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병영의 한가운데에서(1)
-고기! 고기다!! 이페이아랑 신입이 멧돼지를 잡아왔어!!
-뭐, 뭐? 진짜?!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대의 함성은 전부 검투사들의 것이다. 저들의 침샘이 폭발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
역시 남녀노소 누구나 가릴 것 없이, 고기는 좋아한다는 것일까.
"휴!"
이페이아가 힘찬 한숨과 함께 멧돼지를 내려놓자, 그녀를 향한 질문이 쇄도했다.
-아니, 잠깐만. 대체 신입이랑 단 둘이서 숲에서 뭘 하고 온 거야?
-…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와 나에 대한 질문이 쇄도했다.
정작 어떻게 저 커다란 멧돼지를 잡았는지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이딴 짓을 평소에 꽤나 하고 다닌 모양이다.
역시 이페이아는 초인이 맞는 모양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아니, 그… 니네 둘이서, 했냐?"
이집트인 검투사, 코페시가 그리 물었다. 그러나 이페이아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대충 답할 뿐이었다.
"글쎄, 그랬을 것 같냐?"
그러자 검투사들은 각자 나름의 추측을 내놓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뭐야, 그래서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봐라. 남녀 둘이서 으슥한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게 말이나 되냐?
하여간 음담패설 좋아하는 건 남녀불문 군대 특징인 것 같다. 근데 뭐, 격리된 장소에서 몆 년씩 지내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심히 어렵긴 할 테니 어느정도는 당연한 일이겠지.
한편, 이페이아는 답하기 전에 주위를 싹 훑으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어쩌면 말해줄 수도 있지.”
-오?
“대신 너네들이 고기 손질하고 꼬치 준비랑 다 먹은 뒤 뒤처리까지 다 한다고 약속하면!"
그녀의 발언에 대한 검투사들의 반응은, 나름 다양했다.
-하여간 영악한 새끼 진짜.
-이런, 씨발. 시발련.
누군가는 체념했으며,
-하, 씨발 떡치고 싶다. 젠장할, 군단병들은 매춘부도 붙여준다더만, 우린 왜 이 모양이야?
-네 앞에 반반한 남자 하나 있잖아. 키가 좀 많이 크긴 하지만. 한 번 부탁해 보지 그러냐?
-정신 나갔냐 임마? 내 추종자도 아닌 애한테...
-네 추종자들은 태반이 여자밖에 없잖아. 아니면 아예 여색을 시도해 보던가.
-그… 대가리가 혹시 쳐돌았니?
-얘가 꼴림을 모르네.
누군가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쪽 로마에서 남색 대신 여색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남녀가 역전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모두들 유쾌하게 웃고 떠들고 하는 정다운 광경이다.
근데 어째서인지 난 전혀 유쾌한 기분이 안 든다. 그저 한없이 착잡하고 불안할 뿐.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
난 일주일 뒤에 전쟁을 나가야 한다.
이페이아와 함께 병영을 가로지르며 본 훈련장 풍경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근육질의 건장한 로마군들이 끊임없이 땀을 흘리며 목검으로 대련하며 훈련하던 모습이.
물론 다들 키는 작다. 정확히 말하자면 2세기 치고는 내 키가 너무 큰 거겠지만. 21세기 기준으로도 큰 185cm의 신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페이아랑 테스티아는 대략 170cm 대에서 노는 것 같고, 코페시를 포함한 나머지들은 다 160cm 즈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마 저들의 근력은 날 압도할 것이고, 저들의 기술은 나와는 비교는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날 것이다.
그야 저 검투사들은 싸움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전투의 달인들이니까. 이건 대다수 로마군들도 마찬가지인 사항이다.
"그리고 난 망할 일반인이지."
8명으로 이루어진 분대(Contubernium)의 공동 숙소로 쓰이는 텐트에 로리카 하마타를 잘 개어놓으며, 난 그리 되뇌었다.
저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7개의 모포들 중에는 코페시의 것도 있고, 테스티아의 것도 있겠지.
사실 테스티아는 장교용 개인 숙소를 쓸 수가 있지만, 지휘관이라고 해서 따로 안락한 곳에서 자면 정신이 나약해진다는 이유로 장병들과 같은 곳에서 잔다고 한다. 대단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스파르타인 평균인가?
근데 이 미친 고인물들 사이에서, 난 오늘 대체 뭘 했단 말인가? 그냥 숲 속을 좀 걷다가 떡치고 나온 것 밖에 더 없지 않은가?
