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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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혹독한 강원의 꿈을 꾸고는 했다.
그 휘몰아치는 칼바람과 무릎까지 쌓인 눈 사이에서 나는 삽을 들고 크게 웃었다.
야밤의 손전등이 내 눈을 비출 때도 난 웃었다.
마침내 다섯 발의 탄피마저 잃어버렸을 때, 난 눈에서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그것이 재입대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30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신안의 염전 다음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1년 반을 바쳐야만 하는 세태,
그 잔인한 현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정신적 고통을 박아넣었다.
난 그날의 한기를 잊지 못한다.
"자, 잠깐만! 찌르지 마세요! 찌르지 마세요!"
그리고 고통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숲의 지독한 안개로부터 스며드는 추위는 견고한 갬비슨이 막아주었다.
그러나 갑옷은 정신이 아닌 육신을 보호하는 물건이기에, 그것이 공포와 스산함으로부터 날 지켜주지는 못하였다.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무릎을 꿇어라!"
창을 든 붉은 망토의 여인이 내게 명했다. 맙소사, 21세기에 창이라니.
어쩌면 난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빨리빨리 움직여라, 야만인! 로마군의 창에 찔려 생을 마감하기 싫다면!"
아니, 저건 분명 실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여긴 군대다.
아마 로마군이겠지.
내 주위를 빙 둘러싼 여성들의 복장과, 무장 상태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한 추론이었다.
그 특유의 뺨을 가리는 투구, 철제 갑옷 '로리카 세그멘타타'와 저 편에 솟아있는 황금 독수리의 우상.
틀림없다. 저건 로마군이 분명하다. 내 앞에 있는 여자는 투구에 붉은 깃털을 달았으니 아마 지휘관이겠지.
"대장님께 보고해라. 야만인들의 간첩을 잡았다고."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사방에는 여자들밖에 없다. 성별을 제외한 모든 것은 명백한 로마군인데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내 뺨에 묻은 흙의 감촉과 냄새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도저히 가상의 것이라 여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뇌리를 스치는 어떤 물체의 형상이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흰색의 트럭. 붉은 헤드라이트.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것.
그러니 결론은 하나밖에 없겠지.
"하, 하하, 하..."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한 나는 실소를 했다.
로마군, 남녀역전 세계의 로마군들은 밧줄과 검은 자루를 가지고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려 따윈 한 치도 없는 손길로 양 손목과 발목을 묶어 결박한 그들은, 내 머리에 자루를 씌우곤 맨땅에 질질 끌어대며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들의 힘은 웬만한 성인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삼선이 새겨진 추리닝 바지 너머로 축축한 흙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지난 몇 시간이 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겨울의 마지막이자 봄의 첫번째 밤에 일어난, 어느 힙스터의 꿈이었다.
쯔바이핸더와 갬비슨의 시간이었고, 부주의한 운전자로 인해 발생한 교통사고의 악몽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루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생각하는 것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