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이틀이 지났고 나나는 다시 노예상인길드로 보내졌다. 처음과는 다른 의젓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무엇보다 검에 대해서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키아라는 무척 뿌듯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고민거리도 있었다.
‘3일째..’
그에게 뽀뽀와 같은 애정을 받은 지 정확히 50시간 35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자상하다. 무리한 일을 시키지도 않으며 편안하게 지내도록 배려해주며 언제나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그럼 좋은 것이 아닌가?
아니다. 반대로 키아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의 성격은 자상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할 것으로 보여지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그런 짓’을 왜 했을까?
‘남자란 원래 그런 생물인 걸까?’
의문이 의문을 쌓고 그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의 위로 자신은 여전히 트리스테인의 기사이며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무겁게 압박을 가해왔다. 평생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자신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낯설고 답답했다.
‘키아라 언니, 꼭 한 번 해보세요!’
나나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 설명으로만 들어도 정말 파렴치하고 부끄러운 짓인 것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시면.. 이야기를 해볼까? 아마 잘 상담해주실 것 같은데..’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는 습성이 생기는 것 같아 키아라는 곧바로 생각을 뒤엎으며 반성했다. 하지만 그러자 다시 고민이 처음으로 되돌아가 시작되며 반복적으로 머리를 아프게 했다.
‘역시 정신이 흐트러져서 그런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손에 쥐었다. 처음 인형을 빼앗기고 검을 쥐게 되었을 때, 그녀는 검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것일까? 최고의 검술가인 아버지의 피를 훌륭하게 물려받은 그녀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검을 이해했고 배워나갔다. 어느새 이 검이야 말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그 자체의 물건이 되어버렸다. 싫어했지만 이젠 떼놓을 수 없는 물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유일한 물건을 쥐고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볍게 천 번, 마음을 담에 천 번, 그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담아 또 천 번.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자 개운해지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 돌아오셨습니까?”
“운동하고 있었네?”
“수행은 항상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무섭게도 점점 더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이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너무나 포근하고 편안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뭘 해주면 좋을까?
‘언니는 말투부터가 문제에요. 조금 부드럽게 말을 해보세요. 항상 군인처럼 딱딱하게 굴면 여자로서 매력이 완전히 가려서 사라지잖아요!’
나나의 조언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혹시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실망하지 않을까?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자신의 성격과 다른 나약함이 자꾸 늘어나며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심호흡을 하고 레인을 향해 입을 떼었다!
“주.. 주..주인..주인님.. 고생하셨어...요...”
“응? 뭐라고??”
“아닙니다!! 아무것도!!!”
겨우 입을 떼었는데 그가 듣지 못해서 서운한 것일까? 아니면 바보같이 말을 더듬은 것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 것일까? 얼굴이 일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하며 복잡한 속내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어디 아파? 표정이 어두워 보여.”
“아닙니다. 컨디션은 매우 양호합니다.”
“너무 무리해서 운동한 거 아냐?”
“앗?!”
레인이 다가와 이마를 맞대자 키아라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운동하고 나선 곧바로 씻어. 땀이 식으면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반쯤 울상이 되어 샤워를 하고 나왔다. 확 그냥 욕실에서 울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눈이 퉁퉁 부어버리면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에 꾹 참았다.
“키아라, 이리 와 줄래?”
“네. 명령하실 일이라도?”
“자, 선물.”
“...네?”
뜻밖의 공격에 당해버렸다. 이건 검술로 말하자면 파고들어 찌르는 아주 까다로운 공격과 비견될 만한 수법이었다. 곰 인형.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의 냄새가 나는 이 갈색의 인형은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었다. 완벽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건...”
“나나가 떠나서 섭섭해 할까봐.. 난 노예상인이라 앞으로도 더 많은 노예가 이 집에 올 것이고 또 팔리거나 원래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겠지. 네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일들을 겪으면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어.”
“아... 그런.. 감사합니다.”
하지만 키아라는 반대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방금 그가 말한 ‘네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너무나 듣기 싫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작고 귀여운 선물은 너무나 근사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다루겠습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 점점 더 그에게 돌아갈 방법을 묻는 것이 꺼려지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에게 안긴 인형은 귀엽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표정이 너무나 슬프게만 보였다.
‘오히려 성적인 보상이 사라지자 고민거리만 늘어난 모양이군.’
레인은 시시각각 변하는 키아라의 표정을 확인하면서도 일부러 거리를 뒀다. 먼저 달려들어 무언가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의기소침해졌다. 겉으로 보이는 강한 성격과는 달리 내면은 상당히 여린 면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제 거기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결국 조교는 상대의 마음을 읽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을 거역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레인의 철학이다.
‘성적인 것을 잘 느낄지는 몰라도 그게 전부는 아닌 성격이라는 거군. 고결해. 참으로 고결해. 하지만 아마 자신이 갈등하고 있는 상황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 불안해하는 모양이군. 스스로 달려들면 좋은데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인가?’
레인은 일부러 언젠가 키아라가 떠난다는 것을 전재를 깔고 말을 던졌고, 그녀는 분명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둘 사이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이곳이 좋다거나, 반드시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종용한다면 곧바로 저항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니 더 키아라가 떠나서 아쉽다는 뉘앙스를 풍겨야만 한다. 그녀라면 무난히 챔피언이 될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레인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허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