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50)

4월 18일

“잘 잤어?”

“네.. 주인님...”

“이리 와.”

“네...”

떨리는 목소리로 레인에게 다가온 알비나는 한 눈에 봐도 겁을 먹은 상태였다. 오늘은 어떤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되고 있는 것이다.

“힘들었지?”

“?!”

레인은 스스로 몸을 낮춰 알비나의 눈을 맞추고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뭐야? 왜 이러는 거지?’

“하아... 어젠.. 하아...”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거리는 이 소년의 생각을 알비나는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더 심한 짓을 상대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깔려있는 것이다. 

“정말?”

“네...”

“후우... 넌 날 믿은 죄밖에 없는데.. 이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하고... 쳇.. 내가 못난 탓이지..”

‘뭐야?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가?’

“주인님께서는 바트라님을 실망시킬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래티샤의 말에도 레인은 우울한 기색을 비추며 알비나의 손을 잡고 한숨을 쉬었다.

“후... 일단 오늘은 푹 쉬자. 난 농장을 관리하러 갈 테니까 너희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해. 얼마 전에 사다둔 주사위 놀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좋아.”

짤막한 말을 남기고 레인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고 집안에는 세 여인이 남았다. 이 집에서의 모든 기준점이었던 그가 사라지자 알비나는 또 다른 어색한 상황에 눈을 굴렸다.

“식사부터 하시죠. 자리에 앉으세요.”

“아닙니다!! 하찮은 제가 감히..”

“주인님이 계시지 않을 땐, 제가 주인님을 대리해요. 의자에 앉아서 식사했다고 주인님께 일러바치는 짓은 하지 않아요. 주인님은 그런 거짓말쟁이는 싫어하시죠. 이미 주인님께서는 알비나님께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을 표현하셨어요. 그러니 기분을 풀고 이리로 오세요.”

래티샤의 말에 키아라도 곧장 거들었다.

“주인님은 공과 사가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어제 있던 일은 어디까지나 노예상인으로서 자신의 일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저희들에게 휴식을 명령하셨고 저희는 그 명령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벌벌 떠는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저... 여러분들은.. 어째서 이런 상황에 적응을 하고 사시는 거죠?”

알비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처음 레인을 만났을 때, 그의 인상은 무척 귀엽고 사교성이 좋아 보이는 소년으로 보였다. 나이는 아마 중학생 정도? 눈에서 묻어나오는 선량함을 알비나는 믿은 것이다. 그래서 지체 없이 그를 선택했다. 차라리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느니 눈앞에 보이는, 최소한 최악의 상황은 피해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소년을 주인으로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 선량한 눈빛의 소년은 어제 자신을 학대하고 유린한 남자로 탈바꿈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욕설과 구타를 퍼부으며 협박을 일삼는 모습에서 이미 그녀는 레인을 경멸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 그 경멸 뒤로는 공포심과 절망감이 자리 잡고 말았다.

“적응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그런 거겠죠?”

“전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저를 언제나 소중하게 대해주셨고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원하신다면 전 다른 누군가의 노예가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비나는 두 여인의 다른 대답을 들으며 이들도 각각 자신의 생각이 있는 하나의 주체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정말 기계처럼 둘이 똑같게 레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노예였다면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당신은 좀 이상해요. 어제 당신을 두들겨 팼던 건 기억나지 않나요?”

알비나의 눈에는 둘 다 이상하다는 공통점은 있었다. 아름답고 어딘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는 말수가 적은 것 같지만 어쨌든 주인에게 총애를 받는 것 같았다. 반면 무뚝뚝한 기사처럼 보이는 여자는 심지어 주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굳이 둘 중에서 누가 더 이상하냐는 질문을 한다면 알비나는 키아라가 더 이상하다고 답할 것이다.

“분명 어제는 아팠습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께서 제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몸보다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분께서는 어설픈 연기를 하신 겁니다. 독하게 당신을 조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요..”

“키아라님, 그런 말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주인님께서 모질게 마음을 먹고 얼마나 노력하신 건데!”

“앗!!”