존나 수능 한 달 전에 피시방에서 죽치고 노는 기분이다. 똥줄이 타들어가는 듯한 절망적인 이 느낌.
그래, 뭐 이페이아는 분명 예쁘고 쾌활하고 괜찮은 여자지. 정신세계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정신병이라기 보다는 그냥 극도로 자연 친화적이라서 수치심이 거의 없는 거에 가깝고. 그런 여자와 이렇게 가까워지는 건 확률적으로 매우 드문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죽으면 의미가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이다. 얼마나 섹스를 많이 했건 얼마나 친밀해졌건 상관이 없다. 죽는 건 죽는 거다.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이 영 확실치가 않다. 그렇기에 불안하다.
실전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회원들끼리 시간 맞을 때마다 체육관 빌려서서 다양한 무기들끼리 1대1 대련을 붙이는 이벤트를 했는데, 거기서 쯔바이핸더로 여러 무기랑 붙어보긴 했다.
그래도 거기선 내가 거진 다 이기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나약한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우고, 게르만의 정예 전사들과 맞서서 살아남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이 거대한 검은 길이와 질량, 그리고 날카로움을 통해 제 역할을 하겠지만 내 멘탈도 그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이엇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업햄 상병처럼 PTSD에 휩싸여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검술이고 뭐고 다 의미가 없다.
내가 저 검투사들 사이에 껴 있을 자격이 있을까?
"휴우우..."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날 여기에 내려보낸 존재의 의도를 하나도 모른다.
그 염병할 여신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전혀 파악이 안되고 있다고.
하지만 짐작하건대, 그건 아마 마마이트와 같을 것이다.
시꺼멓고, 역겨운 향을 풍기며, 맞닥뜨리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데에다가, 정신을 극한까지 훼손시키는 순수한 해악의 결정체. 가급적 엮이지 말아야 하고, 절대로 직접적으로 손을 대거나 개봉을 열어서는 안된다.
흔히 사람들은 인생이 레몬을 준다면 그걸 레모네이드로 만들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몬을 줄 때나 통용되는 소리다.
만약 인생이 너한테 걸죽한 마마이트 한 통을 준다면, 그건 그냥 나가죽으란 소리다.
인간은 결코 마마이트를 가지고 무언가 괜찮고 먹음직스러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마마이트는 재료의 영혼을 삼켜서 그걸 순수한 형태의 공포로 가공하는 끔찍한 물건이다. 그런 것으로 어떻게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그 끔찍함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심연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심연이 지금 내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내 모가지를 족치고자 악의를 불태우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저 먼 발치의, 숲 속 야만인들 사이에서.
그러니, 이리 심란한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전쟁이라는 이름의 뒤틀린 마마이트가 날 재료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날 공포에 질린 시체로 가공하려 들고 있어.
-크흠.
뒤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상념을 깨고, 내 주위를 붙잡기 위한 것이겠지.
"이페이아가 고기가 다 되었다고 부르짖으며 널 찾더군. 못 들었던가?"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카리스마가 넘쳐 흐르는 목소리, 두말할 것도 없이 테스티아다.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
"죄송합니다, 테스티아님. 빨리 가겠습니다."
딱히 쪽팔리는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이러고 있는 걸 들키는 건 좀 그래서, 재빨리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깐."
뛰쳐나갈려고 했다.
"근심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이지?"
주저앉아서 술주정하는 것마냥 한숨 푹푹 내쉬는 거 보고 있으면 이런 추측은 일도 아니겠지.
젠장할. 그냥 사실대로 말하자.
"게르만족의 전투력이 굉장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제 머리가 그거 관련해서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하더군요."
"전쟁터에서 죽는 상상이라던가, 그런 류의 상상 말인가?"
"...정확합니다. 사람 마음 속을 잘 꿰뚫어 보시는군요. 검투사로 일하며 배우신 겁니까?"
질문을 들은 테스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스파르타에서 배운 것이다."
역시 스파르타인이었군. 왜 목소리 들을 때마다 레오니다스 생각이 나나 했네.
"그럼 어렸을 때 고생 좀 하셨겠군요."
"그래서인지 검투사 훈련이 훈련 같지가 않더군.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다잡아야만 했지."
그녀의 무덤덤한 표정과 대비되는 유머가 꽤나 웃겼기에, 난 무의식 중에 피식하며 웃음을 흘리게 되었다.
테스티아는 이어서 말했다.
