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당혹의 극치(2)
"아, 아니 잠깐만, 진정하시죠. 일단 진정을 하시고, 그… 고작 실수로 다리 하나 걷어찬 거 가지고 무슨-"
"뭐? 고작? 넌 로마 시민을 폭행한 죄를 '고작'이라는 수식어로 덮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어?"
강압적인 태도로 날 몰아세우는 장교라…
솔직히 지금 뇌가 약간 멈춘 것 같다. 머리 속이 새하얘진다는 게 이런 건가?
"어, 어, 음, 그럼 최소한 변호인이라도-"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건 로마인뿐이다. 그리고 네가 로마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이 되었으니, 넌 이제 죽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염병할 고대 노예제 사회의 법률 같으니라고, 이딴 걸로 사형을 때려?
물론 병영 무단침입은 큰 죄가 맞긴 한데... 난 정신 차려보니 여기 있었던 거라고! 그 말 듣지 않았었나 분명?
"경비병! 일단 저 자를 영창에 집어넣어라. 형을 언제 어떻게 집행할지는 곧 정해 공지하겠다."
백인대장의 부름을 들은 병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이거 어째 시발, 좆된 것 같은데?
자, 자, 진정하자. 분명 뭔가 방도가 있을 거야. 그래, 거래를 하는 거야. 날 살려놔야 할 이유를 찾아보자.
내가 무슨 삶을 살았는지 돌이켜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이다.
일단 난 검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략 3년의 시간 동안 쯔바이핸더를 다루는 법을 배웠으니, 이 정도면 애호가의 반열에는 확실히 든다고 말할 수 있겠지.
...가만, 검술?
"잠까아안!!"
내 외침에 천막 안에 있던 모두가 날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처음보는 외국인 죄수가 냅다 소리를 지르면 이렇게 반응하는 게 당연한 노릇이긴 하겠지. 하지만 그게 내 말을 막진 못한다.
"전 단순한 민간인이 아닙니다! 군대, 육군 출신이고, 검술도 할 줄 안단 말입니다! 그리고 군인으로써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데, 제가 한 어떤 일에도 고의성은 없었습니다! 숲에서 길 잃고 헤메다 실수로 들어온 거라고요!!"
이게 뭔 궤변이냐 싶겠지만, 로마는 본디 명예와 군공을 중시하는 자들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러니 그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을 가벼이 여길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의 손은 반응이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하질 않았었으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이건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
백인대장은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게르만이 아니니 적군은 아닐 것이고, 로마인이 아니니 아군도 아니군. 제 3의 군대에서 온 군인이 '실수로' 병영에서 난동을 피웠다라, 이건 참 드문 일이군 그래."
그러고서는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짜증을 담아 되뇌였다.
"...하, 젠장할. 고의성이 없다고? 이거 상부 올라가면 볼만해지겠군."
대충 장교의 고뇌, 뭐 그런 거겠지. 내 알 바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군 장교가 입을 열었다.
“다들 나가라.”
가볍게 목례를 올린 병사들은 순식간에 천막 밖으로 사라졌고, 장교는 깃 달린 투구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널 사형에서 면제시키려면 네 신변을 명확히 처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보증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이 신변의 문제라는 건 아마 국적 불명의 병영 침입자를 포로로 취급할 것인지, 아님 제대로 된 손님으로 취급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이성적으로 이해는 가는데 그렇다 해서 딱히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애초에 이세계 환생은 전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너와 나 모두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지."
장교는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와 내 동료들이 이끄는 군단병들을 지원하는 타격대의 일원으로써, 게르마니아 야만인들과 싸우는 것을 도와라. 그럼 넌 죄를 씻고 로마의 시민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
"이 전쟁은 끝을 향하고 있다, 외국인. 도합 12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지. 야만인들을 모조리 격퇴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잠깐만, 설마 지금 저보고 입대를 하란 소리를 한 겁니까? 모르는 사람 막 군대에 집어넣어도 되는 것 맞아요?"
"현지에서 재량껏 병력을 차출하는 것일 뿐이다. 병력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니."
난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을 수 없는 건 내 눈도 매한가지였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러했다.
맙소사, 재입대라니. 이게 말이나 돼?
물론 아까 전에 내가 군인 출신이라고 말을 해놓기는 했지. 근데 시발, 이러면 안되지.