키아라는 곧장 울상이 되었고 래티샤는 난감해 했다. 그 둘의 모습을 보며 알비나는 조금 헷갈렸다.

‘뭐지? 정말 저 말이 사실인 건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가? 그보다 저 기사출신의 노예는 의외로 입이 가벼운 모양이군. 그런데도 그 남자는 그걸 지금까지 봐주고 온 걸까?’

“키아라님, 주인님께서 당신에게 그토록 말조심을 하라고 강조했는데 또 이런 실수를 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키아라는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비굴하게 그리고 굴종적이게.

‘이상해.. 노예들끼리도 서열이 있어.. 그럼 나도.. 꿇어야 하는 건가?’

어쨌든 알비나는 눈치가 빠르고 자신도 키아라의 옆에 슬그머니 가서 무릎을 꿇었다.

“하아... 주인님께서 너무 착하셔서.. 그분은 노예상인이 어울리는 분이 아닌데... 두 분, 일어나세요. 주인님께서는 저희가 편안하게 오전을 쉬도록 명령하셨어요. 그러니 저희는 이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해요. 이건 우리들끼리.. 그래요! 우리들끼리의 비밀로 하죠. 알비나님!”

“네?!”

“방금 키아라님이 실언한 것을 못 본 것으로 해주시겠어요?”

“네.. 네! 물론입니다!”

“키아라님은 스스로 반성하세요. 주인님께서는 이미 예전에 입을 함부로 놀린 노예를 가차없이 팔아버리신 적이 있어요. 주인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었고, 주인님이 자신의 사업을 가르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아이는 주인님의 믿음을 배신했고 그 대가는 차가운 고기조각이 되고 말았어요. 전 키아라님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음... 아무래도 이 집은 규율이 갖춰져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적어도 내가 겪고 있는 동물과의 추접한 짓은 어쩔 수 없이 선택된 강경책과 같은 건가봐.. 하긴.. 주인..님도 나에게 어제부터 무척 미안해 하셨지. 전혀 웃지도 않고 우울해했어. 역시 좋은 사람인건가? 하긴 여기같이 이상한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주인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겠지.. 단지 내가 운이 나쁜 시기에 저분을 만난 건가봐..’

알비나는 이제야 조금 레인을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두렵고 걱정스럽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의 주인은 미안함이란 마음은 가지고 있으니까 차라리 조금 나은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잘 했어요. 키아라님.’

‘감사합니다, 래티샤님.’

알비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표정이 바뀌며 고민 끝에 약간 밝아진 표정이 되자 래티샤와 키아라는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짓으로 알비나는 완벽하게 속인 것을 자축했다. 아마 주인님께서는 이 일이 끝나면 알맞은 보상을 해주실 것이다.

-짜여진 각본대로-

래티샤는 자신이 겪었던 일과 비슷한 스토리를 짜내었고, 레인에게 어젯밤 목욕탕에서 일러주었다. 레인은 흔쾌히 그 작전에 동의했고, 키아라는 침실로 불러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래티샤의 첫 번째 작전이 실행이 되었고,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애초에 이 달콤한 오전의 휴식은 단순히 알비나를 쉬게 할 목적이 전혀 아니었다. 아무리 모멸차고 더러운 조교라고 해도 빨리 신속하게, 스스로의 의지를 꺾지 않으며 하기 위해선 무언가 수긍을 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그 지독한 상황에 던져줘야 한다. 그렇기에 셋은 각본에 따라 연기를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알비나는 스스로 보드판에 주사위를 던지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자신이 보드판에 놓인 말인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셋은 즐겁게 오전의 시간을 보냈다.

“휴, 다녀왔어. 점심은 먹었어?”

“네, 모두 먹었어요.”

“조금 더 먹을 수 있지? 농장에서 계란을 좀 가져왔는데 삶아줄래?”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래티샤가 받아든 계란을 본 알비나는 어제 봤던 끔찍한 장면들이 다시 떠올라 몸을 떨었다.

