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걸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 생각은 안하지..
예전의 과실은 그대로 기억속에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할만큼 해왔는데..
이건 뜬금없이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아닌가.
“참~ 너 결혼식 때 성민이 왔었냐”
“아니 결혼식 때 부르긴 했는데..”
“진짜 불렀어, 청첩장 보냈나?”
“...... 청첩장은 아니고, 문자로 연락했지..”
“이 새끼가 지금..
멍청한 놈아, 그런건 솔직하게 말 안해도 돼!”
“하핫... 그래, 내가 지금 내 무덤을 팠다..”
부르긴 불렀다.
나머지 네 친구는 결혼식때 모두 와서, 주연과 현서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기원해주었는데..
끝내 성민은 피로연에도, 그 이후에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현서도 이해하던 참이다.
가만 그러고보니..
결혼식때 못본 주연이를 성민 놈이 얼굴을 봤었나?
그럴 기회도 없었는데..
일단 경훈의 말도 안되는 제안은 둘째치고,
아내의 얼굴이라도 봤어야 성민이 그런 부탁을 할 것 아닌가.
“얼굴 봤어~ 성민이가”
“어떻게?? 만난 적도 없었는데”
“디지털 시대에 귀신 좆질하는 소리하고 있엉~
청첩장 니가 깟톡으로 보낸거~ 나한테 있잖냐..”
“아...!”
“관심없어하길래, 야 함 봐라, 현서 마누라다.. 내가 뵈줬지”
“......
그랬더니? 뭐라고 하디?...”
“별 관심없는 척 하더니~ 이쁘다고 보라니까~ 보더라.
글더니 지럴? 마니 이쁘다고.. 니 부럽다고 그러네”
“하하하... 정말?”
“어~ 피식, 이 새끼 아직 꼬추는 달려갖고..
은근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얼굴 같다~ 뭐 이 지랄도 하더라”
“.... 그, 그래?”
성민의 마음에 든 얼굴..
그런가.
아내 주연의 웨딩드레스 차림 하나만 보았더라도
성민은 그녀를 적잖게 마음에 들 가능성이 컸다.
왜냐..
성민의 여자보는 취향은 현서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릴 때 취미삼아, 녀석의 여자를 여흥으로 몇차례 가져봤으니 말이다.
그랬지, 나랑 거의 판박이였어..
어떻게 된게 신기할 정도로, 현서가 그리는 이상형과 거의 일치했다.
얼굴이나 체형 키 이런 외적인 모습 외에도
현서가 좋아하는 여자의 성격과 취향같은 부분들도~
나중에 그의 여자를 뺏은 후 알고보니 묘하게 똑같았다.
그런 판국이니.. 이제 와서 성민이, 자신의 아내를 맘에 들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충격적인 얘기가 분명한데도..
현서는 두근 두근.. 가슴이 묘하게 뛰는 흥분을 느꼈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조용히 닦아본다.
경훈은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릴 비웠다.
그가 없는 사이, 현서 혼자 수없이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잠긴다.
그런가...
이제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곧 떠나는 길이 언제일지 모를, 녀석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줘야 하는가..
하하..
경훈이 용변을 보고 나오면,
좋든 싫든 간에 확실히 뭔가 답을 주어야만 했다.
경훈이 넘의 팍팍하게 밀어붙이는..
화끈하지만 더럽고 다혈질적인 면을 볼 때,
당장 예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여지는 줘야 한다.
“후~ 오줌발이 아주 터지네~
어때, 생각해봤나?”
“옹야~ 생각을 좀.. 해보긴 했는데..”
“으이구, 바로 확답 안내려도 됨마. 결정 지금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말을 해줘야하는데?”
“프하하~ 왜그냐. 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
“미안~ 농담이다 이거는.. 내가 실수했네”
“아냐 괜찬타~ 너 근디 술은 좀 깬 것 같다”
“어.. 물 마니 마시고 오줌 갈겼더니 좀 맑아지네..
그래서 말야, 생각하는데 도움 되라고 내가 어드바이스 하나 주마”
“뭔?”
