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해빙 (6/16)

6장. 해빙

차가 작년의 사고현장이었던 횡계 부근을 지나자 진우는 왠지 모를 상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

다.

갈 때 보았던 것과도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제는 세상에서 아내의 기일이라 생각하는 날이었다.

물론, 아내의 육신은 그 날 죽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닐지도.

해는 1998년으로 접어들었고, 그는 지금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지현이와 함께 강릉

의 처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처가에서는 지현이를 애틋한 마음에 반겨주었다.

"어이구.. 1년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이제는 처녀애가 다 되었네.."

"역시 이맘때 아이들이란 빨리 큰다니까요.."

장인 어른은 자꾸만 딸 생각이 나시는지 눈시울을 붉히셨다.

"어쩜 지 에미를 이렇게 닮아 가는지.."

진우는 그것을 보면서 지금 아내의 마음이 어떨까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아버지 앞에서 딸이면서도 손녀인 척 해야하는 그 심정은 지금 어떨까?

그런 것을 생각하니 그동안 자신의 태도가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사실 이전부터 마음은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아내에게 사과할 타이밍이 없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진우는 지현이의 작은 손을 잡으며, 그러나 시선은 앞을 고정한 채 작게 속

삭였다.

"그동안 미안했어.."

".........."

지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반년 전, 지현이의 여름방학 때 있었던 그 일 이후 두 사람은 왠지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의식해서 행동 하나 하나에 조심을 했고, 지현이는 애써 노출을 피하려는 듯 행동을 했

다.

지현이가 본래 안 가려했던 학교의 여름수련캠프에 뒤늦게 가겠다고 한 것도, 진우가 선뜻 그녀

를 보내준 것도, 어찌 보면 그런 갑갑한 상황에서의 일종의 도피였다.

그리고 진우는 점차 회사 일을 핑계로 지현이에게 소홀해졌다.

그것에는 지나친 거부반응을 보인 아내에 대한 일종의 서운함도 작용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만, 십여 년 간을 살을 섞어온 아내에 대한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이런 진우의 태도에 지현이도 아이로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현이가 겪은 그 일은 사춘기에 접어드는 감수성 많은 여자아이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이

후 아빠가 보여준 서먹서먹한 태도도 여자아이를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밤이면 몰래 방에서 훌쩍이고는 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다가오면서 점차 마음이 안정이 찾아가자, 여

자아이도 좀 더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여름에 겪었던 그 충격적인 경험은 아직 지현이의 마음속에 크게 각인이 되어 있었고, 그것

은 조금씩 그녀가 새로운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나 이맘때면 그렇듯이,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로서의 호기심으로 이성이나 어른들의 은밀

한 비밀에 대해 알아갈 나이에 겪은 그 일은, 어느새 밤마다 지현이를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빠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 느꼈던 그 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아 스스로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뭔가 아직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보아 버린 느낌?

그러나 어차피 그 일은 지금 지현이에게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이미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조숙한 친구들끼리 서로 소근거리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

었다.

그리고 이웃의 아는 언니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지현이는 그럴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는 숨을 죽이며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이러면서 성에 대해 막연히 느꼈던 것을 아직은 부족하지만 조금씩 알아나가게 된 지현이는 어

느새 당시 아빠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아빠로서는 그건 무척 중요한 문제이셨을 거야..  어른들의 일이니 내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

이렇게 지현이가 딸로서 아빠를 이해해가며 조금씩 성장해 갈 때, 아빠는 지현이에게 사과를 해

주셨다.

진우는 지현이에게 사과를 한 그 날 이후 더 이상은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지현이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클 때까지는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참겠다는 진우의 결심이 과연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지현이는 날로 풋풋해져 가고, 또한 그 모습이 수진의 본 모습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요즘에는 지현이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지난 번 화해를 한 뒤에는 그녀가 다시 친근하게 "아빠.."하며 안겨올 때가 많았으므로, 

진우는 그때마다 일어서는 자신의 물건을 달래주느라 고역을 치렀다.

