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검투사 부대(1)
"자네, 드디어 깨어났군.”
낯선 목소리. 중저음에, 카리스마가 가득 담긴 여자 목소리다.
“국경을 넘어 병영에 침입을 했다지? 천막 속에 숨었다가 누워있던 군단병들에게 붙잡혔고 말이야.”
“…레일로프? 당신인가요?”
“레일로프? 흠, 아무래도 잠이 좀 덜 깬 모양이군.”
내가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빨리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자, 강렬한 빛의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을 굴리며, 상대의 신원을 파악해본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금발이 드문드문 섞인 갈색머리.
일단 확실한 건 아까 전 그 장교는 아니다. 물론 목소리부터가 꽤 다르긴 했지만, 확인에 신경을 기울인다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
그럼 이 인간은 누구지? 의무병인가?
"...그, 누구시죠?
"네가 앞으로 복무하게 될 검투사 타격대의 야전 지휘관이다. 타격대장이라고도 하지."
대장, 대장이라.
이런 시발, 또 장교야?
지금 이렇게 누워있을 상황이 아니다. 빨리 일어나서 경례를 해야한다. 근데 로마에서는 경례 어떻게 하더라? 난 관등성명 뭘로 하지? 타격대장은 계급이 어떻게 되지?
"어, 어, 음, 그, 소대장님? 소대장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똥줄이 타들어간 나는 최대한 황급하게 외쳤다. 그런데 이 장교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고... 그냥 '대장님'이나 ‘테스티아님’ 정도로 불러라. 그게 낫겠군."
손사래를 치며 편하게 대하라고 당부를 해댄 것이다.
군대란 조직이 이렇게 널널한 분위기일 리가 없는데 말이지. 어쩌면 날 시험에 들게 하려는 개수작이 아닐까?
"듣고 있나?"
"아, 예! 듣고 있습니다!"
잠깐 딴 생각하는 사이 뭐라 말했나 보다. 근데, 젠장할. 나 들은 게 전혀 없는데.
"긴장을, 좀 많이 했군. 그럴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혹사시킬 생각은 없으니."
그리 말하며 타격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대체 뭐야 이게.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거야?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대가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아, 그리고 그 검의 날은 네가 기절한 사이에 대장장이가 갈아놓았더군. 받아라."
테스티아는 그리 말하며 내게 남색의 검 가방을 건네고는, 의자 대용으로 쓰던 통나무에서 일어섰다.
"일단 병영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의무대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한기가 그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상쾌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멍한 정신이 좀 일반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그 덕택에 난 현 사태의 심각성을 아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야, 아주 좆되었구만... 아주 좆되었어..."
여신이란 작자가 죽은 사람 데려다가 재입대각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짬처리를 시키려 들어? 정의의 여신이 정의롭지가 못하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 존나 모순적이라고.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요구를 할 수가 있지?
물론 죽을 사람 살려준 건 고마운 일이다.
근데, 시발. 물에 빠진 사람 구해다가 굳이 호랑이 굴 앞에다가 갖다놓을 필요는 없는 거라고. 힘세고 강한 의지력으로 호랑이 굴에서 살아나오라고? 그래 뭐 그것도 가능이야 하겠지.
이론적으로는.
정의를 찾으라 시킬 거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철학과 출신 백수들 데려다가 싱크탱크 만들어서 찾게 시키면 되잖아. 그리고 게르만 때려잡을 사람 필요하면 전사한 특수부대 요원 아무나 주워서 여기로 보내놓던지.
게르만도 때려잡고, 정의도 찾아내라고? 그게 사람이 할 생각이냐?
그래, 난 삶을 강매당한 거다.
계약서도 뭣도 없는 염병할 구두계약 때문에 또다시 인생 종치게 생겼는데, 이게 부당 계약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심지어 갑이 신이라서 함부로 대들 수도 없고, 소송을 걸 수도 없다.
아니, 진정하자. 이건 생각해봐야 답이 없는 문제다.
일단 가장 주요한 목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두 번째 삶의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는 살아남은 다음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그리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먼저 좋은 아군을 만나야만 한다. 아군이 폐급으로 가득차 있다면 승리고 뭐고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테스티아의 탄탄한 허벅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벅지가 탄탄하다는 건 근육이 꽤 있다는 소리고, 그렇다면 체력이 좋다는 소리일 테니까.
