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로마와 쯔바이핸더 검객-1화 (2/67)

EP.1 당혹의 극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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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누군가 그리 말했다.

그 누군가의 이름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때로는 호재가 악재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은 행운이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돈복사라 불리는 행운 말이다.

4년 전, 난 한 자루의 검을 샀다.

쯔바이핸더였다.

러시아의 크베툰 사에서 제조한, 무려 170cm의 장대한 길이를 자랑하는 쯔바이핸더를 구매해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 그 자체, 중세 덕후의 로망 그 자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검 말이다.

중세 검술을 배우고 익히며 또한 즐거워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로망을, 난 성인이 거의 되자마자 이뤄낸 것이다.

더 이상 피더가 아닌 진가검으로, 롱소드가 아닌 트루 투핸더로 대련을 해보고 검술을 수련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거의 눈물콧물 다 흘려대며 언박싱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소장 겸 방한용로 써먹을 갬비슨도 하나 샀었다. 기존에 있었던 검술용 장갑도 훨씬 고급 가죽으로 만든 걸로 바꿨었고 말이지.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로부터 정확히 4년 뒤에, 처음 검을 휘둘렀던 바로 그 공원에서 연습을 끝내고 상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때에, 어느 미친 트럭에 치이게 되리라고? 인도 한가운데로 트럭이 급발진을 하며 쳐들어와, 날 그야말로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리라고?

그리고 그렇게 허공에서 붕 뜬 채로, 몸이 서늘해지고 뼈가 박살나는 감각을 느끼며 죽어가던 찰나에, 로마군의 병영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게 되리라고?

“씨발, 그때 코인을 하질 말았어야지.”

물론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진 않지만, 이건 인간적으로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어이없이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한데, 갑자기 병영 한가운데에서 소환돼서는 포로로 잡히고는 이렇고 칭칭 묶여있지 않는가. 심지어 내 검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그 쯔바이핸더 사느라 돈이 얼마가 들었는데. 그거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장갑이랑 갬비슨 다 합친 것보다도 2배나 더 비싼 물건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것도 존나게 격렬한 강도로.

-휘익!

아, 머리를 쓰다듬던게 아니라 자루를 벗기려는 거였구나.

"눈이… 그리 부시진 않네.”

내 위에 있던 지붕 덕택에 실명의 위기는 면했다.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주위를 슥 둘러보자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쓴 여자와 책상, 그리고 주홍빛의 천막이 보였다. 투구에 깃털이 달렸다는 걸 감안하면, 저 자는 최소 백인대장이나 그 위의 높은 장교일 터다.

잠깐만, 장교라고?

이건 문제가 있다.

느낌이 영 좋지가 않다. 자루가 벗겨지자마자 장교와 만난다는 건 영 좋지 않은 신호다. 빨리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추후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이, 이건 오해입니다. 전 절대 여기에 적대적인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그 입 닥쳐라, 야만인. 그리고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해라.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지?"

그러나 내 해명은 문장을 끝맺지도 못하고 강제로 종결되었다. 저 염병할 장교년이 내 말을 끊어먹은 탓이다.

그나저나 야만인?

아, 그렇다. 난 지금 존나 심문당하고 있는 것이다.

손발이 덜덜 떨리며, 식은땀과 함께 차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 눈을 떠봤더니 여기에 있더라고요?”

가장 정직한 답변, 하지만 동시에 전혀 그럴 듯하지 않은 대답을 내뱉자 장교의 얼굴은 점차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널 보냈지? 마르코만니? 콰디? 어느 부족의 간첩이야?!"

"…전 야만인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장교의 얼굴은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상태로 계속 있으면 심부전이라도 와서 픽하고 다시 죽어버릴 것 같아.

일단 잠시 눈을 감고, 사고를 전개해보자.

먼저 위치를 파악해볼 필요성이 있다. 날 보자마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게르만족 간첩 아니냐고 몰아붙이는 걸 보면, 여긴 게르마니아 접경 지역일 가능성이 꽤나 높다.

일단 공기부터가 음울하고 거지같았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거의 확실하다. 이런 엿같은 날씨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들짐승, 독버섯, 그리고 그 두 개를 처먹고 사는 야만인들밖에 없을 테니까.

“…마지막 기회를 주지. 사실대로 털어놓아라. 그렇다면 살려주겠다.”

“아니, 전 사실을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진짜, 아까부터 계속 한 치의 거짓말도 안 했다고요!!”

"하.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한층 더 썩어들어간 표정을 한 채로, 장교는 관자놀이를 미친듯이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장교마저 여자라니, 여기가 남녀역전세계라는 설은 꽤나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째 계속 딴 생각이 정신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 내 정신이 현 상황을 감당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가 않은 모양이다.

어째선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든단 말이지.

"흐음... 어쩔 수 없군. 사르비나! '진실의 손'을 가져오도록!"

"뭐, 뭐요?!"

