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속편) 1화 (6/11)

(속편) 누군가가 내 아내를 훔쳐보고 있었다 

무더운 날, 사무실 에어컨마저 고장이 났다.

수리기사가 오후에나 올 수 있다는 조부장의 말에 모든 직원들이 푹푹 찌는 사무실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더운 나머지 스타킹은 이미 오래전에 벗었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서류 몇 장을 손에 들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가슴 쪽으로도 땀이 맺혀 브래지어가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스타킹처럼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푼 뒤 땀에 젖어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브래지어를 손을 넣어 살짝 들어올렸다. 가슴과의 사이에 공간이 생기자 그 틈으로 공기가 들어가 조금 시원해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더운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마주 보이는 조부장의 방을 바라봤다. 그 방에는 따로 에어컨이 설치되 있어서 그가 부럽게 느껴졌다. 사실 조부장이 자신의 방문을 열어 놔 준다면 최소한 여자의 자리까지는 바람이 올 것 같은데 방문을 꼭 닫아 놓고 혼자만 시원하게 있는 조부장이 조금 얄밉기도 했다. 그 때 그의 방 창문에 걸린 블라인드가 흔들렸고 여자는 조부장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소름이 돋아 얼른 옷매무새를 고쳤겠지만 요즘 여자는 오히려 그런 시선을 즐기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워너비가 된 부르르를 만나고 부터였다. 사실 아직까지도 남자의 시선을 느끼면 부끄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수련을 한다는 마음으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자는 그녀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모두 따라해 보고 싶었고 멋진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 앞에서 낯선 남자와 자극적인 경험을 가진 뒤부터 자신에게도 숨겨진 끼와 욕망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여자는 낯선 남자를 조부장이라고 상상했었기 때문에 그 뒤로 그를 볼 때마다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부장이 자신을 훔쳐보며 흥분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며 묘한 쾌감이 일었다.여자는 옷을 고쳐 입는 대신에 조부장을 더 자극시키고 싶었다. 조부장이 자신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게 하고 싶었다. 왠지 그렇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여자는 그가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도록 시선은 모니터 쪽으로 향한 채 블라우스를 더 활짝 열어 가슴골이 잘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치마를 골반 쪽으로 더 끌어 올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게 만든 뒤 걷어 올린 치마 단을 부채질 하듯 펄럭여 팬티를 잠깐씩 노출시켰다. 그러면서 감질나게 보여지는 속살을 보며 안절부절 하는 조부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가 여자를 보며 자위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부르르 전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은 실제로 탈의실에서 본 모습이었기에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여자의 심장은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고 더위는 어느새 느껴지지도 않았다.

에어컨 수리기사는 퇴근 시간까지도 오지 않았고 여자는 어쩌면 조부장이 에어컨을 고장낸 건 아닌지, 그리고 수리기사는 애당초 안 부른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남자는 오늘도 아내의 회사 생활이 궁금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자극적인 내용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빨리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녁식사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 아내가 자신을 애해해준다고 하긴 했지만 그런 것에만 관심 있는 남자로 보이기 싫어서였다. 남자는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정치인들 얘기가 나올 때 쯤 은근슬쩍 말을 던졌다.

“저 놈의 국회의원들 하는 짓은 매번 똑같네. 요즘은 뉴스가 새롭지가 않아. 안 그래?"

"뉴스가 그렇지 뭐"

"너는 오늘 뭐 재밌는 일 없었어?”

여자는 남자가 말하는 재밌는 일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조부장님이 또 훔쳐봤냐고?”

“그...그래. 오늘은 우리 이쁜이 안 훔쳐봤어?”

“오빠. 나야 나. 오빠의 상큼이. 그런데 그 사람이 안 훔쳐봤겠어?”

“그렇지? 너같이 쌔끈한 미녀를 안 훔쳐보면 남자도 아니지. 그럼 때버려야지. 오늘은 어땠는데?”

“오늘은 좀 더 과감하게 보여줬지. 이렇게 치마를 걷어 올려서 막 펄럭거렸어. 아마 속옷도 봤을거야.”

남자는 침을 꿀꺽 넘긴 뒤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어...어떻게?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니가 자기 꼬이는 줄 알겠다. 그래도 괜찮겠어?”