철테를 두른 원형의 청동 방패는 등에 메어져 있고, 3개의 철제 버클러는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붉은색의 튜닉 위로는 반묶음으로 정리해 길게 땋은 뒷머리가 발걸음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방패만 4개를 찼다라…
검, 도끼, 창, 활 같은 제대로 된 무기는 하나도 없고 방패만 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이 참에 질문이나 좀 해봐야겠다.
"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음?”
“왜 방패 말고는 들고 다니시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난 방패를 제외한 어떠한 금속 무기도 쓰지 않는다."
"...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안다. 분명 이상하다 생각할 테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전장에서는 문제가 없을 터이니.”
방패만 쓰면서 싸운다고? 그게 말이 되나?
방패의 리치는 창은 커녕 단검 정도로 짧다. 그러니 무기 길이로 승패의 90%가 결정되는 전근대식 냉병기 싸움에서 방패만 쓴다는 건, 거의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근데 내 눈앞의 방패성애자는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지 않은가?
“그게… 가능합니까? 방패만 쓴단 말입니까?”
"라케다이몬의 딸은 그 어떤 물건도 무기로써 쓸 수 있어야만 하는 법이지."
방패만 들고 살아남았다라, 진실로 그러하다면 꽤나 믿음직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판단하는 게 맞을 것이다.
FPS나 RPG 게임 고인물들도 짱돌이나 맨주먹 같은 변태스러운 무기들로 학살을 저지르지 않는가. 그녀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은 극히 드물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세계대전에 우산 들고 참전한 인간도 있는데 뭐.
난 이어서 테스티아에게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특별히 검투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만든 이유가 있습니까?"
"게르마니아의 기후는 험난하다. 그 고난을 견뎌내면서까지 전투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허나 검투사들은 평생을 싸워온 자들이고, 제국에 대한 충성심도 높은 자들이지."
일종의 특수부대 개념인 모양이다.
재수가 없다면 지옥같은 훈련에 시달려야 할 테고, 재수가 좋다면 무난하게 묻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테스티아님도 검투사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노예는 아니다. 엄연한 자유인이지. 아직 시민권은 없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한동안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깨진 건 병영에 도착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사람이 없군."
타격대장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도착한 모양이다.
그녀의 말을 통해 짐작해보건데, 이 쬐깐한 공터가 타격대의 병영일 것이다.
병영의 모습은 딱히 별 거 없었다.
큼직한 모닥불 하나와 그 위에 올려진 큼직한 항아리, 그리고 그 주위로 배열된 텐트같은 외형의 천막, 이 세트가 쭉 일렬로 배열되어 한 10개쯤 있었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항아리 안에 든 죽 같은 걸 휘젓고 있는, 오른쪽 머리가 더 긴 단발의 여자 하나 뿐이었다.
근데 옷차림이 좀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옷을 거의 입지 않은 거지만.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는 2개의 긴 천 말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데, 드러난 흰색의 맨 살에는 흑청색의 문신이 가득했다.
나무인지 덩쿨인지 모를 기이한 문양은 팔다리와 배, 그리고 왼쪽 뺨까지 뻗어나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가슴은 크고 골반은 상당히 벌어진 관계로 난 내 하반신을 잠재우는데 갖은 노력을 써야만 했다.
하여간 갬비슨이 허벅지까지는 덮어주는 길이인 게 다행이지.
...안 춥나 저거?
"지금 애들 다 자, 테스티아. 아침 먹을때 다시 깨워 달라더라."
그 단발머리는 조용한 어투로 타격대장의 말에 대답했다.
"하여간, 게으름이란... 짐승 새끼들 같으니."
대체 왜 한낱 병사가 장교한테 반말을 까는지는 이해가 안 갔지만, 테스티아 본인은 별로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원래 알던 사이라서 그런가?
"기상-!!!"
테스티아가 냅다 소리를 지르자, 병영 전체로 함성이 울려퍼졌다.
