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50)

4월 7일 오후

“음, 지갑이 아주 가벼워졌군.”

레인은 화이트타운의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래티샤의 각성비용으로 쓴 2000골드, 그리고 빠른 회복을 위해 추가로 계약한 노예의 방 인테리어와 집세를 내고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1319골드. 작은 성공에 도취해 있었지만 반나절 만에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써버렸다는 사실에 조금은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아직 멀었어. 난 더 대단한 노예상인이 되고 말거야. 두고 봐. 이곳! 바로 이곳에! 나만의 세상을 건설하고 말테니까!’

지금은 한 푼까지도 일일이 세야하는 처지지만 앞으론 다를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성공만으로도 레인의 인생에서는 가장 큰 업적을 이룬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더 높은 성공에 목말라 있었다.

“레인님! 오늘도 여전히 멋지시군요. 오늘은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 돼지를 팔려고 왔어요.”

“하하하!! 그럼 어디 상태를 보겠습니다. 흠, 적어도 말썽을 피울 것 같지는 않군요. 살이 적당히 올라있어 도축에도 적합하고.. 네, 20골드입니다만 거래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노예시장으로 가 적당히 뚱뚱하고 의지가 없는 노예를 50골드에 구입한 레인은 미노타우르스에게 20골드에 노예를 제공했다. 상식적으로 30골드를 손해 보는 짓이지만,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오히려 더 여유를 가져보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이웃을 알아두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니까.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사냥을 나가고 싶은데, 혹시 제가 낄 수 있는 무리가 있을까요?”

“흠... 보통 방랑자의 구역에 있는 인간 외 종족들은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하니까, 아마 어려울 겁니다. 혹시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때론 가장 힘든 현장에서 무언가를 찾는 노력도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런 것입니까? 흐음... 좋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지금 당장 갈까요?”

“네?”

레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농장이야 제 동생을 부르면 되니까요. 마침 교대시간이기도 하니, 잘 됐네요. 채비를 하고 오시면 곧 출발하겠습니다. 전 제 동생을 두들겨 깨우러 가봐야 겠군요.”

‘잘 됐군. 이참에 안개 숲이 어떤 곳인지 봐야겠어. 미노타우르스 옆이라면 적어도 죽을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굳이 노예를 얻지 못하더라도 좋은 경험은 얻을 수 있을 거야.’

“보르그, 오랜만이군. 자네가 숲에 간다고?”

“쿡쿡쿡! 친애하는 레인님께서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셔서 나왔지. 그래, 자네는 이 따분한 곳에서 여전하군?”

“흥! 말이 너무 많았군. 어서 나가. 나가서 뒤져 들어와도 시체를 찾으러 갈 생각은 안 할 테니까.”

“쿡쿡쿡.. 멍청하고 나약한 인간들과 우릴 같은 선상에 두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 레인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쿡쿡쿡..”

미노타우르스와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장은 척 봐도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사실 레인은 농장의 미노타우르스의 이름이 보르그라는 걸 처음 알았다.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목책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자 곧 뿌연 안개가 시야를 덮었다.

“잡는 쪽이 가지는 겁니다.”

“당연하죠.”

레인의 대답에 씨익 미소를 짓고는 거대한 나무망치를 들고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이런 얕은 곳에서 밖에 버티지 못하죠. 하지만 우린 다릅니다. 더 들어가 볼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심지어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어. 하늘이 보이지 않아. 그래도 성문에서 5분 거리까지는 뿌옇게 보이기라도 했는데..

크르르르....

거대 늑대가 나타나자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험악하게 빛나며 나무망치를 땅에 휘둘렀다.

깨갱!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습을 본 보르그는 흡족한 듯 껄껄 웃었다.

“인간들은 저 머저리 같은 늑대에게도 당하더군요. 전에 사냥꾼으로 지내던 시절 그런 멍청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루는 혼자서 5명의 노예를 잡았다고 좋아하던 놈이 있었는데, 바보같이 제 앞에서 늑대에게 물려 죽었지 않습니까? 늑대의 아가리를 부러뜨리고 그년들은 제가 모두 접수했었지요. 쿡쿡쿡...”

‘이 녀석 쓸데없이 말이 많은 타입이군. 아니면 심심하게 지내서 그런 건가?’