"넌 이제부터 로마에 대한 동경과 경도심으로 똘똘 뭉쳐 라틴어를 배우고 자원입대한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약…한 사내의 몸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의무를 다해 시민의 권리를 얻고자 용맹히 싸우게 되는 것이지."
한창 말하다 말고, 장교는 잠시 내 몸을 쭉 훑어보았다. 연약한 남성의 몸…이라고 하기엔 키가 좀 큰 편이긴 하지. 184cm니까.
근데, 의무?
의무는 개뿔. 난 내 삶에서 충분히 의무를 다하고 살았다. 그 빌어처먹을 1년 반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는데 날 또 군대에 처넣으려고 들어?!
난 이 고대의 군대가 장병들에게 그리 좋은 생활 수준을 제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21세기 군대도 그 지경이었는데 뭐.
이 사악한 재입대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약 입대하지 않는다면?”
"이에 응하지 않겠다면 로마의 국경 밖까지 데려다 줄 수는 있다. 허나 우리가 널 네 고향까지 인도할 의무는 없으니, 그 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음, 근데 여기 기준으로 국경 밖은 게르마니아 영토가 아니었던가?
"어, 여기 바깥은 야만인 영토 아닙니까?"
"그건 네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빡이 치지만, 사실이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포로로 잡히면 안될까요?"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단 뜻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정리하자면 재입대와 국경추방, 노예화 셋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소리.
일단 게르만족한테 잡히면 이렇게 호의적으로 대해줄 리는 없고, 바로 목이 잘리거나 노예가 되겠지.
결국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노예가 되는 것과 노예가 되는 것과 노예가 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비무장 노예보다는 무장 노예가 나을 것이고, 야만인의 노예보다는 로마의 노예가 나을 것이다.
"하, 씨바."
그러니 이 상황에선, 난 재입대를 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2천년 전 군대에 재입대를 하라니. 참으로 역겹고도 아니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로마군에서 남군…을 뽑는 게 맞습니까? 여기 보니까 죄다 여자들밖에 없던데, 남자가 입대해도 되는 게 맞는 겁니까? 정말?”
“물론 정식 입대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군인을 도와 군공을 세운 자라면 보상을 받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도 위대한 아우구스타께서 내리시는 보상 중에 하나이지.”
약간 용병 비슷한 느낌으로 입대시키는 건가.
"그나저나 전 지금 무기가 없는데, 혹시 뭐라도 대여해줍니까?"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갬비슨과 가죽 건틀릿은 나름의 갑옷이라고 쳐도, 무기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로마의 군인들은 자신의 무구를 사비로 구입해야만 했다. 여기가 남녀역전세계의 로마라는 가설이 맞다면 비슷한 규칙이 적용될 것이고.
하지만 장교의 입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무기가 없다기보단, 잃어버렸단 표현이 알맞을 것으로 아는데."
"...예?"
백인대장은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일전의 그 여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검을 가져오거라!"
이윽고 그 심부름꾼 노예는 두 손에 뭔가 긴 것을 얹은 채 나타났다.
아주 낯이 익은 흑청색의 천 가방이었다.
"뭐야, 저것도 같이 왔어?"
저 익숙한 실루엣을 가지는 물체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이다.
검술 협회에서 만난 친구가 만들어준, 쯔바이핸더 전용 검 가방.
쯔바이핸더도 주인 따라 이세계까지 온 모양이다. 잘 관리된 검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단 격언이 여기에 통할 줄은 생각치도 못했는데 말이지.
어쨌든 잘된 일이다.
진가검이고 스테인리스 강철 제질이니, 날만 제대로 갈면 아마 이 시대 어느 검보다도 강한 검이 될 테니까.
-스릉
한편 검집을 꺼내든 로마군 장교는 그 특유의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았다
그러자 140cm에 달하는, 물결치는 형태의 기다란 검신이 그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리카소(검신의 뿌리 부분) 위에 튀어나온 패링 훅과 부드러운 곡선의 크로스가드, 그리고 마늘형 폼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하, 이렇게 긴 검이라니. 차라리 창이라고 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군. 이게 네 검인가?"
"예. 그나저나 이건 어디서 찾은 겁니까?"
“네가 무단 침입했던 그 천막에 남겨져 있었다는군.”