“오늘 사무실 에어컨이 고장났거든. 너무 더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 땀이 너무 나서 스타킹도 벗고 있었는 걸. 블라인드도 쳐져있었고 내가 더워서 그랬다고 생각할거야.”

“이야. 조부장이란 사람 오늘 완전 땡 잡았네. 얼마나 몸이 달았을까.”

“헤헤. 그랬을려나? 이러다 나도 점점 재미들리는 거 아닌지 걱정이야.”

"너네 회사 남자들은 너 때문에 호강하겠다."

"무슨 소리야. 오빠가 시켜서 조부장님한테만 살짝 보여주는 거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래. 회사에서 괜히 그러고 다녔다가 여직원들한테 왕따 당해요."

“이러다 조부장이 너 덥치는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런 분 아니야.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 시선 의식하는 사람인데. 기껏해야 혼자 몰래 자위나 하겠지.”

“그 사람이 네 몸 보면서 자위해도 이제 괜찮아? 전에는 소름 돋는다고 했잖아."

"사실 아직도 소름 돋는 건 마찬가진 데 그래도 참을 만 해. 오빠 말대로 그만큼 내가 매력이 있다는 거잖아."

"너 많이 개방되졌다."

"사고의 전환이랄까. 남자란 동물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니까 마음이 많이 열리는 거 같아.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오빠가 이런 걸 좋아해서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오빠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 내가 뭐 좋아서 조부장 같은 사람에게 속살 보여주며 자극하는 줄 알아? 매일 오빠가 그 얘기 들으며 흥분하니까 그러는 거잖아."

남편이 원해서 할 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자는 조부장의 시선을 즐기는 일에 이미 빠져있었고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때 마다 생기는 묘한 긴장감에 중독 되 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조부장이란 사람 참 불쌍하다. 이렇게 이쁜 상큼이를 눈 앞에 두고 속만 끓고 있으니."

"그러게. 그래도 자기가 어쩌겠어. 워낙 숙맥인데다 여직원들이랑 눈도 잘 못 마주치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얼마나 순뎅인데. 오죽했으면 그 사람이 그러는 걸 알고 내가 다 놀랬겠어. 아무튼 사람은 겉만 보고 몰라. 그치?"

"그 사람이 그렇게 숙맥이야?"

"그렇다니까."

"하긴 그러니까 혼자 몰래 그러겠지. 다른 놈들 같았으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널 자빠뜨렸을 텐데. 그 사람 회사에서 별로 힘이 없나봐?"

"무슨 소리야. 사장님이 제일 신임하는 사람인데."

"그래?”

“이번에 있을 승진심사 때도 조부장님 영향력이 가장 클 걸?”“그럼 조부장한테 좀 잘 보여서 이번에 승진 한 번 해봐.”

“말도 안돼. 내가 승진하려면 적어도 3년은 더 있어야 돼요. 내 위로 기다리는 선배들이 몇 명인데. 그리고 조부장님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 처리 하시는 분 아니야.”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혹시 알아 네가 잘 만 하면 조부장이 그렇게 해 줄지?”

“뭐야. 오빠 말은 나더러 조부장님한테 몸이라도 바치라는 거야?”

여자의 입에서 몸을 바친다는 말이 나오자 남자는 자신의 물건에 피가 쏠리며 입이 말랐다.

“뭐 어때. 저 번에 그런 경험도 있고. 그 때 너도 많이 흥분했다고 했잖아. 어차피 한 번 해봤으니까 이 번엔 더 쉬울거야. 대신 조건이 있어 내가 볼 수 있게 만 해줘. 그럼 내가 허락 해 줄게.”

“그 땐 모르는 사람이었고 어쩌다 상황이 그렇게 되버린 거잖아. 조부장님은 매일 회사에서 얼굴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얼굴을 보라고. 말도 안돼. 더군다나 오빠까지 불러 놓고 그러라고? 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가 몰래 숨어서 봐도 되고, 아니면 화상통화 있잖아. 네가 몰래 연결시켜주면 될 거 같은데.”

“오빤 그런 게 그렇게 보고 싶어?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너도 조부장이 너 훔쳐보는 거 이해할 수 있다고 했잖아. 흥분되기도 하고.”

