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지고한 자(1)
“…내가 지금 또 죽은 건가?”
눈을 뜨자 또다른 미지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뭔가 좆 같은 일이.
손발이 다시금 벌벌 떨리고 있지만, 일단 주위를 둘러볼 필요성이 있다. 여기가 뭐하는 장소인지도 모르고서 내 현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큼직한 전당이었다.
아니, 정정한다. 전당이라기 보다는 법정이라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반원형의 큼직한 원형 계단들은 4분할의 구조로 쪼개져 내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그 관람석들에는 흰색 가면을 쓴 석상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누렇게 변색되거나 갈라진 것도 있었고, 아직은 하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하나같이 새카만 튜닉을 걸치고 있었다. 어떠한 장식도 없었고, 장신구를 낀 석상 또한 없었다.
하지만 가면에 묘사된 얼굴들은 모두 달라 그중 같은 것이 없었다.
어떤 석상은 웃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어떤 석상은 기괴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상의 자세는 모조리 똑같았다.
모든 석상이, 정자로 허리를 세우고 곧게 앉아있는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표정이던 웃고 있는 표정이던, 자세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석상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뭐, 뭐하는 데야 여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비주얼들이다. 심지어 가면 밑의 눈은 그림자 때문에 하나같이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목덜미에 거미가 기어가는 듯한, 섬뜩한 느낌.
소름이 돋으며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딴 게 병영 안에 있는 공간일 리는 없다. 효율의 극한을 추구하는 군대에서 굳이 석상을 들여놓는 미친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긴 뭐하는 공간이야 대체? 어느 미친놈이 만들어놨길래 인테리어가 이 모양인 거지?
아니, 어쩌면 실재하는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나의 극단적인 스트레스가 창조한 기괴한 악몽 속 세계일지도 몰라.
그러니 일단 내 볼을 최대한의 힘으로 꼬집어 보자.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꿈 속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랬다간 잠에서 깨고 말 테니까. 따라서 볼이 아프지 않다면 이건 잠시 기절해서 꾸는 꿈이 되는 것이고, 볼이 아프다면 꿈은 아니라는 거다. 아마 둘 중 하나겠지.
내가 또다른 미지의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거나, 내가 하루에만 두 번을 죽는 기염을 토해서 사후세계에 온 것이거나.
-꼬집.
“악.”
좆됐네.
이건 결코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겠지.
밀려오는 의문과, 석상들의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시선을 피하고자 뒤를 돌아보았다.
일단 높은 단상이 보였다. 법정에서 판사가 앉아있을 법한, 그런 위치와 높이를 가진 단상 말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넓다란 탁상과 화려한 의자, 그리고 큰 키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안대를 쓰고 있었고, 흰 색의 튜닉 위에 어두운 적색의 토가를 걸치고 있었다. 서서히 갈변되어 가는 피의 색깔이 꼭 저렇지 않을까 싶다.
탁상 위에는 한 자루의 청동 저울이 놓여있었다.
안대와 저울이라. 이제야 대략 감이 좀 잡히는구만.
비록 검은 없지만, 이 정도면 정체를 추측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종교로써의 효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까지 살아남아 상징으로 쓰이는 거의 유일한 이교의 여신.
거의 모든 나라의 대법원 앞에는 안대를 차고 저울과 검을 든 여신의 동상이 서있다.
안대는 공평을, 저울은 공정을, 검은 엄벌을 상징한다고 하던가?
물론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경우엔 안대도 없고 검도 없지만 말이다.
근데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딴 시시콜콜한 정보는 그닥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것은, 저 키가 더럽게 큰 여신한테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냐는 거다.
이 염병할 법정의 정신나간 인테리어만 봐도 부담감이 미친듯이 누적된다고. 대체 왜 법정을 이따위로 꾸며놓은 건데? 도대체 왜?
“[그대는 낯선 이를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군. 그것이 네 고향의 예법이란 말인가?]”
중저음의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거기에 끔찍할 정도로 예스러운 말투. 유스티티아가 첫번째로 내뱉은 말이었다. 여신의 말에 법정 전체가 메아리치며, 내게 질문을 몇 번이고 되묻는 듯 했다.
대답... 대답이라.
대체 어떤 식의 대답을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법정에 기괴한 조각상을 세워놓는 이상한 여신의 비위를 맞출 수가 있을까?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요?”
어, 시발.
생각을 그대로 말로 내뱉어 버렸네?
“[음.]”
유스티티아도,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할 말이 없었으니까. 지금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거라고는 기괴하고 뒤틀린 공포스러운 망상들 밖에 없다.
산 채로 석상이 되어가는 기분은 어떨까? 매우 좆같은 기분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면 그걸 파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
저기 가만히 앉아있는 여신이 갑자기 일어나서 칼을 뽑아들고 날 족치려 든다면 어떨까? 그럴 능력이야 분명히 있을 거다. 신화 속 유스티티아의 인성은 어땠지? 대다수의 다른 새끼들마냥 씹창이 나 있었던가?
아니, 아니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 아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유스티티아의 인성은 어땠지?
...떠올려봐 시발! 어렸을 적에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을 떠올려 보라고!
"[...심히 흥미롭군.]"
하지만 내 망할 머리가 유년시절의 케케묵은 기억을 뒤져내 답을 도출해내기 전에, 유스티티아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어버리고야 말았다.
“[흥미로워.]”
유스티티아는 조금도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어떠한 미동도 없는, 약간은 비인간적이라고도 느낄 수가 있는 목소리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비인간이 맞기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내게는 파국으로 치닫으려 하는 이 상황을 수습할 필요성이 있다. 자칫하다간 2회차 인생이 삭제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늦기 전에 대답하는 게 좋겠지.
"신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예법은 조금 서툴 수도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죠."
"[알고 있다.]"
참 무뚝뚝한 여신이구만. 난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건가?
에라이, 몰라. 신들이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난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다고.
"그나저나 왜 제가 여기 있는 건지…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괜히 무서워서 말 빙빙 돌려 하다가 자칫하면 어떠한 소득도 못 얻는다. 그러니 일단 궁금했던 것 먼저 밀고 나가자.
“[그대가 이곳에 있는 것은, 그대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이유가 뭡니까? 게르만에 맞서 로마를 지키란 겁니까?”
“[아니다.]”
“그럼, 뭡니까?”
또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내 정신세계에서는 연쇄적으로 사고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정의의 여신이라는 존재가 일개 인간에게 요구할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게 대체 얼마나 빡센 난이도를 지닌 임무일지에 대해서.
무수한 생각이 잇다른다.
무슨 괴물의 목을 따오라고 시키기라도 할려나? 사실 확률적으로 보자면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은 일이긴 하지.
신화 같은 거에서 신들이 인간 부려먹는 경우의 한 99%는, 결국 다 괴수나 괴물같은 거 잡으라고 짬처리 시키는 거니까.
하지만 그럴 거면 왜 하필 날 데려왔지? 난 검술계에서 그랜드 마스터도 뭣도 아닌데?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쩌면 딱히 심각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는 게 무료해서 광대 비슷한 존재를 고용한 필요가 생긴 걸지도 모르지. 근데 그럴 작정이었으면 아예 코미디언을 불렀겠지, 왜 날 불러?
70억 인구 중에 하필이면 날 불러서 맡길만한 임무라.
그게 대체 뭐지?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유스티티아가 입을 열었다.
“[정의.]”
그러고는, 과업을 내렸다.
“[정의를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