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검투사 부대(4)
무표정한 얼굴을 새겨넣은 철제 마스크와, 경첩으로 연결된 원뿔형 투구.
그 밑부분에는 목을 보호하는 용도인지 철제 사슬갑이 드리워져 있었다.
철의 빛깔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다.
"이건 왜 투구에 가면이 달려있죠?"
“음?”
내 질문을 들은 테스티아는 투구를 잡아채곤, 잠시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가르가레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가르가레이? 그건 또 뭔데.
“없는 것 같습니다.”
"흠, 이걸 설명하자면... 대략 너 같은 자들로 구성된 부족의 이름이다. 그들 또한 동쪽에 산다고들 하지."
“예?”
“강인한 남전사들로만 구성된 부족이라는 소리다. 이 투구는 검투사가 가르가레이 역할을 맡고서 경기에 나갈 때 쓰던 물건이고 말이지. 그나저나 이건 본래 남자들 것인데, 왜 이곳에 있는 지는 잘 모르겠군. 어쩌다 섞여들어온 것 같긴 한데...”
대략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존의 남녀역전 버전 같은 건가.
마초적인 강간범으로 구성된 전사 집단만이 거주하는 섬이라.
그게 뭐지, 해병대의 섬? 악몽이 따로 없구만.
어쨌든 최소한 나름 실전에서 써먹긴 했다는 소리니, 못 쓸 물건은 아니겠지.
따라서 이 투구를 선택하는 것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들 중 가장 나은 것으로 보인다.
아직 바이저가 등장하지 않은 이 시대에 탈부착 가능한 안면 방어구는 상당히 귀한 것이니까.
물론 다른 투구 중에도 얼굴을 가리는 건 꽤 있지만, 걔네들은 항상 얼굴이 가려져 있다는 게 문제다.
나같은 일반인이 저런 거 쓰고 다니다간 머리에 열기 올라서 쓰러지기 딱 좋다. 괜히 중세 기사 헬멧에 바이저를 분리식으로 붙인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본디 가면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 쉬운 물건이다. 사람과 닮았지만 사람은 아닌, 마치 불쾌한 골짜기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물건이니까. 유스티티아의 법정에 들어서면서 그걸 확실히 느꼈다.
이런 약간의 기괴함에, 신무기의 위상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충격을 더한다면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혹시 소독약 같은 거 있습니까?"
"소독약? 식초에 가까운 포도주 정도는 있다. 혹시 어딘가를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남이 쓰던 가면을 그냥 쓰기엔 좀 그래서 소독하고 쓸려고 했는데, 젠장할 포도주하니. 안면갑은 나중에 물로 씻어서 쓰도록 하자.
일단 투구는 머리에 잘 들어맞았으니, 안면갑도 대락 잘 맞겠지.
이제 필요한 장비들로는... 로리카 하마타 자체가 어깨 보강용으로 사슬 한 겹을 덧댄 구조이니 어깨 보호대는 필요가 없고, 철제 정강이 보호대는 찾았는데 허벅지 보호대는 아무리 찾아도 도통 보이질 않는다.
사실 허벅지는 길게 내려오는 갬비슨 덕택에 가려지긴 하니까. 도끼나 둔기에 찍히는 게 아니라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방어구 외에는, 한손검과 버클러를 닮은 작은 방패를 하나씩 챙겼다. 혹시 쯔바이핸더를 손에서 놓치거나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런 최악의 불상사에 대비한 나름의 발악 같은 거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거의 죽는다고 봐야하겠지만.
"다 골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이없는 요구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진실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혹시 몰라 좀 과장되게 감사를 표하자 테스티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휘하의 병사한테 갑옷도 입히지 않고 싸우라 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나마 올라가는 걸 보면 역시 아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차가운 안개를 지나, 검투사들의 병영으로 귀환했다.
***
"옘병할 수온."
3월 초는 한창 수온이 좆같을 때이다.
얼어 있기엔 따뜻하고 피부와 접촉시키기엔 차가운, 바야흐로 계륵의 수온이라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그 물에 뭔가를 씻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 좆같음은 2배가 된다.
"온수 마렵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측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2세기 유럽에서 강물에 투구를 닦아볼 일이 살면서 얼마나 되겠냐고.
그리 잡생각으로 고통을 견뎌가며 세척을 끝내고, 갬비슨 옷 자락으로 가면의 물기를 닦아내 윤을 낸다.
생긴 거 보면 영화에 나오는 빌런 같기도 하고, 전국시대 사무라이 안면갑 같기도 하다.