“그야 물론 그렇지만.”

“그럼 이 정도는 어떨까? 조부장이 지금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게 뭐냐는 거지.”

“그게 그 소리잖아.”

“아니야. 내 말 들어봐. 물론 너랑 잘 수 있다면 감지덕지겠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보다 조금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나은 상황이라니?”

“사람 마음이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잖아. 눕는 게 함께 하는 성 행위라면 딱 앉는 것 까지만 허락 해 주는 거지.”

“그게 뭔데?”

“그 사람이 멀리서 훔쳐보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네 몸을 보며 자위하게 해주는 거야.”

“어떻게 그래? 나 더러 조부장님한테 가서, 내 몸을 보면서 자위하세요. 그러라구?”

“그냥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널 이상하게 보겠지. 그 전에 먼저 이유를 설명해줘야지.”

“무슨 이유?”

“전에 조부장님이 여자 탈의실에서 몰래 그러는 걸 봤다. 처음에는 이해 못했는데 사모님도 안계시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생각했다. 평소 존경하던 분이라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어떻게 도움이 돼 드릴까 고민 했는데 네가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게 가까이서 보면서 자위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말하는 거지. 그러면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니고 평소 존경하던 상사를 위하는 배려심 정도라고 생각할 거야. 그 사람은 그렇게 해 주는 거만으로도 감사해서 큰절을 할 걸. 안 그래?”

여자는 남자의 말이 조금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러다 승진시켜주면 좋고 안 돼도 불쌍한 사람 조금 도와줬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어차피 멀리서 훔쳐보던 거 가까이서 보는 정도니까 덜 부담스럽고.”

“그래도 민망하게 그걸 어떻게 보고 있어?”

“보고 있으면 서로 불편하지. 저번에 생각 안나? 너는 저번처럼 눈 감고 뒤 돌아서있으면 돼. 아예 책상 위에 엎드리면 편하겠네. 그래야 그 사람도 너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자위할 거 아니야. 저번이랑 다를 게 없어. 아니 오히려 더 쉽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조부장의 눈앞에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온 몸이 찌릿거렸고 상상만으로도 자극적인데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더 흥분될까 기대되었다. 사실 남자는 여자의 승진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아내와 조부장 사이의 자극적인 모습을 보는 것만 관심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조부장이 아내를 승진시켜 줄 거라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만 하고 있는다고 흥분될까?”

“당연히 흥분되지. 생각해 봐. 입다 벗어 논 유니폼이나 스타킹만으로도 흥분했는데 그걸 실제로 입고 눈 앞에 있어봐. 얼마나 환장하겠어? 그것도 몰래 눈치 보며 보는 것도 아니고 맘 편하게 들여다 보는 거 잖아. 흥분해서 1분도 못 버티고 바로 싸버릴 걸.”

“에이 설마.”

“네가 네 뒷태의 힘을 아직 모르는 구나. 너는 굳이 옷을 안 벗고 골반만 내밀고 있어도 이 세상 남자라면 신생아부터 금방 죽을 거 같은 산송장 까지도 발딱 세울 수 있어.”

“하하. 오빠 너무 웃겨. 오빠가 말하면 나 자꾸 상상하게 되잖아.”

“왜? 상상하니까 막 흥분 돼?”

“으이구. 무슨 말을 못해. 아무튼 그러고 있다가 막 만지면 어떻해?”

“그 사람 숙맥이라며?”

“하긴 그렇긴 해.”

“그리고 불쌍한데 좀 만지면 어떠냐? 솔직히 회식 같은 때 끌어안고 부르스도 추는데.”

“조부장님은 여직원들이랑 부르스도 안 춰.”

“그럼 뭐 뻔하네. 네 허락 없이는 아무 짓도 못할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남자는 조부장이 정말 숙맥일지 의심스러웠다. 원래 남의 눈치 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더 대범해 지는 법이고 조부장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일단은 아내와 조부장의 어색함을 깨는 게 가장 필요했다. 아내가 자신의 치부를 안다는 걸 인정하고 아내와 적당한 둘만의 비밀을 가지게 된다면 조부장과 아내가 뒤엉키는 장면을 보는 시간이 금방 다가올 것 같았다. 남자는 확신했다. 조부장이 곧 눕고 싶어 질 거라고.

