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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서 3일 후 화요일.
집에 우두커니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는 성민.
토요일은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자버렸다.
멍하니~ 아무 일 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길고도 짧게 한숨을 쉬는 모습이다.
“연락처를.. 받아왔어야 한다니까.. 미치겠네..”
조용히 중얼거리며, 머리통을 붙잡고 소파에 풀썩~ 누워버린다.
하는 행태를 보니 주연의 번호를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중얼 중얼... 혼자서 뭐라 뭐라 한참 떠들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어, 우리 보스?!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짜샤... 일하냐?”
“어~ 일하지.. 오늘도 강의하러 왔어, 지금 잠깐 쉬는 시간인데 전화했네~”
“아 그래..? 바쁘네 오늘도..”
“아냐 괜찮아. 두시간 간단하게 강연하면 오늘 스케줄 끝이다”
“음...”
경훈의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보스라고 부른 쪽은 성민이 아니라, 경훈쪽이다.
어째 둘의 대화를 주고 받는 분위기가.. 현서-경훈과는 달랐다.
현서에게는 경훈이 갑처럼 행세하며 위압적이었는데
지금 보니, 오히려 삐쩍 마르고 볼품없는 성민에게는 경훈이 설설 기는 느낌이다.
바로 그날 저녁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 두 남자.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야?”
“어떻게 하긴..”
“두번이나 자긴 했는데, 질싸를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ㅎㅎ”
“ㅋㅋ.. 그치... 짜증나서 혼났다”
“성민아, 그리고 나서 나 말고 현서랑도 통화했냐?”
“현서랑은 안했지.. 뭐라고 따로 전화해서 말하기도 어색한데~”
둘은 안양의 평촌 시내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있다.
성민의 집은 북수원 쪽이고, 경훈의 집은 과천에서 가까우니..
각자의 차를 몰고 중간지점 쪽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차가 있으니 오늘은 서로 술을 안마시기로 했다.
성민은 경훈과 가장 친한 만큼, 그날 있었던 일을 토요일 저녁에 전화로 얘기했다.
못다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것을 며칠 지나 회포를 푸는 중이다.
차근 차근 일의 앞뒤사정을 듣고 있는 경훈의 눈빛이 무척 흥미롭다.
성민은 주연과의 짜릿했던 그 날밤의 여운을...
흥에 겨워 조금 목소리를 높여가며 자세하게도 설명중이었다.
그날 새벽, 바깥에서 현서가 졸고 있을줄은 꿈에도 모르던 두 사람.
성민과 주연은 그 이후..
그의 완강한 고집에 못이겨, 그녀도 무안하게 웃으며 승낙해버렸고
결국 콘돔을 끼긴 했지만 한차례의 질펀한 정사를 또 즐긴 것이었다.
그 전날 저녁에 나눴던 정사에 비해서 기운은 좀 떨어졌지만...
무엇보다 이미 완전히 반해버린 그녀를 맘껏 끌어안고
짜릿 짜릿- 황홀해지는 입맞춤을 실컷 즐기며 회포를 풀었다.
그 생각을 하니 성민의 얼굴은 싱글벙글이다.
경훈도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그래서 또또~ 라는 식으로 채근한다.
“그래 가지고 내가.. 두 번째 떡치고 나서~ 주연이 얼굴에..”
“또~ 얼굴에 쌌어?”
“어~ 한번이 어렵지 뭐.. 얼굴 정도야 걔도 이해해주니까”
“주연이가 그러고보니 착하긴 한가봐”
“착해, 진짜 엄청~ 겪어보니까 더 그렇더라”
“하하하. 진짜 착하고 순한 애가, 그렇게 끝내 거부를 했대냐?”
“아 그 쉬끼.. 그거랑은 다른 문제잖어...
어쨌든 목표에는 쪼오금 못미쳐 아쉽지만, 할 만큼은 이뤘으니까”
“ㅎㅎㅎ 그럼 애초 목표량의 한 칠~팔십 프로는 달성한 거네?”
“그런 셈이지...”
둘은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주연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경훈도..
세세한 부분적인 묘사를 은근하게 몸짓을 섞어가며 성민이 하자,
벌개진 눈으로 침을 꼴딱~ 삼키면서.. 그가 몹시 부러운 눈치였다.
