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50)

4월 10일

“키아라,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아침이 밝아오고 눈을 뜨자 서로가 보인다. 알몸인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것도 남자와 같은 침대 아래에서! 

“흑흑흑....”

“엥?!!”

키아라는 레인의 이불을 몸으로 감싸곤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았던가? 레인은 어리둥절했다. 아니면 후회하는 걸까?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까닭을 물었다.

“외간남자에게... 처음을.... 흑... 자제심을 잃고 그만... 흑흑...”

“....”

순진해도 도대체 어디까지 순진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레인은 바보 같지만 불쌍한 노예를 일단 위로해주기로 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라면 위로를, 채찍이라면 채찍을 휘두를 것이다.

“괜찮아요.. 키아라님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흑흑.... 이젠 시집도 못가요...”

솔직히 웃음이 터질 것 같지만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조교들의 첫 단추였을 뿐인데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 괜히 미안해진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주인님을 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절 위해서 해주신 일이지요. 거절하지 않은 건 제 자신입니다. 오히려 이런 배려를 감사해야 옳은 것이겠지요?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놀랐구나..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당황할 줄은.. 하지만 그래도 여자로서 행복할 권리를 누린 건데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제의 키아라는 정말 귀엽고 솔직한 여자아이였는 걸요?”

“감사합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레인의 배려에 답했다. 

쪽-!

레인의 기습적인 뽀뽀에 눈이 동그래졌다. 자상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정말 귀엽다는 말을 달콤하게 속삭이자 얼굴이 새빨개진다. 레인은 이 노예는 칭찬에 무척 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칭찬을 해준다고 해도 우쭐댈 성격도 아니기에 무척이나 고마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옷은 어제 자고 있을 때 빨아서 말려뒀어요. 여기 있으니 입고 나오세요.”

작고 귀여운 소년은 그녀에게 어젯밤 용기를 내어준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속삭여준 뒤 방문을 닫고 나왔다. 혼란스러워 할 때 밀어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때론 숨을 고르게 해주고 마음의 문을 열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레인이 외출을 하고 래티샤는 자고 있다. 혼자 남은 그녀는 레인의 방을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침대시트를 갈고 새 시트를 넣었다. 그리고 시작된 청소, 하지만 치울 것이 거의 없어서 그것도 잠시였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자 보이는 몬스터, 여자 사냥을 하고 돌아온 사냥꾼들 이곳은 포식자들의 세계다. 도저히 밖을 제정신으로 바라보고 싶진 않았기에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지루한 시간, 그녀는 여러 가지 걱정을 했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레인을 떠올렸다.

정말로 좋은 사람, 이게 키아라가 느낀 레인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런 이상한 곳에서 그를 만난 건 틀림없는 행운이다. 그리고 만약 돌아가지 못한다면.. 못한다면..

‘평생 그의 노예로서 충성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차라리 노예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지만 그는 생각하는 것보다 작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키아라는 인정했다. 자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 기절했던 자신을 강간할 수도 있었고, 팔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아침 혼란스러워 투정을 부렸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해준 모든 배려들이 무척 감사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건 래티샤님에게 대한 배려가 아니다. 어제의 일은 자제를 못한 나의 잘못이다. 래티샤님이 아신다면 슬퍼하시겠지.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안 된다. 그래.. 절대로..’

스스로 다짐을 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근력운동, 집에는 최소한의 근력향상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이 있어 충분했다. 이왕이면 검을 사달라고 하고 싶지만 감히 사정이 좋지 못한 은인에게 사정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한계가 올 정도로 열심히 하고 깨끗하게 씻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점심이 넘었을 때쯤 레인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척 봐도 반항적인 눈매. 몸에는 인두로 지진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주인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응, 먹고 왔어. 키아라는 먹었어?”

“아니요, 주인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이, 내가 점심이 넘어서 오지 않으면 밥은 제때 먹어. 키아라가 배고픈 건 내가 싫으니까.”

“감사합니다. 이분은?”

“노예상인길드에서 데려온 아인데...”

“이거 안 풀어?!!”

“음.. 성격이 좀.. 그래..”

“어이, 땅꼬마!! 너처럼 보잘 것 없는 집에 보잘 것 없는 노예년이군. 거기 젖탱이 큰 년! 뭘 봐? 불만 있어?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뭘 하려는 거지?”

“음... 우리 일단 좋게 이야기 하면 안 될까요?”

“퉷! 웃기지 마! 이걸 풀고 사과하기 전까지 나한테서 한 마디도 듣지 못할 걸?”

키아라는 순간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의 은인의 얼굴에 침을 뱉다니!

“뭐.. 뭐야?”

“무례를 사과하십시오.”

“뭐.. 뭐야??”

키아라는 손에 힘을 주고 붙잡은 어깨를 마구 흔들며 벽까지 몰아세웠다. 반항을 하기 위해서 다른 손을 뻗었지만 곧바로 반대로 꺾어 제압하고 익숙하게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수도에서 성문수비를 담당하던 시절 자주 써먹던 체포기술이었다.

“아...아파!!!! 이 빌어먹을 년이!!”

“주인님, 이 건방진 노예의 혀를 뽑아도 되겠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노예는 기가 죽었다. 그녀는 3년 간 기사로서 살았고, 전쟁을 겪었으며 사람을 죽인 적도 당연히 많았다. 자연스럽게 정말 죽일 수 있다는 살기가 흘러나오자 상대는 완벽하게 겁을 먹었다.