젠장할. 내 고막 터지는 줄 알았다. 뭔 소리를 이따위로 크게 질러?
그나저나 이 사자후가 효과가 있긴 했는지, 천막 속에서 각각 여덞 명 가량의 사람들이 슬슬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약간 변색된 흰색의 긴팔 튜닉을 입었고, 어깨에는 천으로 된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인가?
아직 3월 초니까, 충분히 추울만 하지.
좀 특이한 점은 천으로 된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 입지 않은 사람은 그 단발머리와 테스티아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로마인들은 바지를 입지 않았을 텐데... 근데 또 생각해보니 로마군이 원래 이것저것 베껴서 잘 써먹는 건 잘하지 않는가.
시민들은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군인들은 북부 전선에서 바지를 일종의 방한용 의복으로 입고 다니는 모양이다.
-으으, 추워. 망할 게르마니아 놈들 같으니라고.
-젠장할, 집에 가고 싶어.
-흐아암...
총 인원 수는 30명이고 전부 여자다.
잠깐만, 뭐? 날 그냥 진짜로 여군 한복판에 처넣었다고? 돌아버린 건가?
"저, 그... 대장님? 제 배치가 잘못된 게 아닌지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테스티아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배치는 이곳이 맞다."
정말 병력 부족한 거 메꿀려고 아무나 잡아넣은 모양이구만.
하긴, 원 역사의 로마 제국엔 여군이 없었으니 이 세상에는 남군이 없을 것이다. 아까 전에 그 장교도 그렇다고 했고. 그러니 남군 전용 숙소도 없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
근데 여자고 나발이고 어째 분위기가 음울하고 비통하기 짝이 없다.
얘네들 용맹하다며.
"어, 음... 근데 원래 여기 이런 분위기입니까?"
"아니, 로마 있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지. 그나저나 대장, 쟨 누구야?"
난 분명 타격대장에게 물어본 건데 대답한 사람은 그 단발머리 문신녀였다.
아마 이 타격대장이란 작자가 휘하 병사들의 머리통을 열심히 쥐어박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대장!"
"하여간 이 망할 것들이 정신이 다 나가서는... 뭐지?"
"쟤는 왜 데려왔어? 성노예야?"
내가 지금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걸 시원하게 뿜어냈을 것이다.
씨발, 뭐? 성노예? 대체 나의 어딜 봤기에 성노예로 착각하는데?
"...아니, 그딴 게 아니다. 그리고 이 망할 인간들이 좀 한 자리에 모이는 걸 도와줬으면 좋겠군."
다행히도 타격대장은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그나저나 나보고 현지에서 차출한 신병이라고 둘러대는 걸 보면, 쓸데없이 분란 일으키지 말고 대충 묻어가라고 지시를 받은 모양이다.
군대의 음습한 특성이 내게 도움을 준 최초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
한편 모닥불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앉자 타격대장은 나보고 똑바로 서 있으라며 언질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집중. 할 말이 있으니 주목하도록."
테스티아는 목을 가다듬었다.
"너희가 모두 알듯이, 3일 전 대규모 식중독 사태가 터져 우리 백인대에서만 48명이 쓰러져 의무대로 실려갔다.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 매우 좋지 않은 일이다."
음, 식중독이라...
그건 좀 불길한데. 고대시대에 식중독 걸리면 그냥 죽는 거 아닌가?
나도 저 죽 같은 거 먹고 앓아눕는 건 아니겠지?
"그리하여 우리 부대는 현지에서 차출한 병력을 규합하는 역할의 최전선에 서기로 했다. 하지만 염려치 말라! 그들은 이미 로마에 충성을 바치겠다 신께 맹세한 자이니, 저들이 굼벵이의 뇌를 갖추지 않았다면야 너희들을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
타격대장 테스티아는 상당히 용맹한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나갔다.
근데 어째서인지 영화 어딘가에서 본 스파르탄 왕이 생각나는 목소리인데 말이지.
"자, 너희들 눈 앞에 보이는 이 사내가 우리의 동료가 되어 같이 싸울 신병이다. 그러니까 이제 좀 최소한의 정신줄은 붙잡고 살기를 바란다, 이상."