속내와는 반대로 레인은 그를 추켜세웠다.

“용감한 미노타우르스 일족의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요. 일부러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쿡쿡쿡! 저희의 우정에 비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흠! 저기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살려주세요!!! 살려!!!!!”

“우헤헤헤헤!!!!”

절박한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천박한 웃음소리. 고블린에게 여자가 쫒기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저것부터 잡아볼까요?”

“헉?!!!”

보르그는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 앞을 가로막았다. 여자는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지며 보르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쿡쿡쿡... 꺼져라. 죽기 싫으면.”

“우헤헤!! 우헤헤헤헤!!!”

고블린은 스스로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잽싸게 도망을 쳤다.

“어떻습니까?”

“솔직히 예쁘진 않네요. 나이도 제법 있어 보이고.”

“제가 잡았으니 제 것이군요. 레인님께서 저 노예를 사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음... 솔직히 좀 애매한데... 이봐요, 아줌마. 자기소개 빨리 해봐요. 죽기 싫으면.”

“저.. 저는... 힐다에요... 나이는 35살... 하는 일은 농부..”

“죽여요.”

“쿡쿡쿡!”

미노타우르스는 망치를 들어 힐다의 머리를 내려쳤고 그대로 짜부가 되며 찌그러지듯 함몰된 몸통의 옆으로 팔다리만이 덜렁거리며 마지막 생체적 신호를 보내었다.

“다음 생에는 좋은 보지로 태어나세요.”

“쿡쿡쿡.. 레인님은 정말 자상하시군요. 그럼 더 가볼까요?”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숲을 헤매고 또 헤맸다. 하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수확이 그다지 없는 것 같았다.

“음.. 3마리 전부 다 쓰레기라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살려주세요... 제발..”

“흑흑...”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쯧쯧...”

척 봐도 셋 다 열심히 조교해봐야 D+급이 한계다. 일단 노예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뭐래도 외모다. 외모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재주가 비상해도 랭크엔 한계가 따른다. 물론 검투노예나 백마라면 우승 여부에 따라 그 가치가 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이다. 즉, 결론은 외모가 전부다.

“셋 다 잘하는 걸 말해 봐요. 저흰 하나만 살리면 그만이라 셋 다 데리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먼저 죽여주지. 이 망치로 말이야! 쿡쿡쿡쿡!!”

레인과 브로그의 말에 세 여자는 벌벌 떨면서도 앞 다투어 입을 열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고 솔직해진다.

“저.. 전!! 밥을 잘해요!! 빨래도 잘 해요!! 농사를 오래 지어서 체력도 좋아요!!! 시키는 건 뭐든 잘 할 수 있어요!! 절 살려주세요!!”

“전 음악가에요!! 노래를 불러드릴 수 있어요!! 원하시는 노래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어요!! 다른 건.. 살려주시면 뭐든 할게요!!!”

“전 기술자에요!! 컴퓨... 뭐든 시키시면 손으로 만드는 건 다 잘 할 수 있어요!!”

“어느 것으로 원하십니까?”

“에이... 솔직히 셋 다.. 그렇죠?”

“쿡쿡쿡..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다지 수확이 없군요. 이 세 년들을 몽땅 돼지로 키워야겠습니다. 따라 와라. 죽기 싫으면!”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셋이 합창하듯 보르그의 관대함에 감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레인을 따라가는 게 더 낫다는 걸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숲에서 나가시죠. 밤이 되면 귀찮은 놈들이 설칩니다.”

줄을 깔끔하게 묶어 굴비처럼 엮고 미노타우르스 보르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마땅한 수확은 없지만 그래도 숲 내부를 보며 어떠한 새로운 모델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사냥터로 노예사냥꾼을 데리고 들어와 투어를 시켜주며 노예도 얻게 해주는 그런 놀이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보르그 같은 놈들을 최대한 모아서 1:1로 숲에 들어가 이런저런 탐험도 하고, 노예도 좋은 가격에 얻게 해준다면? 문제는 저런 괴물놈들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놈들이 더 많다는 건데..’

노예상인이라고 해서 꼭 노예를 팔라는 법은 없다. 다른 방법으로도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열어야 한다. 오늘의 귀중한 경험에서 레인은 나름 앞으로의 사업을 구상한 것으로 오늘 하루를 만족했다. 어차피 사냥감들이 넘쳐나는 이 알 수 없는 안개숲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잠깐! 거기 서라!!”