"꼭 이런 이상한 거 쓰고 나오는 애들은 끝이 안 좋던데, 괜찮겠지?"
순간 영화 속 클리셰 아닌 클리셰가 생각나서 살짝 움찔했지만 곧 괜찮아졌다.
이게 뭐 소설이나 만화영화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 신경쓸 것은 이런 자질구레한 징크스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기에 그러했다. 근거없는 미신이 아닌, 현실적인 요소에 집중할 필요성이 있다.
"좋아, 상황을 정리해보자."
좀 침착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온 김에,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난 정줄 놓고 운전하던 트럭에 치여서 사망했고, 이후 남녀의 역할이 역전된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제국에 떨궈졌다."
여긴 남녀역전이 된 세계이다. 이것 하나는 매우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나 역전됐는지는 불확실하다. 이곳에 떨어져서 다른 남자들을 본 적이 없으니, 대체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가 없다.
"날 여기에 떨군 새끼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이고, 나보고 정의를 찾아오라며 권능을 하사하고는 사라졌다."
정의를 찾으면 21세기로 보내준다. 이것이 유스티티아와 내가 맺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구두계약일 뿐더러 당사자의 동의 따위는 구하지도 않고 체결된 불공정 사기계약이긴 하지만,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까.
아무튼 지금 확인할 것은 내가 받은 권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도와줘요 여신님.'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황금빛의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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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거래(Viri Sánguinum Artis)》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실현되는 축복. 영혼의 위상을 뒤바꾸는 매개체에 힘이 깃든다. 죄인을 검으로 살해해 영혼을 흘려보냈을 시, 일정 시간 동안 검을 통해 발현되는 물리력이 75% 증가한다.
(다음 단계 해금까지: 0/10)
{흉악한 죄인은 정의의 검으로 다스려 그 영혼을 내게로 흘려보내라. 내 친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줄 터이니.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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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족치고 검에 적시면 물리력이 75프로 증가라..."
애매하다.
죄인의 영혼이라니, 애초에 죄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게 로마 기준으로 죄인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현대 기준으로 죄인을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지금 로마는 노예가 합법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명백한 불법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노예주 아무나 잡아다 족쳐도 능력이 강화된다는 소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다음 단계 해금'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보아하니 죄인 10명을 죽이면 뭔가 능력에 변화라도 생기는 것일까?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악!!”
누군가가 대뜸 말을 걸었다.
근데 그게 존나 뜬금이 없어서, 거의 앉은 자리에서 10cm쯤 뛰어오르면서 비명을 질러버리고야 말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자, 익숙한 검은 색의 단발머리와 특이하기 그지없는 문신이 보였다.
"그, 그나저나 언제 이쪽으로 오신 겁니까? 근처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니가 혼자 앉아서 궁시렁대기에 뭐라하나 궁금해서 와봤지."
"인기척이 참... 없으신 모양입니다?"
“내가 원래 좀 그래. 그리고 그 이상한 말투 때려치워, 거슬린다."
이 라틴어 통번역 능력이 어떤 식으로 내 말을 변형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여자에게는 이 군대식 말투가 맘에 안드는 모양이다.
뭐, 쓰지 말라면 쓰지 마는 수밖에.
기왕 좀 격식을 낮춰 대하는 김에, 이 문신녀의 이름도 알아가는 게 좋겠지. 앞으로 같이 싸울 사이일 텐데 말이다.
"여튼, 이름이 뭡니까? 생각해보니까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죠."
"이페이아(Efeia). 우리네 여신의 이름을 딴 거야."
"우리요?"
"켈트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이페이아는 툴툴거리며 다리에 묻은 잔가지 등을 털어냈다.
"그러고 다니면 추울 것 같은데요."
"딱히."
대체 이 세상 어떤 인간이 이런 초인적인 추위 저항력을 갖고 있나, 또는 허세를 부리나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본래 사람이 저체온증에 걸리면 입술은 파래지며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손발은 벌벌 떨린다.
하지만 이페이아에게선 그런 위험 신호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외형적으로 신뢰가 가는 것이다.
이페이아는 허리를 쭉 피며 하늘을 보았다.
"안개는 짙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네."
"그거 참 좋군요."
비가 안 오는 하늘치고는 너무 어둑어둑한 게 아닌가 싶지만 이런 날씨가 갑자기 확 개일 확률도 만만치 않다.
21세기 현대인에 비하면 2세기 야만인의 날씨 판단 능력은 훨씬 뛰어날 테니.
이페이아가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사냥이나 갈려고 하는데, 따라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