그때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고, 그걸 본 타격대장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임마."
"대장, 질문이 있어. 쟤 성노예야?"
에라이 옘병.
벌써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들었는데,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다.
내 옷은 선정성과는 200광년쯤 떨어진 근본의 중세식 패션이란 말이다. 이거 그냥 옷 같아 보여도 나름 갑옷이라고.
"아니, 그냥 신병이다. 시민은 아니라더군."
"간만에 남자 좀 따먹나 싶었는데, 제기랄. 이 망할 놈의 군대가 우리한테 남창을 배분해줄 리가 없지."
이번엔 침을 삼키다 뿜을 뻔 했다. 뭐 로마 제국이 여러모로 개방적이긴 했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심지어 타격대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발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잠깐만 대장. 신병이 쟤 하나라고?”
“그렇다.”
“하, 씨발 진짜. 이러다 다같이 좆되게 생겼네. 48명이 빠졌는데 들어온 건 한 명이야? 그것도 남자?”
-보조군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뭐야 이게?
-그래도 키는 더럽게 크네. 우리보다도 큰데, 잘 싸울 수도 있잖아?
-남자는 남자지 임마, 키가 크다고 해도 여자보단 못하다고.
-아니, 저 정도면 웬만큼 큰 정도가 아니잖아? 일단 좀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퍽이나.
"...흠, 신입? 적당히 네 소개나 해봐라."
어째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내 심장이 다시 한 번 심부전의 위기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러다 진짜 심장병 걸리겠네 젠장할.
"어, 음... 예, 이번에 로마를 위해 복무하게 된-"
"야, 신병. 그 가방 안에 담긴 게 뭐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단발머리 여자가 내게 물었다.
예의가 좆도 없지만 그렇다고 화내는 건 미친 짓이겠지.
이걸 말로 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임팩트가 떨어지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난 등에 걸쳐 맨 길쭉한 천가방을 열어 대검을 꺼냈다.
-뭐, 뭐야 저건. 창이야 검이야?
-저런 거 본 적 있냐 너희들? 야, 코페시! 이집트에는 저런 거 있어?
-이집트도 사람 사는 동네야 임마. 그리고 저기 든 게 설마 검이겠냐? 아마 특이하게 생긴 단창, 뭐 그런 거겠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이게 검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고 반신반의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여기서 그 실체를 드러내면, 그런 논란 따위는 눈 녹듯 사라지리라.
두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스릉
그러자 속칭 귀르가즘이 느껴지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의 길이만 무려 135cm에 달하는 러시아산 강철검의 위용 앞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쯔바이핸더 쇼크 현상이라 명명해도 될 것이리라.
난 최대한 멋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검의 정체를 소개해주었다.
"이건 동방에서 쓰는 무기인 쯔바이핸더란 겁니다. 동토의 강철로 빚어진 양손검이죠."
약간의 허풍을 섞는 건 주의 집중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주 구라도 아니다. 러시아제니까 뭐 러시아산 철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동방의 대한민국에서 내가 간간히 수련용으로 썼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말고도 이런 거 가진 사람들의 수가 꽤 된다고. 한 30명쯤?
-뭐? 검을 양손으로 쓴다고? 차라리 쌍검을 쓰고 말지!
-방패를 안 쓰고 싸울 정도면 전신에 철갑옷을 둘러야 할텐데, 쟤가 입고 있는 건 그냥... 좀 두꺼운 옷 아니야? 뭐 따뜻해보이긴 하는데 말이지.
-엄청 빨라서 다 피하기라도 하나?
-단창이라 한 새끼? 나와?
웅성거림이 상당히 심화되었다. 일단 확실히 이목을 끌기는 한 모양이다.
...근데 이게 어쩌면 나쁜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솔직히 난 고대 로마 검투사들에게서 쏟아지는 미친듯한 기대감을 견뎌낼 자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일단 저 대장이라는 인간은 괜찮아 보이니, 그녀로부터 정보와 조언을 얻는다면 군생활이 꽤나 괜찮아지지 않을까?
"자, 자, 조용! 난 지금 가야할 곳이 있으니, 그동안 신병한테 이상한 짓 말고 얌전히 있도록."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