‘뭐지?’

그때 들려온 엄하지만 기백이 넘치는 목소리에 모두는 고개를 돌렸다.

투구부터 발까지 전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놀라운 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미노타우르스를 보며 적의를 들어내고 있다. 투구를 쓴 탓에 얼굴이 가려져 거의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만큼은 확실히 예뻤다.

“쿡쿡쿡... 한 마리 더.”

보르그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전리품을 바로 옆 벼랑 끝으로 보냈고 레인이 포로들을 지키기 위해 함께 갔다.

“이 사악하고 징그러운 괴물아! 트리스테인 왕국의 기사로서 널 징벌한다!”

꽤 멋드러진 말을 지껄이자 보르그는 자신의 망치를 들고 뛰쳐나갔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면 그만이고, 잡는다면 건방진 입 안으로 자신의 자지를 박아줄 생각이다.

휘잉-!

거대한 망치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사는 몸을 낮춰 피한 후 자신의 검으로 보르그의 배를 베었다.

“크윽!!!! 인간!!!!!”

보르그의 배를 벤 것은 보통의 검이 아니었다. 미노타우르스의 피부는 질기도 단단하다. 어지간해선 대놓고 찌르지 않는 한 뚫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검이 보통 검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성검 에스텔의 이름으로 널 처단한다!!”

자신만만한 목소리, 아름답게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피하며 보르그의 몸을 이리저리 벤다.

“크흑!!!! 인간 제법이구나! 더 이상 장난치지 않겠다!!”

열이 뻗은 보르그가 발을 들어 땅을 힘차게 차자 땅이 일순간 흔들렸다. 여기사는 순간적으로 발이 꼬일 뻔 했지만 잽싸게 옆에 있던 나무덩굴을 잡고 한 번 더 위기를 모면했다.

“저... 여기 흔들리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저쪽으로 가면 안 될까요?”

“시끄러. 조용히 해봐.”

레인은 자신의 몸을 바위 뒤로 숨기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쿵-!!

“꺄악!!”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구하겠!!!”

깡-!!

검과 나무망치가 처음으로 부딪쳤다. 아무리 검이라고 해도 무게가 실린 나무를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검을 놓치고 말았다.

“윽!! 나의 에스텔이!!”

‘성검이라며? 하긴 성검이 쥐어진 손의 힘이 약하니 어쩔 수 없나?’

레인은 속으로 여기사를 비웃었다. 저 멍청이는 결국 오늘 여기에서 보르그에게 죽는다.

“큭큭큭... 건방진 년... 날 귀찮게 했으니 네 년의 얼굴을 봐야겠군!”

“큭!!!!”

보르그는 여기사의 목을 잡아들어 올리곤 머리에 쓴 투구를 벗겨서 던졌다.

‘호오!!’

레인이 보기에도 확실히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빛이 감도는 두 눈, 연분홍색의 머리카락, 아름다운 이목구비, 자세히 보이진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A랭크는 될 아름다운 외모였다. 

“쿡쿡쿡... 좋은 얼굴이로군. 네 년은 팔 가치가 있겠어!!!”

“크윽... 이.. 악마의 자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전의가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보였지만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안 돼..”

“흑흑흑...”

포로로 잡힌 여자들은 절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들의 가혹한 운명을 구해 줄 최후의 희망마저 꺼졌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괜찮아요. 여러분을 노예로 팔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레인의 의외의 말에 여자들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네? 정말요? 역시.. 우릴 구해주시는 건가요?”

구해줄 생각이다. 다른 방식으로.

“앗!!”

“꺄아아아악!!!!!!”

세 여자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툭하고 밀자 한 사람이 떨어졌고 엮여 있던 두 사람도 꼼짝없이 어두운 벼랑 아래로 낙하한 것이다.

“응? 무슨 일이지?”

보르그는 갑자기 들린 자신의 전리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년들은 죽어도 별 상관은 없지만 레인이 죽는 건 그다지 바라는 일이 아니었기에 레인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응?! 크억?!”