마치 그 상황이 생생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성민은 묘사를 찰지게 잘했다.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바깥에 나와 바람을 쐰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픈 환자라던 성민이, 경훈이 건네는 담배를 받아 피는 것이다.
“후~~하... 바람이 시원타..”
“.......... 근데.. 성민아”
“응~?”
“너 진짜 이렇게 몸 멀쩡한 것, 현서나 그 와입이 알면, 진짜 가만 있겠냐?...”
“하하하.. 뭐 그런 얘길 또해~ 당연한 스토릴 갖고”
“ㅎㅎㅎ 아니.. 나도 노파심에..”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일까?
틀림없이 현서가 경훈에게 들은 성민은, 폐암 ‘말기’ 환자였는데...
의연한 얼굴로 그런 얘기 지겹다는 듯~ 지나가는 여자들을 구경하는 성민.
경훈은 그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잠시 생각에 빠진다.
“..... 다 지나간 이야기라 미안한데.. 마음이 어째 좀 무겁긴 하다..”
“경훈아”
“어, 응?”
“쓰잘데기 없는 말은 하는거 아니다”
“.... 미안해”
“가서~ 저그 편의점에서 마실거 음료수나 좀 사와”
“어~ 뭐 마실래~ 사이다?”
돈을 내미는 성민의 손을 웃으며 밀치고, 부리나케 뛰어가는 경훈.
잠시 후에 알아서 캔음료와 자잘한 비스킷을 사들고 온다.
어어서 두 사람은 한적한 도심 가운데의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까페라도 가자니까~ 이런 데를 오고 그래”
“됐어~ 좀 갑갑하고.. 오늘은 일찍 들어갈거니까”
“그랴~”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볼까?”
“아~참, 현서하고 그 뒤로 통화는 했어?”
“뭘 통화를 해... 아직 얼마 안지났는데 기간을 둬야지”
“아니, 그거야 그런데~ 니가 힘들거 아냐 지금~?”
“.........”
주연의 번호도 없고, 따로 연락할 길이 없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연락처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받아서도 안되는 것은 맞았다.
성민 본인이 생각해도..
1회성 이벤트로 그치고 말지도 모를 일인데,
친구의 아내와 꾸준히 연락을 이어갈 여지를 남기는 것은, 말이 안된다 생각하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지금 상당히 몸과 마음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머리로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는데, 자꾸만 마음이 아팠다.
그에 못지 않게 정직한 몸뚱아리도... 역시나 그녀와의 뜨거운 결합을 원했고.
여러 가지로 성민은 주연을 보고 싶어 괴롭던 차였다.
그런 사정을 경훈도 잘 이해하는 것 같다.
둘은 쾌적한 맞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더 나눈다.
어느새 밤 아홉시가 가까운 시각...
밤바람이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번호 따위야 따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한 거니까~
조금만 참고 인내해봐. 곧 좋은 소식이 또 있겄지~ 크크”
“쯔읍... 다음번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글쎄, 언제 또 잡을진 니가 정하기에 달렸어~”
“내가?”
“응~ 시기만 잘 저울질해둬, 지르는건 내가 할 일이니까~ㅎㅎㅎ
현서 새끼를 어떻게 구슬릴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그래 뭐.. 나는 널 믿어 ㅎㅎ”
틀림없이, 그날 처음 선술집에서 현서는 경훈에게 동의했었다.
한 번뿐이 아닌.. 두 번에 걸쳐서 아내와 성민의 관계를 주선하겠다고.
지금 둘은 그 이야길 하는 것이다.
성민은 아무리 편하게 대하는 경훈이라도, 자기가 직접 다음번 일정을 말하긴 버거웠다.
그럴까봐 눈치껏 센스있게 경훈이 말을 꺼내고..
둘은 신이 나서, 두 번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내가 볼땐 말이다, 그냥~ 하루를 통째로 빌려”
“하루를..??”
“어~ 넌 그런 생각 진작 안해둔거야?”
“해보긴 했지... 근데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정해논건 없어”
“크크, 어쩌려고 이러시나, 우리 보스께서.. 대책없이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었잖아?”
“셰끼야.. 썰 까지 말고, 얼른 말해봐”
“무조건 24시간이라고 못 박자는건 아니야, 하루라고 해서”
“으음~...”
“말만 하루인거지, 명분상으로.. 하루 그 이상을 빌릴 수도 있어”
“하루 이상을..?”
