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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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저녁.

7시 40분을 넘어서 어렵게 퇴근한 현서.

오늘 컨디션은 썩 나쁘진 않지만, 어서 집에 가서 잠을 보충하고 싶었다.

이쁜 마누라랑 어제 한바탕 힘을 쓰고 나니..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는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내에게 온 톡을 확인하는 순간-

경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고, 총무과장님 왠일이십니까~”

“그래~ 어디냐 지금~ 퇴근했어?”

“했지~~ 이제 회사앞에서 차 몰고 나간다.. 니는 어디냐?”

“나는 진작 끝나서 지금 밥무러 왔다.

너 오늘 회식 같은거 없지?”

“그딴건 없어.. 오늘은 일찍 가서 쳐잘끄다~”

“ㅋㅋ.. 술 먹으면서 오늘 얘기좀 하자”

“전에 그 성민이.. 얘기 말인가?”

“그렇지.. 이어서 더 해야하니까”

“........

너 어딘데?”

“논현동이야. 이제 식사 거의 끝나가니까~ 전에 가던 선술집에서 보자”

“허~ 벌써 밥을 다먹다니 팔자 좋네.. 알았어~ 콜”

현서와 경훈은 대치동에 위치한 단골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주인장이 유쾌한 성격의 호인이고, 재미난 인테리어를 즐기는 편이다.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도라에몽 풍선이 바구니에 앉아 손짓한다.

작은 원피스 포스터와 헬로키티 그림도 있고..

일본식 인형을 비롯하여 내부 소품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아늑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두 친구.

후리카케가 뿌려진 볶음밥과, 아삭한 질감의 돼지숙주볶음을 안주삼았다.

주거니 받거니~ 여러차례 사케를 마신 뒤 취기가 오른 두 사람.

그제야 오늘의 본론인 성민 이야기로 들어간다.

“그래서 말야...”

“응~ 성민이 새끼.. 진짜 오늘 내일 하는거야?”

“그렇다네.. 쓰불넘이.. 잘 연락이 되도 않는 놈인데..

이 색끼가.. 별안간에 나타나 전한다는 소식이 그러네..”

“끄윽~.....

어쩌겠냐... 짠하기는 하다만..”

“성민이가 나랑 거의 유일하게 친했잖냐”

“그렇지.. 그동안 꾸준하게 걔랑 연락했어?”

“어 글지~ 처음 너한테 소개시켜준 사람이 난데.. 내 친구 내가 챙긴다.

우린 더구나 중고딩때부터 불알친구였응게”

“하긴 그랬다..”

그랬지.. 맞네.

스무살 무렵에 갓 만난 네 사람에 비해서, 경훈과 성민은 어릴때부터 돈독한 사이였다.

넷이 재수할 때 이미 대학생 신분이던 성민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경훈 소개로 다 같이 친해지게 되고..

다섯 명은 그때부터 같이 어울리고 놀며 친분을 다지게 된다.

생각나네 처음 만났던 그때가..

처음 만났던 그 시간은 정말 즐겁고 유쾌했었다.

자잘한 기억의 단편들을 끼워맞추며~

홀로 십수년 전 20대 초반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현서.

그런 모습을 옆에서 경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고 있다.

“툭 까놓고 말해보자, 현서야”

“...... 뭘 까자고..”

“뜬금없지만, 지나간 일이라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 샛끼가 또오~ 나 옛날 얘기하는거 시러하는거 아는 놈이..”

“닥치고 그냥 들어~ 오늘은 상황이 상황아니냐~?”

“하아.. 그럴 타이밍이 맞기는 하다만..”

경훈이 무언가 옛날 얘기를 꺼내려 할때마다,

지금처럼 현서가 얼굴이 굳어지며 불편해할 때가 있다.

현서의 지난 과오로 인한 일이기 때문인데..

현서와 친구들이 만났던 시기는 때마침 IMF 사태가 터진 때였다.

온 나라가 불황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어려운 시절..

조그마한 필터 납품업체를 운영하는 부친을 둔 덕에

너도 나도 힘들다는 그 불경기에도 현서는 물질적으로 크게 쪼들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일 때도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지금에 비해서 스무살 또래 답게 꽤나 막나가는 마이페이스였던 것이다.

맞아. 내가 생각해도 존나 대책없는 놈이었지..

술은 원래 잘 마시고 잘 놀던 편이었지만

특히나 재수시절에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유흥문화를 즐겼다.

그렇게 아쉬운 것 없이 써가며 잘 놀았는데도

어째 석준을 제외하고 세명은 덜컥 대학에 붙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현서는 타고난 천성이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안도 그런대로 부유하고 잘 놀다보니~

나중에 경훈 소개로 알게 된 성민에게도 초면부터 너무 편하게 대해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훈과 현서는 잘 먹고 자라서 풍채가 좀 있었는데..