보르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광채가 있는 검.. 분명 방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건방진 전리품의 물건이 어째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털썩-!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나며 보르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성검의 끝으로 피가 새어나왔다. 완벽하게 숨이 끊어진 것이다.

“켁켁...”

“괜찮으세요?”

레인은 보르그의 손에서 그녀의 목이 풀리도록 하자 곧 가쁜 숨을 내어쉬었다. 너무 세게 쥔 탓에 하마터면 질식해 죽을 뻔 했지만 이젠 괜찮았다. 정말 아름답고 고결한 얼굴을 가진 최상의 소재였다. 레인은 이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기쁜 내색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기절한 그녀의 갑옷을 벗겨 들쳐 업었다.

“으음....”

“정신이 좀 드세요?”

“앗?!”

아름다운 소녀가 눈을 뜨자 깜짝 놀라며 레인을 밀쳤다.

“괜찮아요. 괴물은 이제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음..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좀 더 누워 계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예쁜 얼굴과는 달리 무척이나 터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선 자신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갑옷?! 에스텔?!”

갑옷이 벗겨진 채로 심각하게 당황하는 여기사에게 레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갑옷을 입은 채로 데리고 올 방법이 도저히 없어서요.. 할 수 없이 갑옷을 벗기고 데리고 왔어요.”

“제.. 검은! 그 검은!!”

“죄송합니다... 방법이..”

“아아...”

그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렸다. 기사로서 그녀에게 자신의 무기를 잃어버렸다는 건 분명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옆에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절 혹시..”

“네, 제가 구했지요..”

“감사합니다.. 그보단 미노타우르스가 말을 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 그게.. 말하자면 긴데요.. 일단 진정하세요. 제 이름은 레인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고요.”

그제야 자신의 무례함을 깨달은 여기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례함을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 은인께 실례를 저지르고 있었군요. 저는 트리스테인 왕국 7번 기사단 소속의 성기사 키아라라고 합니다. 구해주신 은혜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보단 미노타우르스에게 끌려가고 있던 여성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자신의 안위가 아닌 남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이것이 외부에서 온 기사라는 족속들의 특이한 점이다. 슬레인에도 기사라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저런 고결함이 전혀 없다. 

“죄송합니다.. 그게 미노타우르스가 땅을 밟았을 때 그 충격으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나 보더라고요..”

“... 그랬군요.. 제가 못난 탓에..”

침통해 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자 쓸쓸한 표정으로 레인을 바라보았다. 슬픈 얼굴까지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잘만 키운다면 S+등급까지도 조교가 가능한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저기, 주인님?”

래티샤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쉬세요. 일단은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

“괜찮습니다.”

키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인이 향한 방으로 향했다. 커튼이 쳐져 있고, 아늑한 분위기가 나는 방의 조금 낡은 침대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와.. 정말 예쁘네..’

태어나 예쁘다는 말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기며 콤플렉스로 살아온 그녀가 봐도 래티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치 여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했지만, 그래서 방금 소녀가 말한 ‘주인님’이라는 단어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래티샤, 조금 더 자야 해.”

“죄송해요.. 하지만 주인님이 곁에 안 계시면 너무.. 무서워서.. 흑...”

울먹거리며 레인의 손을 잡은 소녀의 손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어딘가 아픈 겁니까?”

“하아.. 래티샤는 몸이 약한 아이에요. 제가 이곳에서 돌봐주고 있는 아이죠.”

“하인을 돌보는 주인이라니, 정말 좋으신 분이시군요.”

“이분은??”

“래티샤, 소개 할게. 키아라님이셔. 기사단의 성기사로 계시는 분이시래.”

“와..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헤헤.. 반가워요, 키아라님.”

“반갑습니다, 래티샤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헤헤.. 제가 원래 몸이 약해서요.. 주인님께서 절 살리려고.. 콜록콜록!”

“안 돼. 너무 말하면.. 물부터 일단 마시자. 응.. 그렇지. 조금만 더 마셔. 아파도 참아야 해.”

힘겹게 소년의 부축을 받은 아름다운 소녀는 물을 겨우 두 모금을 마시곤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불치병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 안타깝군..’

키아라는 씁쓸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곧 래티샤가 쌔근쌔근 잠이 들자 문을 닫고 둘은 나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후우... 마음이 아프네요.. 조금만 건강해지면 좋을 것을..”