"지현아.. 빨리 나와..  에이 뭐 이렇게 오래 걸리니..  여보..."

"아이 참.. 알았어요. 죄송해요.. 지금 나가요.."

"벌써 20분이나 기다렸단..."

이리 저리 꾸민다고 진우를 현관에서 한참이나 기다리게 한 지현이가 자기 방에서 나오자 그는 

뭐라 한마디를 더 해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지현이는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얀 스웨터와 무릎을 살짝 덮는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그 밑으로 곧게 뻗은 날씬한 종아리.

"저.. 저어기요.. 나 예뻐요..?"

"응?  아.. 으응.. ... 그래.. 무척 예쁘다.."

진우는 당황한 것이 쑥스러운 듯 더듬거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제 '예쁘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구나' 하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면 어떻게 해.."

"에.. 그래도 간만의 데이트잖아요..."

지현이가 살포시 웃으며 진우의 팔에 매달려 왔다.

옆에 팔짱을 끼고 붙은 지현이에게서 상큼한 내음이 풍겨왔다.

'아...'

진우가 그 내음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 부녀끼리 어디 외출하시나 보네요.."

평소에 안면이 있던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길에서 그들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시장 다녀오시나 보죠.."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예.. 저 앞에 수퍼에요..  그래 지현아.."

"이제 아이가 곧 중학교 입학식이라.. 입학 선물을 사주려고요.."

"어머.. 그렇구나.. 맞아.. 이제 지현이도 중학교에 들어가지..  축하해. 지현아.."

"감사합니다.."

"참.. 지현이는 학교, 어디로 배정 받았니..?"

"저요.. 언남 중학교요.."

"그래.. 가까운데 되었구나..  참 부녀간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보기가 좋네요.."

그 아주머니는 친근한 웃음을 남기고는 가던 길로 가셨다.

오늘은 지현이의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가 늦게 도착한 진우는 부랴부랴 지현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지현이는 교복 입은 모습을 나중에 보여준다고 새침을 떨며 먼저 학교로 갔었다.

"아빠..."

그보다 먼저 찾은 지현이가 진우를 불렀다.

"응..? 어디야.."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 진우는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과 여학생들 속에서도 한눈에 지현이를 

찾을 수 있었다.

새하얀 교복을 입은 지현이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입학식 날 처음 보여주겠다고 지현이가 그동안 숨겨왔던 그 모습이었다.

교복 밑에 이제 완연히 느낄 정도로 도톰히 솟아오르는 젖가슴.

점차 부드러운 여성의 곡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교복의 윤곽과 늘씬하게 쫙 뻗은 새하얀 종아

리.

아직 어린 소녀의 몸이지만 교복을 입어서 그런지 왠지 성숙해진 듯한 남다른 느낌이 드는 지현

이의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저어기 있잖아요.. ....."

그에게 달려온 지현이가 뭐라고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새삼스레 느낀 지현이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진우는 마치 자신이 사춘기 소년인양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소녀를 아내의 영혼이 들어간 존재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서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냐.. 그래서는 안 되겠지.. 아내의 영혼이 없다면 아 아이는 내 딸의 몸인걸..'

하지만 이미 진우의 마음 한편에는 지금 그가 아내처럼 13살짜리 아이의 몸이 아니라 40을 바라

보는 나이라는 것에 서글픈 마음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와 그녀와의 크나큰 벽이었다.

왠지 지금 자신이 그녀를 건드린다면 비록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 할지라도 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수진이처럼 인생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젊음을 얻을 수 있다면... 또 다시 사랑을 시작

할 수 있을 지도..'

이런 상념이 들고 있었다.

".... ..... 정말 재밌지요..?  풋..."

"응? 으응.. 그래.."

상념에서 깨어난 진우는 어떨 결에 대답을 하고는 어깨 밑으로 한참이나 아래인 지현이를 쳐다

보았다.

아내의 몸은 아직 어렸다.

이제 경우 중학교에 올라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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