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9화 (10/67)

EP.9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1)

잠깐만,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지금 사냥을 가겠다고 말한건가? 그냥 갑자기?

"아니, 잠깐만요. 지금 당장 사냥을 나간다고요?"

"고기먹고 싶어서. 곡물죽만 4일째 처먹으니까 죽을 맛이야."

이페이아는 마치 라면 사러 편의점에 간다는 듯한 말투로 태연하게 답했다.

"여기가 군대 한복판인건 알죠?"

"그러니까 질 좋고 신선한 고기를 구해옴으로써 병참 장교의 수고를 덜어주자는 거지. 대장도 허락해줬어."

"...밖에 게르만족도 있는데요?"

"걔넨 북동쪽에 있는 거고. 우린 남서쪽 숲으로 갈 꺼니까 상관 없어."

논리적으로 그릇된 주장은 아니지만 어째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물론 2세기에 사냥 나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반나체로 갑자기 고기 먹고싶다고 나가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고.

"그렇게 맨 몸으로 나가다가 다치지..."

"이 문신은 폼으로 한 게 아냐."

"그럼 뭐, 마법의 방호막이라도 만들어줍니까?"

"글쎄, 최소한 나뭇가지 같은 거 찔려서 고생할 일은 없을걸?"

한낱 문신 따위가 실질적인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전혀 알 길이 없으나, 따지고 보면 나도 오늘 아침에 여신을 만나고 오지 않았던가.

이 기이한 남녀역전의 세상에서는 미신이 단순히 미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데 전 사냥 같은 거 해본 적이-"

"그럼 운동하는 셈 치든가. 나 어릴 땐 다 이러면서 컸어. 근육 많이 붙긴 하더라."

그래, 근육 많이 붙겠지. 염병할 알몸으로 숲 속을 달리면서 사슴 같은 거 때려잡고 있으면. 그러다 약한 애들은 병 걸려서 다 뒤지고 강한 자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눈앞의 이 노출증 광인을 창조해낸 주체는 사실 냉혹한 자연선택의 법칙이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뇌리를 스친다.

"아니, 대체 왜 절 사냥에 데려갈려고-"

"네가 고른 그 갑옷, 입고 다니는 연습해야 할 꺼 아냐. 그리고 운동신경 키우기엔 숲만한 공간이 없지. 이래도 안 갈꺼야?"

이페이아는 어떻게든 날 꼬셔서 데려가려는 듯 온갖 궤변을 늘어놓았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 궤변이 실은 그다지 개소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 특유의 무게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또한 지형의 특성상, 게르만과의 전투는 숲 속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갑옷을 입고 숲 속을 누비며 사냥을 돕는 게 그리 멍청한 짓거리는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또 누가 아는가. 자애로운 검투사 누님들께서 내 공을 인정해 더 많은 고기를 배분해줄지.

"생각해보니 같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맹수가 튀어나왔을 때의 대비도 되어있는 거죠?"

"사자보다 쎈 놈이 나타나지만 않으면 죽을 일은 없어. 로마에서 사자까진 잡아봤거든."

왠지 힘이 강하다 했더니, 그 콜로세움에서 맹수 때려잡는 일을 하던 검투사였던 모양이다. 그거 이름이 뭐였지, 베스티아리?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자고."

제안이 다소 급작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안될 것 없지.

무엇보다 단 둘이서 가는 건데, 그럼 저 큼직한 가슴과 새끈한 골반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야릇한 일 따위가 일어나길 바라고 가는 건 아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으슥한 뒷골목이나 공중화장실도 아니고, 뭔 야생의 숲 한가운데에서 섹스를 하는 건 정신병자밖에 없다.

"예, 안될 것 없죠. 갑시다."

***

반나체의 단발머리 문신녀가, 엄청난 속도로 숲 속을 달리고 있었다.

내 호흡기 상태와 위치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로.

좆같다.

"빨리빨리 안 와? 왜 이렇게 느려터졌어? 달리다가 바닥에 부랄 떨어져서 찾으려다 놓친 거야?"

"전, 허억, 갑옷을 입고 있잖습니까, 거 천천히 좀-"

"걸어서 연습하면 운동 안돼. 제대로 적응할려면 좆빠지게 뛰어댕겨라 이 말이야."

옘병,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난 빌어먹을 마라톤 선수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저 새끼는 예상 외로 입이 존나게 험하다. 병영 있을 땐 안 그랬는데 왜 이 지랄이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다. 호흡기가 그야말로 혹사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반자동적으로 괴성이 튀어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그래, 알겠다, 알겠어! 쉬었다 갈테니까 좀 조용히 해!"

역시 고분고분 말하면 사람이 말 안 처듣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인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은 지랄을 해야 돼.

여하튼,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안식을 취해본다.

"허억, 허어억..."

사슬 갑옷과 갬비슨을 같이 입고 숲 속을 전력질주하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나마 투구는 안 쓰고 와서 다행이지.

잠시 갑옷을 벗어 옆에 내려놓고, 갬비슨의 앞쪽에 있는 버클을 풀러 땀을 식혔다.

"야, 신입. 많이 힘드냐?"

선 채 나무에 등을 기댄 이페이아가 묘하게 껄렁거리며 물었다.

이 미친년아,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다 씹었으면서 이제와서 걱정하는 건 또 뭔데.

"그럼 뭐, 그 문신이라도 해주시게요?"

사실 선임한테 하는 말 치고는 좀 많이 위험하지만, 이 인간의 사고방식은 '내가 지랄하는 게 꼬우면 너도 맞지랄을 하면 되잖아.'라는 식이라 딱히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네가 켈트족으로 다시 태어나면 고려해볼게."

