야 하고.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내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사고를 흔들어 없애는 말소리에,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일반적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페이아의 흰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내 하반신 위에 튀어나온 윤곽을 쓰다듬는 손이.
"아까 전에 보니까 또 아주 빳빳히 서있던데."
이페이아는 내 목에 오른팔을 걸어 얼굴을 끌어당긴 채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숲 속에서는 나만 너무 즐긴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이번엔..."
입술을 혀로 싹 훑는 그녀. 새파란 눈동자가 별빛을 받고 번뜩이며 의지를 표출했다.
내 자지를 범하겠다는 의지를.
"너랑... 나랑, 둘 다 기분 좋아지는 방향으로 가볼려고 하는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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