“... 죄송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못 되어 드리네요.”

눈물을 훔치는 레인을 보며 키아라는 자신의 무력함에 씁쓸해 했다. 

“아니에요. 키아라님의 잘못이 아닌 걸요. 그보단.. 어쩌다 숲에 계셨던 거예요?”

“그게..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전 침략해 들어오는 제국의 마수에서 트리스테인 왕국을 구하기 위해 전선으로 투입되었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던 요새의 동문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적들은 끝도 없이 밀려왔지만 우린 용감하게 싸웠고 다행히 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지켜내었다는 자부심을 느꼈죠. 그러던 와중에 요새에 계시던 성주님께서 적의 배후를 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위험한 일이라고 말렸지만 성주님은 듣지 않으셨죠. 결국 제가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걱정대로 적들은 우릴 꾀어내기 위해서 함정을 팠던 것이었죠. 도망을 칠 방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 부하들은 하나씩 적들의 화살과 칼에 맞아 쓰러졌죠. 저 역시도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트리스테인의 자랑스러운 기사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 잡고 검을 새롭게 쥐었습니다. 적들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것이 보였고 전장에서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장렬하게 마지막으로 힘을 다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안개가 덮친 건가요?”

“네! 맞습니다! 어떻게 그걸??”

“그리고 나선 숲에서 혼자 버티고 계셨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고 배는 고파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사람을 봤는데 절 사로잡으려고 시도하더군요.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숫자가 많아 부득이 죽이고 말았습니다.”

‘대단한 걸? 사냥꾼들을 죽이며 숲에서 혼자 버텼다는 말이잖아?’

레인은 생각보다 눈앞의 기사가 대단하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미노타우르스에게 진 것도 어쩌면 숲에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돌아다녔던 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식사는...”

“죄송합니다.. 사실은...”

꼬르르륵!!!

우렁찬 소리가 들리자 예쁜 얼굴에 홍조가 들었다. 딱딱하고 엄격한 성격인줄로만 알았더니 당황한 표정이 너무나 예뻐 자신도 모르게 키스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이곳에 대해선 설명을 해드릴게요.”

레인은 사료를 부어서 키아라에게 내밀었다. 

“저.. 혹시 절 동물취급 하시는 겁니까?”

“아,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이건 식량이에요. 저도 먹는 걸요. 가장 값싸고 양이 많이 나오는 거라 이걸 먹고 지내요. 돈이 제가 없다보니...”

증명하듯 직접 사료를 몇 알 집어서 입에 넣고 씹자 그제야 수긍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제대로 된 빵이라도 내어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죄송할 뿐이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사료를 묵묵히 배가 고픈지 먹고 또 먹었다. 한참을 먹고 물을 마신 후 조금 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표정이 밝아진 모습은 너무나 예뻤다. 하지만 그 예쁜 얼굴은 레인의 설명이 길어짐에 따라 서서히 경악과 혼란한 표정으로 찡그러졌다.

“노예의 도시라니... 여자가 모두 노예라니...”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이에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되시면 창문을 열어서 밖을 보세요.”

“헉?! 이럴 수가...”

길거리를 활보하는 거대 몬스터들, 벌거벗은 채 끌려 다니는 여자들. 흔해빠진 관경이지만 키아라에게는 더없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저.. 죽을 몬스터놈들이!!”

“진정하세요. 일단 자리에 앉아 주세요.”

레인이 잽싸게 창문을 닫자 분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자리에 순순히 앉았다.

“세상에.. 어쩌다가 이런.. 잠깐?! 여기가 그럼 어디인 겁니까?!”

“아까도 설명 드렸다시피 슬레인이에요. 기사님께서 사시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죠.”

“전 돌아가야 합니다. 제국의 마수에서 트리스테인을!!”

“죄송하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방법이 없어요.”

“말도 안 돼..”

“혼란스러우신 건 이해해요.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제가 찾아봐 드릴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요...”

“돈.. 문제입니까?”

“그렇죠. 지금까진 아득바득 버텨왔는데 슬슬 한계조짐이 보이네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벌어야 하는 처지라 키아라님을 위해서 시간을 무한정 할애해드리긴 어려워요.”

“방에 있는..”