“그래~ 현서한테 내가 밑밥은 잘 깔아둘테니까, 실전만 니가 하고”
“하아~ 나는 그 새끼 대하기 어려운데.. 여튼 그래서?”
“ㅎㅎ 두 번째가 곧 마지막이 될 것처럼 말해두고, 바깥에서 따로 데이트를 하란 말야”
“데이트라?? 흠..”
경훈은 생긴 것 답지 않게, 덩치는 곰같이 크고 우람하면서
하는 행동을 보니 정말 의외로(?) 성민의 카운슬링을 자처하고 있었다.
머리를 곧잘 쓰는 두뇌파인 듯, 유비에게 있어서 제갈량처럼..
본인이 생각해둔 계획을 성민에게 코치해주는 모습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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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목요일.
현서는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회의에 여념이 없었다.
차기 프로젝트의 준비를 위한 주요 프레젠테이션 시간.
얼마 전 들어온 신입 남 직원의 브리핑을 가만히 듣고 있다.
집중하여 귀기울이는 그의 얼굴이 상당히 진지하다.
“하아~ 끝났군... 수고들 했어”
“저, 차장님 저 잠깐만 바깥에 용무좀 보고 올게요”
“무슨 일이야~?”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헤헤- 업체와 통화를 꼭 하기로 되어 있어서..”
“하핫~ 뭘 그런 일을 일일이 허락맡아.. 얼른 다녀와”
사람 좋기로 소문난 오차장이었다.
40대 중반의 그는 현서가 이직해올 당시부터, 이것저것 따듯하게 챙겨줬던 상사다.
아직 자식이 없는 자신에 비해서.. 대학생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편하게 대할때는 사석에서 허물없이 형-동생처럼 지내는 사이다.
지금 현서가 그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것은, 통화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조용한 홀 정중앙에 서있다.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질감이.. 그의 지금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거대한 회사 내부의 1층 로비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2층 난간.
유리로 된 난간에 슬쩍, 기대어.. 떨리는 맘으로 전화를 건다.
다름 아닌 경훈에게로 향하는 통화다.
“그래~ 어디냐~”
“잠깐 복도에 나왔지.. 전화하라며~ 짜샤”
“키키 그랬나~ 나도 말해두고 까먹었네..”
“너.. 계획을 조만간 바로 잡아야겠다니,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 하하.. 너 기억 못하고 있었어?”
“뭘? 뭘 기억을 해??”
아니 이 자식이...
경훈은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으며, 이마에 쏠리는 실핏줄을 어루만졌다.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한다.
“대치동에서 술먹으면서 말했잖아.. 한번이 아니고 두 번이라고”
“두번? 주... 주연..이랑.. 한번 더.. 진행한다고?”
“어~ 확실히 그렇게 얘기했지, 너 입으로 동의도 했고...”
“...........”
“기억 안나?”
“........ 몰라, 한 것 같기도 하고, 술김이라 정확히 기억이 없어..”
“하하하하”
사실 기억은 났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고, 치가 떨려서 생각하기 싫었을 뿐...
그래도 오리발을 내밀고 싶은 심정인데,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경훈이 놀랍게도, 그 날 둘이 나눴던 녹취록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에..
현서는 ‘용의 주도한 새끼...’라며 입이 쩍 벌어진다.
“뭘 그런걸 녹, 녹음까지 해두냐, 너는?”
“증거가 될만한 이야기는 미리 수집해두는게 철칙이야..”
“........ 질려버렸다..”
“내 삶의 모토라고~ ㅎㅎ 난 물론 너를 믿지만, 다른 말하면 곤란하잖냐”
“경훈아...”
“한숨 짓지 말고 내말 들어.. 나랑 성민이가 널 뭐 잡아먹기라도 하냐?
결론만 먼저 말하자. 성민이 병세가 조금씩 안좋아지니까..
시간을 끌어선 안돼. 다음주 월요일 쯤으로 해두자고”
“너, 너무 일러.. 그것도”
“뭐가 일러? 지금부터 무려 4일정도나 시간 주는구만”
이야기는 대강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로 이어질 성민과 아내의 만남은 월에서 화로 정해졌다.
지난번에 비해서는 그래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셈이다.
두 번씩이나.. 두 번씩이라니...
어렵게 잊으려고, 잊으려고 했었던 생각인데.. 기어이 일깨워주는구나.
머릿속이 굉징히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