“아니... 줄만 풀어줬으면.. 그래! 내가 좀 심한 건 인정하지.”

꽈악!!

“사과하십시오.”

“미안!! 미안해!!”

“똑바로 사과하십시오. 주인님께 머리를 숙이고 진심으로 뉘우치십시오.”

발로 등을 밀어 억지로 개처럼 엎드리게 만들곤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 건방진 노예에게 어떤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음.. 일단 뉘우치는 것 같으니 한 번은 넘어가자.”

“네!!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놓아줘. 이름이 뭐지?”

“나나입니다. 주인님...”

“난 네 주인님은 아냐. 마스터라고 불러라.”

전의가 꺾이자 완벽하게 비굴해져 설설 기는 모습이 레인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심문하거나 제압하는 것이 몸에 벤 직업인데다 정확히 주인의 권한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압을 하고 주인에게 결정권을 준다. 아주 이상적인 보좌역할을 수행하는 노예의 모습이었다. 레인은 이 여자가 진짜로 가지고 싶었다. 집안 내부적인 일들과 더러운 술수들을 래티샤가 맡는다면 바깥으로 드러나는 무력적인 부분과 기본적인 정신무장을 키아라에게 맡기면 좋겠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둘은 아주 좋은 조합이 될 것이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조교가 시작되었다. 본래 산적질을 하며 살아왔다는 나나를 D+급의 검투사로 만들어 올 것이 이번 임무의 목표였다. 레인이 스스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혼자서 안개 숲에서 버틸 정도로 강인한 키아라가 있기에 문제는 되지 않는다.

“칼을 쥐는 모양새부터 틀려먹었다. 자꾸 손을 꼼지락거리지도 말고!”

“네!”

완벽한 군인이 어설픈 시정잡배를 훈련시키는 모습이 재미있어 레인은 시원한 물을 마시며 구경했다. 집이 넓은 만큼 굳이 집 밖으로 나가 훈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휑하고 넓은 거실에서 목검을 들고 조교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발이 꼬이잖아. 이거 봐.”

“앗!”

넘어지기를 수차례 완벽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농락당하자 나나는 분함에 눈물을 보였다.

“분해서 눈물을 보이는 건가? 아니면 아파서? 어느 쪽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마음속에서 패배를 직감하며 임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아무래도 오늘은 이게 한계인 것 같았다. 이미 여기저기에 멍이 보일 만큼 격렬하게 조교를 했으니 충분한 휴식도 중요한 것이다.

“좋아. 고생했어. 나나, 너 먼저 씻어. 그리고 넌 여길 청소해 줄래?”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 알겠습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듯 욕실로 향하는 나나의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주인님, 저 노예는 제대로 된 검투사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아.”

“그럼 왜??”

“그래도 키워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난 노예상인으로서 그걸 충실하게 수행해서 돈을 버는 게 내 직업이야. 이건 다른 일과는 달리 살아있는 누군가를 변화시켜야 하는 일이지. 그래서 어려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건 너무나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지. 자질이 훌륭해도 결국 해내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질이 형편없어도 어느 선까진 노력으로 커나갈 수도 있지.”

“네. 하지만 저건 근성이 글러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눈높이를 맞춰줘.”

“눈높이요?”

“그래! 넌 인간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너무 강해. 아마 제대로 된 무기만 쥐어주면 그랜드 챔피언까지도 노릴 수 있는 수준일지도 몰라. 그런 네게 배우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단단하고 높은 벽처럼 느껴지지. 넌 나나를 가르치면서 단 한 차례도 칭찬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볼 땐 충분히 노력하고 잘한 부분들이 많이 보였거든? 예를 들자면 마지막엔 그래도 한 번 피하고 넘어졌잖아?”

“그럼 일부러 제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져달라는 뜻입니까?”

“아니지, 어차피 상대는 네가 너보다 못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네가 억지로 져준다고 해서 상대가 그걸 기뻐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네 기량이라면 적당히 수준에 맞춰 놀아주며 조금 더 다른 동작을 유도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검투사는 단순히 검을 조금 만졌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강한 의지를 키워줘야 해. 쟨 더군다나 근성이 나쁜 산적이었잖아? 평생을 숨어살며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강한 힘에겐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 근성이 뿌리 깊게 박혀있어. 오히려 내가 볼 땐, 검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그런 정신상태를 바꿔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말씀에 따르죠.”

“정말 고마워. 사실 래티샤도 아프고 나 혼자서 뭔가를 가르친다는 건 많이 힘든 일이었거든. 그래도 네가 있어줘서 너무 다행이야.”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할.. 읍?!”

레인은 기습적으로 키아라의 입술을 덮쳤다. 방금까지 열심히 운동을 한 탓에 평소와 다른 조금 단내가 났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아.. 대낮부터... 래티샤님이 아시면 슬퍼하실 텐데...’

하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빨려 들어가는 늪처럼 너무나 달콤하고 고마웠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리드에 맞춰 스스로를 낮추고 받아들였다.

“하아...하아...”

“정말 예뻐. 어쩜 이렇게 귀엽니?”

“으으... 감사합니다.”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져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선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여기까지가 딱 적당했다.

“키아라, 넌 나나 곁에서 자도록 해줘.”

“허튼 짓 하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겠습니다.”

슬슬 다음 작전으로 돌입할 생각을 하니 즐거워지는 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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