“래티샤에요. 제가 사랑하는 아이죠. 몸이 조금 아픈 것만 빼면 정말 훌륭한 아이거든요.”

“두분은 사랑하는 관계이신 겁니까?”

“그런셈이죠.”

아마 지금쯤 키아라의 머릿속에서는 노예와 주인의 금단의 러브스토리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적당히 상대를 설득할 만한 이야기를 지어내면 그만이라 깊게 설명하진 않았다.

“하아.. 여기서는 이상한 이야기가 정상으로만 들리네요.”

“그렇죠? 보통 숲으로 떨어진 분들은 그런 말을 해요. 래티샤도 그랬죠. 아무튼 전 래티샤를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장 끼니를 때울 돈이 걱정이죠. 래티샤에겐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해요. 조금이라도 래티샤가 더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제겐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키아라님이 트리스테인 왕국으로 돌아가시는 것만큼요.”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는 겁니까?”

“일반적으론 노예를 팔아서..”

“절 파실 생각인 겁니까?”

곧바로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키아라에게 레인은 손을 휘저으며 부인했다.

“천만해요!! 그렇다면 이렇게 서론을 깔지도 않았겠죠. 기절해 계실 때, 그냥 팔아넘겨도 그만이었다고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해해요. 혼란스럽고 어렵죠. 다행인 건, 이곳은 슬레인의 다른 집과는 달리 학대하거나 몹쓸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죠.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시면 되요. 돈은 제가 어떻게든 나가 벌어 보겠어요. 대신 제가 집을 비운 동안 래티샤를 돌봐주세요. 키아라님께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도와드리겠어요.”

“... 알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저도 잘 이해했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키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답게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레인은 이 고지식하지만 능력 있는 노예를 뼛속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아.. 아까 그 분이시네요..”

“몸을 닦아드리라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레인이 밖으로 나가고 집안엔 둘만이 남았다. 쓸쓸할 정도로 넓은 집은 텅텅 비어 그들의 빈곤한 삶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고, 가냘픈 소녀는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아.. 감사해요.. 주인님은??”

“잠깐 나가셨습니다.”

“불쌍한 우리 주인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키아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물을 적신 수건을 래티샤의 몸에 문질러 닦아주기 시작했다. 간병은 태어나 처음이지만 딱히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쯤 많이 괴로우시겠네요. 저도 그랬으니까 이해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이런 이상한 곳이 있으리라곤..”

“그렇죠? 하지만 키아라님은 운이 좋으세요. 주인님을 만났으니 나쁜 일을 당하시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곤 해도 전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제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고 나라가 있습니다.”

“음... 주인님께선 뭐라고 하셨나요?”

“절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주인님은 너무 착해서 노예상인 같은 건 역시 무리시네요..”

“노예상인이라면..”

“저희들을 키워서 파는 일을 하는 직업이죠. 아직 이곳에 대해 잘 모르시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설명을 드릴게요.”

래티샤의 설명을 들은 키아라는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이곳에서 보호자는 레인이다. 자신이 기사라고는 해도 그 직책이 이곳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보호자인 레인은 노예를 조교시켜 파는 상인이다. 천박한 제국에서 있다고 들은 직업이 여기에선 주로 하는 업종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질문을 했다. 

“그럼...”

“아마 주인님이 다른 노예를 데려 오실 거예요. 그 노예가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데.. 그걸 키아라님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으음...”

키아라로서는 난감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이들의 불행을 적극적으로 동조해야 한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인을 돕지 않으면 레인과 래티샤가 불행해 질 것이고 그 여파는 자신에게도 가혹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은인에게 해서도 안 될 일인 것이다.

“고마워요.. 조금만 더 잘게요.. 주인님이 오시면 깨워주세요.”

래티샤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키아라는 래티샤의 방에서 나왔다. 음울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운이 없어서 그 괴물에게 잡혀 끌려갔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성노예로서 추악한 일을 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레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생명의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건..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 방법이 비록 다소 비인간적이라고는 해도 그게 이곳의 법도라면 따라야 하겠지.”

키아라는 일단 먼지가 조금 쌓인 집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진 잘 모르지만 스스로 걸레를 들고 집안 곳곳을 처음으로 닦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아, 키아라님. 어라? 집이 깨끗하네요?”