여기서부터가 본편이다.
현서는 불안함이 담긴 시선으로,
또 한편으로는 조마 조마...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묘한, 설레임을 느끼며 물었다.
“가장 우선 할 일은 성민이를 니가 먼저 만나야겠고, 그쟈?”
“그렇지..”
“최근에 운제 만났노?”
“...... 4, 5년 됐나~”
“거봐라~ 그리 오래 안봤으니까 니가 욕을 쳐먹는거야..”
“씨발.. 그냥 본론 빨리 말해”
“ㅋㅋ 봐라 니가 더 급하다 지금..
꿀꺽.. 나도 말할려니 긴장되네..”
“성민이 놈이 뭐래, 나 한번 먼저 보고 싶대?”
“...... 음, 그런 식으로 말도 했고.. 친구니까~
나도 물었지. 개소릴 처음에 하길래..
야 시발 친구 아낸데 뭔 소리하노.. 이랬거든”
구구절절히 할 얘기를 지나서,
떨리는 마음에 채근하는 현서에게 경훈이 털어놓은 이야기..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귀가 쏠렸다.
딱 두 번?...
처음부터 포부가 크네.
대부분은 “야~ 딱 한번만 품어보자”라고 애원할 터인데
성민은 경훈에게 왈, 현서의 아내를 두 번만 만나보길 원했단다.
두 번이라..
“단 둘이서..?”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 뭐랬더라? 나도 기억이 까물까물..”
“아.. 좀.. 잘 되짚어봐..”
“ㅎㅎㅎ 기억이 나는갑다.
꼭 둘만 있을 필요는 없고, 만약에라도 니가~ 동의해준다면~”
“동의해준다면..??”
“흐읍~ 너 보는 앞에서라도, 한번 주연일 품에 안고 싶다카더라”
“헐! 나랑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랴~ 그렇게 말했어.. 확실하다잉.
장소는 뭐..”
“자리야.. 우리 집이나~ 뭐 그래야겠지..”
“캬캬~ 이거봐라, 이미 맘의 준비를 하는구만..”
“아니.. 혼잣말이야..”
두 번이라..
만나되 단 둘이 만나진 않아도 괜찮고, 자신과 같이...
꿀꺽...
크게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궁금한 것을 더 물어봐야지 안되겠다..
“그럼 다른 것좀 물어보자.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성민인 무슨 병에 그래 걸린거래?”
“폐암”
“폐암?”
“어~ 그 빙시새끼, 첫사랑 잃고 담배만 존나게 펴댔어..
뭐 그것말고도 힘든 일이 오죽 많았냐..
그 자식은 잘 들여다보면, 모든 삶의 여정이 다 고난, 고통이여”
“그래.. 폐암이구나..
말기가 확실한 거~? 이제 아예 의사도 손 못대나?”
“아 것참~ 내가 불확실한 정보를 흘렸겠느냐고...
나도 믿기지 않고 청천벽력이라서, 그 담당의 찾아가서 개지랄했지..
거기 병원이 알고보니까 처음이 아니더라구.
어떻게든 낫고 싶어서 여기 저기~ 병원 다녀보고 알아본 모양이야”
“절망적이구만... 씁쓸하네 씨벌..
길어야 몇 개월, 이런 식으로 진단이 나온거?”
“ㅋㅋ 그래.. 웃을 상황이 아닌데 속이 쓰리네..
다른건 장담 못하는데~ 등신 의사놈들이 한결같이 똑같게 하나는 짚더라.
길어야 륙개월.. 짧으면 삼사개월만에 횡사한다고..”
“......... 아..”
길어야 반년.. 후..
불쌍한 놈..
그 순간 현서는,
오늘 꼭 일부라도 긍정적인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술집에서 나와, 2차를 또 가자는 경훈의 권유에도 아랑곳 않는다.
지금 술을 더 쳐먹게 생겼냐...
심란한 마음을 붙잡고,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향한다.
차 뒷자리에 앉아서도 내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같은 날..
달빛은 참 하얗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구나..