보라, 별 신경 안쓰지 않는가.

난 이페이아 내면의 기이한 사고체계의 기원이 영국이라는 이름의 저주받은 대지, 그 자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역사시대 이래로 발현되어온, 영국인들 특유의 음습하고 뒤틀린 크툴루적 광기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빵과 빵 사이에 빵을 끼워넣은 샌드위치를 가판대에서 파는 행위가 영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경제활동이란 말이다.

난 그 탄소 혼합물의 참혹한 완성도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코즈믹호러를 깨우칠 수가 있었다.

"빵 샌드위치 문화의 번영은 심각한 수준의 국가적 재난임에 틀림없어. 사실 인류는 이미 쇠락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뭔 개소리야?"

지 후손이 앞으로 2천년 간 수백만 개의 식재료를 가지고 괴상을 창조하고 다닐 것을 알게 된다면 이페이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은근 궁금해진다.

"그냥 헛소리 좀 하고 싶어서요."

"그래, 그럴 수 있지. 대자연은 진실된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사이비틱한 발언일까. 농담인가 싶어서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딱히 그래 보이진 않는다.

저게 단순한 개소리라면, 저렇게 눈이 맑을 리가 없을 테니까.

"확실히 로마애들이 도시를 잘 짓긴 해.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고 분주한 게 문제라고. 원래 살던 데는 한적해서 좋았는데."

글쎄, 영국 날씨에 비하면 이탈리아 날씨는 분명 신의 축복에 비견되는 수준일텐데 말이지.

"원래 살던 데면, 브리타니아요?"

"아니, 칼레도니아. 뭐 따지고 보면 히베르니아에 더 오래 살긴 했는데, 로마 오기 전엔 칼레도니아에서 살았으니까."

칼레도니아는 내가 알기론 스코틀랜드일 거고, 히베르니아는 어디지? 아일랜드인가?

"그럼 로마에는 어쩌다 온 거죠?"

"남쪽의 투기장에는 신기한 동물들이 많다길래, 그거 한번 때려잡아 보면 괜찮겠다 싶었지."

이페이아는 그리 말하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에 잠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예, 근데 국경은 어떻게 넘은 겁니까?"

"아, 그거."

내 질문을 들은 이페이아는 그 특유의 새파란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마을에 라틴어 아는 애들이 좀 있길래 적당히 한 일주일 정도 배운 다음에, 새벽쯤에 성벽을 넘었지."

"...예?"

"로마애들이 성벽을 더럽게 높게 쌓아놨더라고. 그거 올라가느라 고생 좀 했지."

아니, 잠깐만. 성벽은 일반적인 사람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시설이 아니지 않나?

"그, 잠깐만요. 성벽을 기어서 올라갔다고요?"

"응."

이런 미친 인간을 보았나.

아니지,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대체 뭐하는 인간이 맨손으로 성벽을 기어올라가는데? 어쌔신이야?

하지만 이페이아는 위화감 따윈 느끼지도 못한 것인지, 약간 신이 나기까지 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데 올라가봤더니 위에 병사들이 좀 있어서 오해하지 않게 설명을 좀 했지. 난 니네들 목을 따러 온 게 아니라 투기장 가서 신기한 동물들이나 좀 때려잡으려고 온 거라고. 근데 그 등신들이 다짜고짜 공격을 하길래, 면상에 창을 좀 박아줬지."

그래, 그랬겠지.

웬 미친 여자가 꼭두새벽에 국경선으로 넘어와서는, 그냥 사는 게 재밌어 보여서 놀러왔다고 말하면 거기 있던 게 누구였든 간에 기겁하면서 족치려 드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래서 대체 얼마나 죽인 겁니까?"

"그건 안 세봤는데. 성벽 넘고 나서도 합하면, 대략 서른 명 정도? 그 정도 잡아 족치고 나니까 더 이상 안 오더라."

꼭두새벽의 국경선에서 미지의 침입자를 막으려 다 모조리 갈려나간 무명의 로마군들에게 잠시간의 추모를.

물론 이페이아는 이 모든 게 오해였다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국경을 넘고 싶다고 해서 국경을 넘는 게 맞는 거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아무튼 그러고 나서 뭐, 어찌저찌해서 사자를 때려잡고 나니까 갑자기 유명인사가 돼서 떼돈 벌고, 그러다 추천 받아서 어찌저찌 로마로 왔지."

어째 정황을 보면 사자를 때려잡으라 보낸 게 아니라 사자한테 먹혀 죽으라고 투기장으로 보낸 것 같은데.

그러다 그냥 사자를 때려잡고 검투사가 되어버린 건가?

이게... 사람?

"그럼 참전은 어쩌다가 하게 된 겁니까?"

"게르만 애들이 강하다느니 뭐니 해내길래, 얼마나 강한지 궁금해져서 자원해봤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세지는 않더라고."

자발적으로 온 사람이라면 투지가 그리 약하지는 않겠지. 애초에 성격 자체도 싸움을 싫어하긴 커녕 좋아하는 편인 것 같으니, 사람 자체는 좀 부담스럽다고 해도 아군으로서는 괜찮지 않을까?

하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가치관 차이야 좀 무시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무튼, 나중에 너도 한번 콜로세움 와봐. 곧 있으면 전쟁도 끝날 것 같은데. 거기 볼 거 되게 많다고. 노예들이 막 수간도 해! 꼴린다니까?"

아니, 시발. 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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