집안이 지지리도 어려웠던 고학생 성민은 아주 왜소한 체격이었다.

현서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안경을 썼지만

성민의 경우,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부터 시력이 나빠 안경이 필수였다.

흔히들 기억하는~

만화 영심이에서 남자친구로 나왔던 경태를 떠올리면, 성민과 매치가 쉬울 것이다.

꾀죄죄한 행색에 잘 못 먹어서 부쩍 야위었던 그 친구..

처음 만나고 얼마 안 지나서부터- 아랫사람처럼 부리곤 했다.

결정적으로 지금 현서가 불편해하는 사연은 무언가?

성민이 대학시절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를 현서가 가로챘던 일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지독한 실연의 아픔을 심어준 것인데..

한 여자에게 크게 목매지 않고 장난감 정도로 가벼이 여겼던 그와 달리

순정남 성민은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여자를 섬겼었다.

그런데 그의 청춘을 짓이겨놓았던 현서는 

별 힘 안들이고 손에 넣은 여자도 지겨워, 바로 이별을 통보한다.

아픈 기억이다.

진짜 철도 없었고 안하무인이었지. 나는 쓰레기였어.

성민이 사랑했던 그녀를 품에 안았던 그날밤.

현서는 의외로 그녀가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럼 저 등신같은 성민 새끼는 아직 뚫지도 못했다는 얘기잖아.

이쯤되면... 보통의 경우는 없던 죄책감이라도 생길 수 있기 마련인데

남자 구실도 못하는 고자 녀석이라고, 당시는 성민을 욕했다.

그 여자 얘기를 이제와서 왜?

지겹도록.. 시간이 흘러 잊혀질만하면 경훈이 나타나..

가엾은 친구 성민을 대신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귀에 인이 박혔어 아주 씨바알..

근 5~6년 가까이 성민에 대한 언급을 아예 안하더니,

오늘 몇 년만에 다시 그 얘길 무겁게 꺼내는 거다.

결론을 내기 전에 깔아두어야할 말이 있으니 잠자코 들으라는 경훈의 말에..

고집불통이고 오만했던, 예전 현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십몇년전부터 현서는 유독~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경훈에게는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체격도 현서 본인보다 좀 더 우람하고.. 잘 먹어서 퉁퉁하니 체격이 좋아진 그에 비해,

중고등학교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온 경훈.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몇가지 무술 실력까지 갖췄다고 했다.

거기에 은근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이러하니.. 그렇게 여간한 사람을 아래로 깔보고 함부로 대하던 현서도,

유일한 두 사람, 아버지와 경훈 앞에서만은 까불지 못했다.

“십새끼야.. 내가 거친 욕은 안하고 싶은데.. 너 참 쓰레기짓 많이 했어.. 끄윽..”

“...... 그래.. 니 말이 죄다 맞는 말이다..

이제 와서 내가 뭐라 지꺼릴 말이 없어..”

“이 샛귀~ 왜 뭐라할 말이 없냐, 반성하는 마음,

미안해하고 사죄스러운 남자로서의 결의, 이런게 없어서 되겠냐?”

“아니 그게 저.. 경훈아.. 그게 내 말은..”

“듣기 싫어 시발... 끄윽~ 아.. 술이 켸속 들어가네~ 야.. 소주 하나 더 시켜”

“적당하게 마시지 그래~ 아까부터 소맥에 계속 병나발 불었는데..”

“시켜라~”

“끙... 그럼 도수 낮은거 사케로 시킬게..”

지은 죄 많은 현서, 오늘 고양이 앞의 쥐다.

쩔쩔매는 모습도 오랜만이라고~ 본인도 느낀다.

그래도 경훈은 현서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워낙 절친한 사이라

고깝게 들릴수도 있는 직언, 폭언들도 유들하게 잘 넘길 수 있다.

정종을 홀짝이며, 경훈의 말이 이어진다.

“너 문디야.. 전에 왜 했던 말 있잖냐..”

“대뜸? 케케~ 야 안주도 챙겨먹어”

“냅둬.. 그~ 끄윽.. 뭐지.. 니 마누라 이름?”

“주연이?”

“어~ 너 와이프 걔가 서주연이라 그랬지~?”

“설주연.. 이름은 똑바로 해야지 ㅎㅎ”

“서나 설이나 새꺄.. 몇 살?”

“..... 스물.. 일곱..”

“하~ 이거! 참나.. 이 색기 진짜 쓰레기네 안되겠어..

개 도둑놈이구만.. 끌끌끌”

“ㅋㅋㅋ 그래 그래~”

“그려 주연이는 여전히 내조 잘하고, 말 잘 듣구?”

“아무렴~~ 항상 한결같지... 

천상 여자니까 걔는..”

안하던 주연이 얘기를 왜 꺼낼까?

그때까지만 해도 현서는 약간 갸웃~하는 정도뿐이었다.