늦은 밤에 마주하는 아내는 역시 아름답다.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 씀씀이도 지혜로워서 더욱 예뻐 보이는 아내.
잔뜩 술을 먹고 온 남편 앞에서 서운한 티를 조금 내지만
곧 밝게 웃으며, 얼마나 속상한 일이 있었느냐고..
어깨를 기분좋게 두드려주며 어서 쉬라고 말한다.
“호호, 왜 그렇게 자꾸 빤히 얼굴을 쳐다봐요..?”
“.... 아니.. 이뻐서..
쳇, 내가 내 마누라 얼굴도 뚫어지게 못보나?”
“키득~ 이이는 참.. 그런건 아니죠..
그냥 있잖아요, 여보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가득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예요”
눈치가 귀신이다.
얼마 같이 살지 않았어도,
시시 각각 그날 그날에 따라 변하는 현서의 기색을, 주연은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자잘한 회사 일이야..”
“왜요~? 또 찌질한 부장님이 어디서 화풀이를~ 막 갈궈대셔요?”
“뭐...ㅋㅋㅋ
너.. 막 찌질한 부장이 화풀이한다는 말은 푸하하..”
“호호? 왜요.. 가능하면 기분 좋아지게~ 재미나게 표현해본건데 히~”
“하핫, 아니다~ 일단 밥부터 좀 먹고 말하자~”
“네~ 오늘의 메뉴는 무얼로~? 힝~”
“ㅎㅎ 대강 먹고 왔으니까, 가볍게 간식이나 좀 줘”
“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야..
참 해맑다. 어린 아이같아.
이럴 때 보면 가끔 둘이서 장난칠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정말 들어맞는다고 느낀다.
저, 언제까지나 천상 여자이고 싶어요.
여고 시절의 순수했던 그 추억과, 감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금쪽 같은 아내의 속삭이는 말을 생각하니, 웃음이 번진다.
그런 아내를 내 어찌~ 휴우.
몸도 고되고, 머릿속도 궁리로 뒤죽박죽이 되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도 맘껏~
사랑하는 아내를 끌어안고 사랑을 불태우고 싶은데..
막상 경훈과 성민의 일을 떠올리니,
베란다에서 밤 늦은 시간까지 주구장창 줄담배만 피게 된다.
다시 사흘이 지난 뒤.
이틀 동안은 종일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업무에 전혀 집중이 안됐다.
속도 꾸역 꾸역 얹혀서 넘어오고..
망할 놈의 윤부장 개새끼는 꼭 그럴 때 와서 속을 헤집는다.
...
오늘은 몸도 정신도 멀쩡한 상태다.
어제 못했던 전화를 해봐야 하는데...
두근 두근..
액정을 뚫어지게~ 아까부터 수시간째 들여다만 보고 있다.
누가 연락이 와서가 아니다.
경훈이 헤어지면서 찍어준, 성민의 번호였다.
번호도 없었구만 글고 보니...
생각할수록, 자신이 나중에 나이 먹고 성민에게 사과했던 것들과
진심을 다해서 빌었다고 기억했던 내용들은..
이제와서 정말 당당하게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었다.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고 마음의 면죄부를 얻기 위해서였지,
하찮게 여겼던 성민이가 정말 잘되길 바래서가 아니었자나..
아직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는 남아 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결혼식때도 내심 오지 않기를 바랬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지..
오늘 전화해봐야할텐데?
보나마나 오늘 저녁쯤이면, 경훈이 전화를 걸어 경과를 확인해볼 것이다.
3일 정도는 생각할 말미를 주겠다고 했으니...
꼭 이럴 때는 친구가 아니라 무슨 상전같다.
개새끼, 아무리 성민이가 안됐더라도~
지도 나랑 불알 사이면, 내 입장도 더 배려해줘야지..
일주일도 아니고 딸랑 사흘동안 생각해보라니..
후...
부장이 없는 틈을 타 또 나가서 담배를 찾는다.
요즘엔 회사 건물내 어디서든 다 금연구역이라,
번거롭게 옥상까지 와서 피어도 눈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