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지고한 자(2)
"…예?"
아니, 염병.
그게 대체 뭔 개소리야.
정의? 정의를 찾으라고? 정의를 어디가서 찾아?
"[설명을 원하는가?]"
유스티티아는 내 표정으로부터 속내를 읽은 것인지 부가설명을 시작했다.
"[그대는 똑똑히 들으라. 나, 유스티티아는 정의의 여신이며, 또한 법정의 주인되는 자이다. 동시에 그 권세가 별과 혼돈, 심연과 비현실의 너머에까지 미치는 존재이며 너를 확률장 균열 너머에서 이 세상으로 데려온 자이다. 이해했는가?]”
"대...략 이해했습니다."
정확히 뭔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귀납법 비슷한 뭔가를 한다는 말 같아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가 이리 행한 이유는, 나의 복리후생을 위함이다.]"
"아, 그렇…군요?"
이건 또 뭔 소리지, 내게 지 일을 떠넘기겠단 작정인가?
난 저 인간, 아니 여신이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무턱대고 받아도 되는 건가?
"[네 임무는 정의의 파편을 모아 그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궁극의 원천을 현실의 세계에 구현해내는 것이다.]"
“파편…? 아니, 그,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설명을…”
분명 안대로 눈을 가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눈이 흉흉한 기세로 날 노려보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마 이 상태가 여신의 분노 1단계, 그즈음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여기서 여신이라는 자의 분노를 더 돋구는 것은 결코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다.
“[정의의 파편은 특정한 부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현실에 구현된 개념의 파편들이지. 궁극의 체제에 반하는 것들, 그리하여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의 모든 요소들 말이다. 이를 이용해 추론을 해 되짚어나가거라.]”
“아직, 이해가 잘-“
“[됐다, 조용히 해라.]”
잠시 생각에 잠긴 것인지, 유스티티아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묵했다.
그러다 대략 10초 정도가 지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욕심이 너무 컸던 모양이로군. 일단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일 터.]”
그러며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붙이더니,
-딱!
손가락을 튕겨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크나큰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내 이마가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딱밤의 고통 말이다.
"악!!"
진심 과장 안하고 이마가 한 3센치는 부어오른 기분이었다. 어째 체온이 좀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거지같았다.
"[진정하거라, 네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도와줘요 여신님'이라고 한 번 크게 외쳐봐라.]"
도와줘요 여신님이라니. 지금 눈앞의 여신이 날 보고 장난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까짓 거 한 번 해보지 뭐.
"도, 도와줘요 여신님!"
-띠링
그러자 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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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한 자들의 요구》-[열람]
《지고한 자들의 축복》-[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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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상태창?
근데 내 스탯이나 능력치 같은 걸 보여주지는 않는 것 같은데. 용도가 뭐지.
일단 지고한 자들이라는 건 아마 신들인 것 같다. 지금이 로마 시대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렇다면 첫번째 항목에는 저 여신이 내게 한 말이 적혀 있는 건가?
난 추측이 맞나 틀리나 확인하고자, 첫번째 항목의 열람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또다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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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정의를 찾아서(In Qvaero Ivstitiae)》
과로에 시달리던 정의의 여신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 그대는 삶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사건들로부터 정의의 파편을 찾아, 그 실체를 조립해야만 하리라.
{나의 편안과 휴식을 위함이라.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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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내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 망할 여신이란 새끼는 지가 처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 띵가띵가 놀 작정인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내가 다시 살아난 거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직무유기가 직무유기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 조용히 불평을 내뱉으며, 창 우측 상단에 있는 X버튼을 눌러 처음의 상태창으로 되돌아가 두번째 항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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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축복(Benedictio Ivstitia》
여신의 사도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부여된 축복. 여신의 의지로 조형된 축복이, 그대로 하여금 신비의 본질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도와줘요 여신님'이라고 한 번 외쳐보아라.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로마인의 특권(Romanorvm Privilegia)》
로마인의 특권을 얻는 축복. 그대는 라틴어를 듣고 읽으며 쓰고 말하는데 어떠한 지장도 겪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납의 독성에 온전한 면역을 띄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미래의 역경을 견뎌낼 힘을 주리라.-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피비린내 나는 거래(Viri Sangvinvm Artis)》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실현되는 축복. 영혼의 위상을 뒤바꾸는 매개체에 힘이 깃든다. 죄인을 검으로 살해해 영혼을 흘려보냈을 시, 일정 시간 동안 검을 통해 발현되는 물리력이 75% 증가한다.
(다음 단계 해금까지: 0/10)
{흉악한 죄인은 정의의 검으로 다스려 그 영혼을 내게로 흘려보내라. 내 친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려줄 터이니.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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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이리 많아?"
여러모로 많은 정보량을 마주한 나는 꼼꼼히 상태창을 읽어보았다.
본래 사람이 악마나 악마 언저리 비슷한 애들이랑 계약하는 이야기들에선 항상 악마가 계약서에 이상한 함정을 숨겨놓지 않던가. 그런 일만은 피해야 한다.
근데 딱히 이상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정의의 여신은 정의의 여신이라는 것인가?
"[보아하니, 의심이 많은 자로군?]"
그나저나 내 감정 숨기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뭔 말도 안했는데 생각을 알아챈다냐. 역시 신은 일반인과는 다르다 이건가.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닙-"
"[난 곧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니, 질문이 있으면 빨리 하도록.]"
이 거지같은 새끼는 사람을 납치해온 주제에 뻔뻔하게 지가 갑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 목숨 살려준 건 고맙긴 한데, 사람을 빡돌게 하는 뭔가가 있단 말이지.
그래, 따지고 보면 난 삶을 강매당한 거다.
하지만 솔직히, 다시 죽고 싶지는 않다. 기왕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그러니 쓸데없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느니 실리적 질문을 하는 게 몇 배는 더 나을 것이다.
"이 상태창 띄울려면 무조건 주문을 외쳐야 하는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저 속으로만 외쳐도 작동할 것이니라.]"
이건 확실히 다행이다. 마법 쓰는 걸 온 동네 사람들한테 다 알릴 필요는 없지.
난 재빨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여기는 남녀역전 세계, 뭐 그런 겁니까? 군인들이 죄다 여자던데 말이죠.”
이에 유스티티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남녀역전이라... 재밌는 표현이군. 직접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
애매한 답변이라. 일단 맥락을 통해 짐작하건데, 여긴 기계적인 남녀역전 세계나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남자가 여성용 속옷을 입는다거나 하는 그런 거지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짐작하는 게 맞겠지.
"[질문은 끝난 모양이군. 슬슬 널 돌려보내는 게 좋겠지. 네게 역할이 부여된 곳, 과업을 수행해야 할 곳으로.]"
"아, 아니 잠깐만!"
뭐야, 뭐 갑자기 이래?
내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유스티티아가 탈주를 시도하려 들어 말로써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못 들은 것인지 뭔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은 관계로, 난 재빨리 떠오르는 질문을 말했다.
"그 정의의 파편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찾습니까? 그리고 만약 다 찾으면 어떻게 조립-"
"[가라. 나의 예정된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
-딱!
여신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내 앞엔 한 점 빼고 온통 암흑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어둠의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었다.
깊은 구덩이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육신으로 영혼이 들어가는 모양이지.
난 이제 난 생애 두 번째 군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좆같기 그지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 선임들 중에 폐급이 없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