하지만 아내는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그런데 어쩌지 오빠. 난 역시 안 땡겨. 오빠에게 즐거운 상상의 시간을 만들어준 걸로 만족할게. 자신없어. ”

라고 말한 뒤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는 해줄 것처럼 하다가 가버리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해졌다.

며칠 뒤 아침, 여자가 출근을 하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수근대고 있었다. 오늘로 예정 되 있던 인사발령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순서대로라면 여자와 친한 정선배가 대리로 진급할 예정이었기에 여자는 축해해 주러 정선배가 있는 자리로 갔다. 역시나 정선배의 자리에는 다른 여직원들이 모여 있었고 여자는 밝게 웃으며 정선배에게 말했다.

"언니, 축하드려요. 오늘 진급하신 거 맞죠?"

그런데 여자가 다가서자 다른 여직원들이 각자 자기 자리로 뿔뿔이 흩어졌고 정선배는 씁쓸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야. 내 주제에 진급은 무슨."

"네? 전 당연히 언니가 될 줄 알았는데..."

여자는 정선배가 아니라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누가 봐도 이번 차례는 정선배였다. 정선배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정선배 보다 1년 후배인 박선배나 김선배 일거라는 예상은 해 보지만 모든 면에서 정선배에게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여자는 이번 불합리한 인사 결과에 화가 났다. 거기다 정선배는 입사 때부터 여자를 무척 아껴주던 친한 언니였기에 회사에 대한 배신감은 더 크게 느껴졌다. 뭐라고 위로해야할지 고민하던 그 순간 정선배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이번에 대리된거."

여자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두드려 맞은 듯 멍해졌다.

"서,,,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랐니? 니가 이번에 대리로 승진 됐잖아. 정말 축하해."

그렇게 말 한 뒤 정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자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른 직원들이 여자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인사 공고가 붙어있는 복도 옆 게시판으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했다. 게시판에는 정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여직원들 중에는 유일한 진급자였다. 여자의 마음은 이중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정선배와 다른 친한 동료들을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과 동시에 진급을 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 때 지나가던 박과장이, 아니 박차장이 여자를 보며 말했다.

"어이, 축하해. 이번에는 외모 순으로 진급시켰나봐. 자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말이야. 자기가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쁘잖아. 물론 나는 제일 잘 생겼고. 우리 앞으로 잘 해 보자구."

이번에 같이 진급하게 된 박차장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또 다시 씁쓸해졌다. 그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못생기고 여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는 여자가 남자 상사들에게 꼬리를 쳐서 진급했을 거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박차장은 걸어가다 갑자기 멈춰 서더니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참. 조부장님한테 감사나 드려. 그 분이 이번에 강력하게 추천 했다더군. 그런데 둘이 무슨 사이야?... 친척? 아님...뭐 그런거? 크크크."

여자는 조부장이 추천했다는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조부장이 왜 여자를 추천한 걸까? 정말로 여자를 몰래 흠모하고 있던 걸까? 최근 들어 여자를 몰래 훔쳐보는 건 알았지만 그건 여자의 의도된 노출 때문에 남자로서의 본능에 의한 거라 생각했었다. 여자의 스타킹과 유니폼에 자위를 하긴 했지만 그건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역시 계속되는 여자의 노출 때문에 여자에게 집착하게 된 걸까? 여자 스스로도 자신이 실력만으로 진급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부르르 언니의 말대로 조부장이 여자의 매력에 빠져들어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조부장의 지위를 이용한 샘이었다. 의도 했건 안 했건 말이다.

여자는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화장실로 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빈 칸으로 들어갔다. 신랑과 얘기를 하다보면 좀 안정이 될 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전화를 걸려는 순간 화장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선배, 이번에 당연히 정선배 차례 아니었어요?"

"그렇지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정선배 차례지. 나이, 경력, 실력 모든 면에서 당연한거잖아."

"정선배가 안된 것도 안 된 거지만, 그 기집애가 대신 진급한건 더 황당하지 않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반반한 얼굴이랑 툭 튀어나온 궁둥이 흔들어서 남자 간부들 좀 홀렸겠지."