진실의 입도 아니고 진실의 손이라니. 이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거짓을 말하면 엿을 날리는 손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사색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진실의 손이라는 게 내 앞에 나타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30초도 되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 있습니다."

천막 안쪽에서 나타난 흰 옷의 여인은 진실의 손을 내려놓고는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대충 노예같은 건가?

"자, 이건 진실의 손이라는 거다, 야만인."

진실의 손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건틀릿 같은 물건이었다.

일반적인 건틀릿과의 차이점이라면, 손목 부분에 존재하는 벨트 같은 것과 저 표면에 돋아난 흉악한 생김새의 가시를 꼽을 수 있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긍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는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거짓말하면 손이 아작나는 그런 괴상한 물건인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내가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다고는 해도, 마법이 존재하는 우주가 있을 리가 없다. 매사에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건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일이라고.

아마 저건 그냥 내 손을 묶어놓을 더 좋은 도구를 가져온 거겠지. 진짜 마법걸린 물건은 저렇게 비효율적이고 과장된 생김새를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내가 마법사라고 생각해 봐. 저딴 대놓고 티나는 디자인으로 마법 걸린 물건을 만들어서 좋을 게 대체 뭐가 있는데?

"이 건틀렛에 손을 넣어라. 만일 거짓을 고한다면 마법에 의해 네놈의 손은 아주 아작이 날 것이다."

뭐? 마법이 있을 리가 없어? 너무 비효율적인 생김새를 가졌다고?

누가 그런 개소리를 했어?

존나 불길하게 생긴 건틀릿이다. 저거에 쉽사리 손을 집어넣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는 미친놈이겠지.

하지만 난 미친놈이 아니다. 저기에 손 넣기 싫다고 시발아.

-찰칵

곧 주위 병사들에 의해 벨트가 채워졌고, 내 손은 건틀렛 속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손에 땀 차는 속도가 아주 예술적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대체 원리가 뭐야? 아니, 애초에 이거 진짜 마법 걸린 물건이 맞기는 한가?

…여기가 마법이 있는 세계인 거야, 아니면 마법이 있다고 믿는 세계인 거야?

어쩌면 지금 저 장교의 말이 틀릴 지도 모르는 일이지.

"다시 한번 묻겠다. 넌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지?"

하지만 그 예상이 틀렸을 때의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위험을 감수한다 해도, 난 얻는 게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러니 정직해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음... 도로를 걷다가 좀 크고 무거운 것에 충돌해서 난데없이 기절했는데, 눈 떠보니 여기였...는데요?"

말하다 손의 감각이 사라진 건 아닌지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다.

이거 그래도 오작동은 안하네.

"뭐, 뭣? 그 말이 진실이었다고? 말도 안돼. 그럼, 야만인의 간첩도-"

"아니, 전 간첩이 아니라니까요?!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로마군 장교는 진실의 손을 노려보았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난 진실을 말한 거니까.

전형적인 라틴계 유럽인의 얼굴을 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하, 제기랄. 골 아프게 됐군. 이거 윗선에 올라가면 귀찮아지는데."

저 개새끼를 척 보아하니, 군 장교로써의 훌륭한 마음가짐, 즉 장교주의적 자유주의와 장교주의적 합리주의를 가진 사람인듯 했다.

책임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신의 안위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단 뜻이다.

장교는 뭘까.

"하지만 네 말이 맞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

여하튼, 반응을 보니 이 짜릿한 심문 끝에 드디어 진상이 밝혀진 모양이다. 그럼 이제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게 맞겠지.

"그럼 좀 풀어주시죠?"

"그건 안된다."

잠깐만, 내가 대체 뭔 말을 들은 거지?

설마 저 여자가 죄없는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겠단 개소리를 한 건가?

"예? 아니, 대체 왜-"

"내가 듣기론 네가 내 병사의 다리를 걷어찼다던데, 이게 진정 사실인가?"

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예. 하지만 그건 막 잠에서 깨서 정신이 없을 때-"

"그럼 다음 질문, 넌 로마인인가?"

"아니요."

내 대답을 들은 백인대장은 잠시 탁상 위의 서류를 들춰보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간첩이 아니라 해도, 병영을 무단침입한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의 군법에 따르면 로마군의 병영을 무단 침범한 외국의 민간인은 그 대가를 치뤄야만 하지. 이 경우엔 그 외국인이 바로 너가 되겠고. 근데 심지어 넌 폭행까지 했군?"

아니, 폭행이라니. 이건 누명이야. 그냥 발작을 좀 하면서 거칠게 일어나보니 로마군이 그득한 텐트 안이었던 거라고. 거기서 다리를 좀 찼다고 이러는 게 말이나 돼?

그나저나 어째 뒷골이 좀 싸한 것이, 어째 영 좋지 않은 말을 들을 것만 같다.

"그 대가란 건 뭡니까?"

"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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