‘몸 안에 하피의 자궁을 이식해서 알만 낳고 살게 만든다니... 그런 끔찍한 짓 때문에 생긴 부산물을 먹으라고?’

오전의 일로 제법 마음은 풀렸지만, 여전히 거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흠, 여전히 고민을 하는 모양이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는 아직 부족하다는 건가? 그런 것치곤 어젠 돼지한테 잘 대어주는 것 같더니. 뭐, 버텨봐야 제깟 년이 내 뜻대로 바뀌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지.’

레인은 이미 자신감에 차 있었다. 키아라의 조교를 성공하였기에 그보다 못한 알비나를 바꾸는 건 그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따뜻할 때 드세요.”

“너희들도 먹어.”

“네, 주인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레인과 두 미녀는 맛있게 계란을 먹기 시작했다. 

“넌 안 먹어?”

“.... 솔직히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곳엔 암컷 가축이 존재하지 않아. 그 귀한 돼지, 소, 말과 같은 가축들이 멸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떤 일도 해야만 하지. 그렇게 찾은 것이 바로 노예들을 개조시켜 가축들의 명맥을 유지하도록 하는 거야. 난 네가 살던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이곳만의 법칙과 삶의 방식이 있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고 해도 이곳에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는 거지.”

문화의 상대성, 다양성에 대해 레인이 파고들자 알비나는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는 기본상식처럼 다 아는 이야기이다. 분명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를 노예로 부리고, 가축취급하고, 이상한 수술을 시켜 동물로 쓰는 이런 것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안 먹을 거야? 이곳 슬레인에서 얻을 수 있는 우유, 고기, 치즈, 계란과 같은 모든 것들은 바로 노예들이 만들어 주는 거야. 심지어 네가 먹고 있는 사료에도 일부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지. 끔찍하다고 여긴다면 굶어죽는 방법밖에 없어. 스스로를 변화시켜! 언제까지고 방황만 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겠..지요.. 그럼 하나만 먹겠습니다.”

“그러시던지.”

시큰둥하게 반응하면서도 레인은 손수 계란을 까서 소금에 찍어 건네었다.

‘나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은.. 역시 일부러 거친 일에 적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란 건가? 그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이 무척 깊구나..’

알비나는 솔직하게 조금 감탄했다. 잔혹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자상한 일면이 많고, 자신에게 이 상황의 불합리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저.. 주인님..”

“편하게 말해. 떨지 말고.”

“오후는.. 조교하실 계획이 없는가요?”

“오늘은 쉬어라고 했을 텐데? 왜? 어제처럼 조교 받고 싶어?”

알비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쨌든 불쾌한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반면 그에 대한 믿음이 조금 생기자 약간의 의욕이 솟아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 하지만 두려워요.. 흑흑...”

머리로는 이해해도 동물에게 범해지는 것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래티샤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위로를 건넸다.

“알비나님, 힘드셨죠?”

“정말.. 무섭습니다. 이러다가 제가 정말 동물이 되어 버릴까봐.. 이러다가 우리 안에 갇힌 노예들처럼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까봐...”

알비나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수간행위 그 자체보다도 자신도 그러한 노예들처럼 나락으로 떨어져 평생 동물처럼 울며 알을 낳거나 도축이 되고, 우유를 짜내는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주인님, 알비나의 조교를 위해 저도 함께 수간에 참여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알비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래티샤를 바라보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자발적으로 해주겠다고 한다. 그것도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제가 함께 끝까지 버텨드릴게요. 그럼 더 이상 무섭지 않으시겠죠?”

“아.....”

알비나는 래티샤에게 안겨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척 봐도 자신보다도 10살은 어려보이는 이 소녀는 기꺼이 자신만 고통 받아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자진해서 함께 받아주겠다고 하고 있다. 알비나의 눈에 래티샤는 마치 아름답고 자비로운 성녀 같았다. 

“알비나, 어때? 해보겠어?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최고의 농장관리노예로 키워줄 거야. 널 절대로 농장에 굴러다니는 동물들처럼 만들진 않을 거야.”

레인은 또 다른 계란의 껍질을 까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조용히 계란을 집어서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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