"그냥 홀리기만 한다고 그런 파격적인 인사가 가능해요? 제 생각에는 분명 뭔가 있어요."

"뭔가 있다니? 혹시 사장님 조카라도 돼?"

"그게 아니라 그런 거 있잖아요. 몸 로비."

"몸 로비? 처녀도 아니고 남편도 있는 여자가 설마 그랬겠어? 아직 신혼인데다 남편이랑 금술도 좋은 걸로 아는데."

"제가 윗분들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조부장님이 강력하게 추천했데요."

"그 순딩이 조부장님이? 왜?"

"왜긴요. 원래 그런 순진한 남자들이 여우같은 것들한테 잘 넘어가는거에요. 더군다나 그 분 기러기 아빠라면서요. 얼마나 여자 몸이 그리웠겠어요.”

“하여간 게 처음부터 알아봤다니깐.”

그들이 나간 뒤 여자는 서글퍼졌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었는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가슴 아팠다. 여자는 신랑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신랑은 워크샵 때문에 지방에 가 있었다.

"우리 이쁜이 아침부터 웬일이야? 무슨 재밌는 일 있었어? 혹시, 조부장이란 사람이 스킨십이라도 했어? 아니면 오빠 말대로 하기로 한거야?"

남자가 여자의 기분도 모르고 자신이 궁금한 말들만 떠들어 댔지만 그래도 여자는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아니야. 오빠. 그 분 그런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실은 나..."

"실은 뭐? 도대체 무슨 일인데?"

남자는 애가 탔다. 사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조부장이 자신의 아내를 뒤에서 덮치는 상상을 하며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그런 상상은 남자의 새로운 자극이며 활력소였다.

"나 오늘 대리로 승진했어."

"뭐? 정말? 이번에 선배 언니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너는 승진하려면 몇 년 더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아마 네가 열심히 일하는 걸 위에서 알았나 보다."

"나 그렇게 열심히 일 안했어."

"그럼?""나도 모르겠다니까."

여자가 조금 짜증스럽게 말하자 남자가 당황하며 물었다.

"왜...왜 그래.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남자가 당황해 하자 여자는 괜히 아무 잘못 없는 신랑에게 짜증을 냈다는 생각에 다시 차분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빠에게 짜증 부리려고 한 거 아닌데 미안. 내가 승진한 거에 대해 말들이 많은 거 같아서."

"네가 승진한 게 어때서. 할만하니까 된 거지. 사람들이 뭐라는데?"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얼굴 반반해서 됐다느니 남자 상사들한테 잘 보여서 됐다느니 그런 거."

"그게 뭐 어때서. 예쁘고 인기 많은 것도 다 능력이고 실력이야. 그래서 요즘 다들 돈 들여서 자기관리하고 그러잖아. 괜히 남들 시샘하는 거에 휘둘릴 거 없어. 윗분들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건데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래.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해."

"이러다 나 왕따 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게 시샘이나 하는 것들이랑은 차라리 안 어울리는 게 더 나. 그리고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렇고 저렇고 말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 시들해져.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니가 더 열심히 일해서 당당해지면 되. 그럼 다들 너를 인정하게 될 거야."

"그런가? 그렇겠지? 오빠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어. 역시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다니까."

여자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의 말에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남자는 기분이 찝찝해졌다.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많은 선배들을 놔두고 그런 파격적인 인사를 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단순히 예쁘고 호감 간다고 해서 말이 나오고 회사 분위기가 흐트러질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인사를 거행하지는 않는다. 남자는 전에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회사 내에서 영향력 있고 인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조부장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조부장이 아내에게 호감을 가지면 나중에 진급할 때도 좋지 않겠냐는 말로 아내가 조부장에게 노출 하는 걸 부추겼던 자신이었다.

조부장이 아내의 몸을 훔쳐보는 것 만으로 승진을 시켜줬을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득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자 몰래 조부장과 아내가 잠자리를 가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부글부글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들을 자극시키고 저번처럼 낮선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자 자신의 허락과 통제 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상태에서 몰래 관계를 갖는 일은 있을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배신이고 남자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질투심에 화가 치밀었지만 남자는 속마음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조부장이라는 사람이 추천했겠지?"