"최전선에서 2년을 보내며 게르만들과는 숱하게 싸워 보았다. 그리고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게르만은 용맹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자들은 아니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할텐데 말이죠."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 위로다. 테스티아가 나와 비슷한 수준이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방패만 들고서 험난한 콜로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결코 나와 같은 사람은 아니지.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훈련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까요?"
"아니."
테스티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사는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모이라이의 실은 길고, 그 중에 일주일은 찰나의 티끌과도 같은 시간이지."
냉철하지만 어떠한 망설임도 없는 답변. 그로부터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
"네게 필요한 것은 이미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고, 남은 시간은 네가 가진 것을 확인하는 데 쓰도록 해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약간 말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테스티아는 날 타박하지 않았다.
"네 마음이, 운명이 널 머나먼 동방에서 이곳으로 이끈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이라이는 짖궂으실 지언정 결코 어리석지는 않으니."
분위기가 참 무겁다. 따지고 보면 내가 초래한 것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고.
그나저나 모이라이는 또 뭘까. 그리스의 수많은 신들 중 한 명인가? 신들이 적당히 많아야지 원.
테스티아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마땅한 축복과 광명을 내리실 것이다. 로마의 군대가 신들의 영광을 기리고 있으니."
스파르탄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이 시기 사람들의 특징인지 몰라도 그녀 자신이 로마군의 일부라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는 모양이다.
어쨌든 진짜 신의 축복을 받는 군대라면 이기기야 하겠지. 난 여신을 실제로 만나보기도 했으니.
근데 딱히 신성한 기분이 들지는 않던데 말이지. 그냥 아무나 대타로 뽑았는데 내가 걸려서 여기 떨궈진 느낌이다.
"글쎄요. 전 여기를 관할하는 신들의 축복을 받기엔 너무 멀리서 온 게 아닐까요?"
3초간의 정적이 흘렀고, 테스티아는 뜻이 담긴 눈빛으로 그 침묵을 깨어냈다.
그렇지 않다는 의미의, 부정의 눈빛.
"아니, 너 또한 그들의 일부다. 로마의 일부이고, 우리의 일부이지. 넌 유스티티아님 앞에서 그리 되리라고 맹세를 했으니, 시간은 중요치 않다."
그리 말한 스파르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충고를 던지면서.
"슬슬 나와라. 탐욕스러운 동료들이 저녁을 전부 먹어치우기 전에."
이렇게 툭툭 농담을 던지는 게 스파르타인들의 특성인 걸까. 스파르탄 전사가 활발하게 노가리 까면서 노는 건 상상이 안되니 민족성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필요한 건 다 가지고 있다라.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내가 지금 가진 거라고는 별 거 없는데.
쯔바이핸더, 흉갑과 투구, 건틀릿, 그리고...
"...도와줘요, 여신님."
정의의 여신이 내린 은총.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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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거래(Viri Sangvinvm Artis)》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실현되는 축복. 죄인의 피를 검에 적시면 그대는 심판을 이어나갈 강대한 힘을 얻게 되리라. 축복이 지속되는 동안 검을 통해 발현되는 그대의 물리력과 그대가 사용하는 검의 강도가 75% 증가한다.
(다음 단계 해금까지: 0/10)
{흉악한 죄인은 정의의 검으로 다스려 그 피를 내게로 흘려보내라. 내 친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줄 터이니.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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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유가 있겠지."
물론, 나는 유스티티아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여신이 아무나 지 대리인으로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논리적인 해석이다.
내게서 스마트폰과 신용카드는 빼앗아갔지만, 쯔바이핸더와 갬비슨은 그대로 남겨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게 축복을 내려주고 정의의 대리인 역할을 맡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온 사람이 나인 이유가 있겠지."
인생이 내게 마마이트 한 통을 끼얹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끼얹은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영혼은 지금 마마이트로 범벅이 되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디로, 인생이 존나 꼬였다.
-글라폴레에에에스!!
하지만, 살아간다.
- 고기 다 구워졌으니까 그만 꾸물거리고 나와아아아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탈출하는 것이다.
이 거지 같은 숲 속 병영도, 전장도 아닌, 제대로 된 사람 사는 곳으로 탈출하는 거다.
그러고서 방법을 찾아봐야지.
정의를 찾을 방법, 나의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내 원래 삶으로 돌아갈 방법을.
"점심 안 먹었더니 더럽게 배고프네, 거."
천막에서 나와,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았다. 행복하게 고기를 뜯는 사람들을.
내가 저들의 일부이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면 저 모임에 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야, 네 꺼 남겨놨다. 타기 전에 먹어."
고기 맛은 썩 좋았다.
그리고 하늘에선 별들이 찬란하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