장교는 내 쯔바이핸더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흥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모습이 꼭 검을 산 직후의 내 모습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조국의 군사는 이렇게 긴 검을 한 손으로 들고 싸우는 건가?"
어째 대한민국의 군대에 대한 오개념이 잡혀버린 것 같은 모양새지만 굳이 현대 무기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거 양손검인데요."
"...그렇다면 방패를 드는 자는 따로 있는가?”
"방패 같은 건 안 씁니다."
"방패를 안 쓰고 전투를 한다고? 대체 어떤 식으로 싸우길래 방패를 쓰지 않는단 말이지?"
“어… 반자동 휴대 발리스타 같은 걸로 싸우긴 하는데 말이죠…”
장교는 심히 흥분해 있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 시대에 장검이라 불리는 물건은 기병용 한손검, 스파타 정도이었을 테니.
고로 로마군이 이 대검을 바라보는 시선은 현대 보병이 휴대형 핵로켓 발사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검, 날이 서있지 않군. 일종의 둔기류 비슷하게 사용하는 건가?"
"훈련용 도검이라서 그럽니다. 그래도 날을 갈면 그냥 일반적인 검처럼 쓸 수가 있을 겁니다."
사실 일종의 하프소딩 검술을 쓰면 둔기처럼 사용할 수도 있긴 하지만,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훈련용 검을 철로 만든다라? 네 고향은 철이 아주 많은 모양이군 그래. 어쨌든, 이 검은 너에게로 넘기도록 하지. 한 가지 조건만 만족한다면 말이야."
"뭐 맹세 같은 걸 해야 합니까?"
"오, 감이 좋은 친구로군."
이 상황에서 더 할 일이 뭐가 남아있겠냐는 뜻으로 살짝 비꼬려고 한 말인데, 그 속뜻이 잘 전달이 안된 모양이다.
눈치없는 새끼.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께 맹세해라. 이번 게르만과의 전투에서 로마의 영광을 위해 싸움으로써 자신의 의혹을 씻어내겠노라고."
음, 이만하면 비교적 간단한 맹세다.
하지만 악용될 여지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그, 다 좋은데 정확히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명시해놓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지?"
장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야만인들이 한두번 반란 일으킬 것도 아니고,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분쟁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나가서 싸울 순 없잖습니까?"
"하, 생각보다 잔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었군.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내 제안이 그리 터무니없는 유형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백인대장은 한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 15초즈음 지났을 무렵 그녀는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철인황제, 마르키아 아우렐리아, 임페라토르이자 아우구스타의 후계이신 황제 폐하께서 전선에서 물러나시는 날까지 싸우도록 해라. 만일 유의미한 전공을 세운다면 그 즉시 복무를 중단할 수 있게 해주지. 정 못믿겠다면 나 또한 신들께 맹세하겠다."
게르만과의 전쟁, 마르키아 아우렐리아, 거기에 철인황제라.
여러가지 정황상 근거로 따져봤을 때, 이 여제라는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여성화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
비록 내가 로마사 관련해선 아는 게 쥐뿔도 없긴 하지만 이 정도면 뭔 상황인지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
슬슬 오현제 시기가 막을 내리고 곧 있으면 내전이 터지는 심히 엿같은 시점의 로마로 온 모양인데...영 좋지가 않다.
그래도 로마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졌다면 오현제 시기가 끝나자마자 로마가 망했을 테니 일단 이 전쟁 자체는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물론 이 세상은 내가 살던 세상과는 여러모로 다르니, 역사의 흐름이 동일하게 돌아갈지는 알 수가 없다.
"휴, 젠장할."
그나저나 내 입으로 재입대를 하겠다 선언하라니, 끔찍하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그나마 나은 선택인 것을.
난 참담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 철인황제 마르키아 아우렐리아께서 전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로마를 위해 게르만과 싸울 것이라 맹세하며, 이 결의를 정의와 공정의 여신 유스티티아께 바칩니다."
그러자 약간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찰칵
진실의 손에 내 손을 고정하던 수갑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풀려난 것이다.
"뭐, 뭐야. 누가 풀었-"
내 독백에 장교가 뭐라 대답을 한 것 같았지만 난 그 내용을 듣지 못했다.
느닷없이 시야가 흐려지며 땅이 날 향해 맹렬히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무슨?"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정체를 알아낼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중력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난 또다시 의식을 잃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