남자는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지만 그런 남자의 의도를 모르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그랬다나봐. 오빠 말대로 내 매력이 통한건가?"

남자는 배신감과 함께 비참함을 느꼈다. 아내가 ‘조부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라고 했던 말에 방심했던 게 잘못이었다. 이 세상에 여자의 노골적인 노출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남자는 없다. 낮선 남자의 맛을 알고 아내가 먼저 꼬였을까? 승진 시켜달라고 노골적으로 매달린 건 아닐까? 아니면 조부장이 승진을 미끼로 아내에게 잠자리를 요구했을까? 어떤 상황이었든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남자의 머릿속에서 분명해졌다.

순간 조부장의 가랑이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물건을 빨아주는 아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책상 위에는 승진서류가 놓여 있고 조부장의 싸인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부장의 정액들이 아내의 목구멍 속으로 뿌려지는 순간이 결재의 순간이었다. 조부장이 아내의 머리를 움켜쥐고 부르르 떨자 아내는 그의 정액들을 남김없이 쪽쪽 빨아 먹으며 부장님 좆 물맛은 최고라고 아부를 해댔다. 남편이 알면 어쩌냐는 조부장의 말에 아내는 그 멍청이는 절대 모를 거라며, 승진시켜주면 매일 아침 이렇게 빨아주겠다며 조부장을 꼬드겼다. 어디선가 조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도 못 팔고 다니는 멍청아 이 여자는 이제 내꺼야. 남편은 차를 팔고 마누라는 몸을 팔고. 쪽팔리기 싫으면 모른 채 그냥 있어 이 멍청아. 멍청아. 멍청아.

남자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조부장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다. 그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오빠. 왜 대답이 없어? 일 하는 거야?"

"그래서 같이 잤니?"

남자는 화가 났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분을 삭이려고 천천히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말이야? 누구랑? 조부장님이랑? 말도 안돼. 오빤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순간 남자는 자신이 못나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화가 났지만 쪼잔 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쿨 한 척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오빠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난 다 이해하니까. 그래도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주면 좋겠는데. 미리 말하면 내가 허락 안 해 줬겠니?"

여자는 남자의 말에 황당해졌다.

"그런 일 없어. 내가 오빠 몰래 그럴 사람으로 보여?"

남자는 솔직하게 시인했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잡아 때는 듯한 아내의 말에 심통이 나며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아니면 니가 좀 너무하네."

"너무하다니 뭐가?"

"조부장이 그 정도로 신경 써 줬으면 너도 답례를 해야 예의지."

"답례라니? 무슨 의미야?"

"그 사람 기러기 아빠고 불쌍하다며 니가 한 번 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지금 나 비꼬는 거야?"

"에이 설마. 내가 왜 너를 비꽈. 생각해봐 같이 잔 다음에 그 사람이 승진시켜줬다면 그건 뇌물일 수 있지만 승진시켜준 이후에 니가 답례하는 건 뇌물이 아니지. 스승의 날 같은 때 고맙다고 선물하는 거 있잖아 뭐 그런 거랑 비슷한 거지."

"그럼 식사 대접이나 넥타이 같은 거 선물하면 되잖아."

"이 바보야. 선물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걸 선물하는 거야.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게 뭐겠어?"

"그게 나라구?"

"그래. 맨날 너 훔쳐보면서 자위한다며. 나이 먹고 얼마나 못 할 짓이냐. 제일 좋은 건 한 번 주는 거겠지."

"그래도 어떻게 그래. 오빠는 정말 내가 그래도 괜찮겠어? 괜히 떠 보는 거지?"

"떠보기는. 너만 싫지 않으면 난 좋아. 저번에 못 봤어? 나 엄청 흥분하는 거?"

여자는 남자의 말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지 비꼬는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자의 말을 들으니 왠지 뭔가 답례를 하긴 해야 할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관계를 맺는다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 거 같았다. 여자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차피 답례를 하는 게 예의라면 적당한 선에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오빠. 솔직히 오빠 말대로 답례는 하는 게 예의일 것 같은데 같이 자는 건 말도 안 돼고 저번에 오빠가 말한 정도면 어떨까?”