경훈은 벌개진 눈과 어울려 잔뜩 취한 얼굴로 지그시~ 현서의 얼굴만 물끄러미 본다.

갑자기 마누라 이야길 꺼내더니,

부담스럽게 무거운 분위기를 내며 한참동안 말을 안했다.

그러기를 벌써 삼십여초..

현서는 잘 말하던 경훈이 뚝 흐름을 끊자,

달리 할 말도 없었고 어색해서 가만히 있었다.

“너 말야.. 내가 지금 반 대가리 꼭지 돌아서 걍 떠드는데~

술김에 꼭 하는 얘긴 아니고.. 끄윽~”

“어.. 말해..”

“니 존나 나랑 개같이 놀고 막 살 때 기억나는지 몰겠다~

그때 얘기하다가, 니가 지껄였던 말..”

“무슨..?”

“추임새 넣지 말고 듣고만 있어,

너 시발 주연이 만나기 전에 후리던 년들도..

다른 남자들한테 일부러 몇 번씩 대주라카고, 미친짓 좀 했제?”

“............

그러긴 했쥐.. 나만 즐기긴 아깝다는 그런 넓은.. 박애정신이랄까 헤헤헤”

“미친 새꺄~! 지 여자를 딴 넘 품에 안겨주는게 씹변태지,

무슨 그런 개떡같은 취미가 있어..”

“야 너 취했어 훈아.. 그거 한창~

진짜 철없던 어린애일 때 뭣 모르고 하던 짓거리지..

지금은 그딴 짓 안한다..”

“닥쳐, 안하긴 뭘 안해, 개가 똥을 끊지 니가 안한다고?”

“씨발.. 좀 그만해.. 왜 이런 얘기 하냐?

성민이 얘기만 하는 날이잖아, 오늘 같은 날”

“........ 그랬지.. 

불쌍한 우리 성민이 얘기할려고 나오라캤는데..

그래, 성민이 땜시 니 마누라 말도 꺼내는거담마”

“성민이 때문에..?”

거기까지 듣던 현서는,

갑자기 등골이 왠지 모르게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촉이 좋은 그의 예감을 보자면...

이 때가 서서히 막이 오를 불행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만땅 취한 경훈의 말이 이어진다.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 

어째 경훈의 취한 입에서 나올 말이 조금 짐작이 갔다.

다시 한동안 뜸을 들이고~

아까처럼 게슴츠레 느끼한 눈빛으로 현서를 보는 경훈.

앞서 얘기한 성민의 첫사랑을 취한 이야기말고도

사실 현서가 성민을 꼬붕처럼 부리던 그 시절,

해서는 안될 못된 짓거리를 한 일이 또 있었는데...

니 부정한 짓거리는 내가 잘 알지, 그런 뉘앙스를 내비친다.

바늘 방석도 어지간하다.

예전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괴로워했던 성민이고

지금은 몸이 다 망가져서 곧 죽을 몸이 되어가니, 마지막 죽는 사람 소원좀 들어주라는 것이다.

현서는 예전, 자신의 네토 경험을 그가 언급할때부터 촉이 왔는데

덜컥 본론이 튀어나왔다.

아... 왠지 이런 흐름일 것 같긴 했는데..

이어진 말은..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는 소리였다.

“주연이를..

성민이 품에..안겨주라고..?..”

“그래! 한번 시원하게 주라~ 이기다~”

“하하~~ 너 제정신으로 하는 말 맞지?”

“아 짜식이, 내가 너한테 허튼 소리하든? 암리 취했어도 말이다”

“.... 확실히 헛소리하는 놈은 아니지..”

그 말은 맞았다.

기본적인 주량이 세고 몸도 튼튼해서

웬만큼 많이 마시고 취해도 정신력으로 끄떡없는 경훈이다.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니, 본심이 틀림없었다.

경훈의 노려보는 눈이 날카롭다.

현서는 식은땀이 솟음을 느끼며, 잠시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경훈 주변의 여자들 지인들이 있을텐데..

왜 나에게.. 내 소중한 아내를 언급하는 것일까?

현서는 성민에게 과거 몹쓸짓을 했어도

서른 가까이 되면서부터 철이 좀 들고는,

지난 나쁜 행실들에 대해서 철도 들고 크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성민의 야윈 손을 붙잡고..

내가 정말 나쁜 놈이었으니..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며,

때아닌 눈물까지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었다.

그랬던 적도 있고~

아버지 회사가 주저앉으면서, 잘나가던 집안도 조금 어려워지고..

대학 졸업 후 현서가 직장을 다니면서 여윳돈이 생기면 여전히 어려운 성민을 가끔 도와주곤 했다.

가끔 불러내서 밥도 사주고 명절 이럴 때 선물도 종종 주고..

가식이 아닌, 옛 친구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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