남자는 진지하게 말하는 아내의 반응에 혹시 자신이 잘못 오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아무런 대가 없이 말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 조부장이 아내를 승진 시킬 이유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뭐. 한 번 자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게 좋을 거 같으면 그렇게 하던가. 다시 말하는데 너만 좋다면 같이 자도 난 상관없어. 단, 전에도 말했지만 미리 말해줘. 몰래 하는 건 싫으니까. 지금이라도 잤으면 잤다고 얘기해."

"그런 일 없었다니까."

"괜찮아. 설사 잤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니가 나 몰래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말 아니야. 오빠 나 못 믿어?"

"믿어. 믿어. 무슨 일이든 다 이해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아무튼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해.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하고. 나 교육 들어가야겠다.""알았어. 나도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 오빠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남자는 그 날 하루 종일 혼란스러웠고 아내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자존심을 세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조부장의 주도 아래 정식 승진 발표가 있었다. 조부장은 직원들 앞에서 여자의 승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인사발령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궁금증이 있으실 거 같은데 제가 설명해 드리죠. 여러분들 모두 열심히 일 해 주신거 잘 알고 제 심정 같아서는 모든 분들에게 기회가 가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리는 한정적이고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아실 겁니다. 결과에 섭섭하신 분들이 물론 계시겠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제품디자인을 아웃소싱을 통해 처리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얼마 전 저를 불러 말씀하시더군요. 아웃소싱업체에서 가져오는 디자인들이 너무 마음에 안든 다는 겁니다. 사장님 생각은 업체 사람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일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회사 내에 디자인 파트를 강화시킬 겸 외부 인사를 영업하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하려면 당연히 연봉도 많이 줘야하고 기존 사원들과 갈등도 많이 생길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더 큰 이유는 인원을 보강하는 만큼 기존 인원의 감축이 불가피하다는 사장님의 말씀이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중 어느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한 끝에 나름의 해안을 찾아냈습니다. 그건 새로 외부인력을 데려오는 대신에 기존 직원들 중 디자인 관련 전공자를 활용해 보자는 거였죠. 그래서 사원들의 자료를 검토 해 보니 이번에 두 사람의 디자인 전공자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제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사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이번에 승진 인사가 예정 되 있으니 차라리 그 두 사람을 승진시키자는 겁니다. 직책이 생기거나 오르면 그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 앞에 있는 두 분이 승진을 하게 된 겁니다."

그제야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시작했고 기존 직원들을 보호하려 했던 조부장의 행동에 모두 박수를 쳤다. 여자 역시 조부장이 다시 한 번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조부장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그 순간 조부장은 그만큼 위대해 보였다.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조부장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발표가 끝난 뒤 친한 여직원 하나가 여자에게 다가와 말했다.

"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어. 그런데 옆 부서 김선배는 니가 조부장님 한테 몸 팔아서 승진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 니가 그럴 애가 아니잖아. 안 그래?"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 없어요."

여자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일 없었으니까.

여자는 조부장에게 어떻게 보답해야할까 하루 종일 고민했다. 예상치 못한 승진에 기분이 날아갈 듯 했고 그가 해달라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보답의 정도는 이미 정해놓았고 그 얘기를 어떻게 건네느냐가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대화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요즘 들어 조부장은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주위를 경계하며 시선을 피했다. 여자는 몰래 훔쳐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조부장 같은 훌륭한 사람이 그런 죄책감에 빠져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여자는 오늘이 지나면 용기가 없어질 거 같아 서두르기로 했다. 퇴근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여자는 한참을 망설인 뒤 조부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들어서자 조부장은 당황한 듯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돌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여자는 숨을 한 번 들이 마신 뒤 용기를 내 말을 붙여보았다.

"부장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조부장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사무적으로 말했다,

"회사를 위해서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나에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하는 조부장의 태도에 여자는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나가기도 이상해서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도. 신경 써 주셨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그런 일로 괜히 다른 직원들에게 오해 사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만 받죠."

"죄송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여자는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워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뒤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조부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늘 새로운 디자인부서에 관한 기획 때문에 퇴근 시간 이후에 남아 있을 겁니다. 혹시 새로 할 일에 대해 궁금하거나 의견이 있으면 저녁 식사 하고 잠깐 들려도 괜찮아요. 다른 일 있으면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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