레인은 깜짝 놀랐다. 나가기 전과 비교해 확실히 집이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다. 

“신세를 지는 만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해드리고 싶습니다.”

‘호오! 마음가짐이 확실히 올바르군. 기사라는 놈들은 오만한 것들이 천지인데 말이야.’

솔직하게 레인은 감탄했다. 이 노예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외모, 탄탄한 몸, 강하지만 결코 성격이 우쭐대거나 건방지지 않다. 이런 좋은 조건들을 두루 갖춘 노예는 정말 찾기 힘들다. 아마 키아라가 경매에 나왔더라면 1500골드 정도는 각오를 해야만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맙네요. 일단 앉으시죠.”

“네.”

“일단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을 먼저 들으시겠어요?”

“좋은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키아라님이 트리스테인 왕국으로 돌아가실 방법은 있습니다.”

“네?! 정말인가요?!”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순수했다. 레인은 이 깨끗한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네! 우연찮게 정보를 수집하다가 들은 이야기이고, 아직 정확하게 확신할 근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었어요.”

“아... 신께서 저의 기도에 응해주셨군요...”

감격에 겨워하며 레인의 손을 붙잡곤 마구 흔들었다. 기사라서 그런지 손에 굳은살은 제법 있어 그다지 부드럽지는 않았다.

“하하하... 기뻐해주시니 저도 좋네요.”

“앗! 죄송합니다. 제가 함부로 그만...”

남자의 손을 잡은 것으로도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돌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그녀가 남자의 때가 타지 않은 순결한 몸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지을 뻔했지만 힘겹게 참았다. 이 여자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그로서도 꽤 힘들었다.

“그럼 나쁜 소식은...”

“키아라님의 검과 갑옷은 찾지 못했어요. 성검이라고 하셨으니 아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수소문 해봤지만..”

“아.. 거기까지 신경써주시고...”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른 사냥꾼이 집어가서 그걸 쓰고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어요. 암시장이라도 가보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암시장... 저도 갈 수 있나요?”

“그렇긴 한데... 조건이...”

“말씀하세요.”

“물건을 찾으려면 키아라님이 직접 보는 것이 최고로 빠른 방법인데, 그러려면... 보시다시피 이곳의 여자들은 모두 벌거벗고 다녀요. ”

레인이 말을 잠깐 흐린 이유를 이해한 키아라의 표정엔 곤혹감이 깃들어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자신의 알몸을 남에게 보여야 한다. 한명도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야 한다는 건 상상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갑옷과 검은 그냥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트리스테인 왕국의 성검과 아버지가 직접 자신의 진급에 맞춰 선물해주신 귀중한 물건이다. 어느 것 하나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 두 개의 물건을 되찾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평생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으....”

“죄송해요.. 제가 특이한 물건들이니 잘 봐두었더라면...”

“아닙니다.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 암시장에 물건이 올라온다면 곧 팔릴 거예요. 그럼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찾을 길이 없게 되죠. 특이한 무기들을 수집하는 콜렉터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결론은 제가 빨리 가서 찾아봐야 한다는 것입니까?”

“유감스럽지만.. 네. 그렇습니다, 기사님.”

키아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여자로서의 정조와 기사로서의 긍지가 부딪치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결심하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사다. 여자라는 사실보다도 기사라는 긍지로서 살아온 참된 무인인 것이다.

“암시장에.. 가고 싶습니다. 절 그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큭큭큭... 멍청하진 않아도 순진해서 곧이곧대로 잘 믿는군.’

레인은 자신에게 허락을 받고 화장실로 가 옷을 벗는 노예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것만큼은 꼭 가지고 싶다. 

“으으으...”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시는데 제가 불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키아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아 있었다. 트리스테인 왕국 제일의 기사가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것도 앞에 있는 작은 소년에게 팔목이 묶인 채로 동물처럼. 

‘이 수치스러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성검 에스텔은 단순한 나의 검이 아니다. 트리스테인의 보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꼭 트리스테인으로 돌아가야 할 물건이다. 그것에만 집중하자.’

“오오오!!”

“휘유!! 어이 꼬맹아!! 그 년 나한테 팔면 안 돼냐? 10골드를 주지!!”

“엉덩이 탱탱한 거 좀 봐!! 새빨갛게 만들어주고 싶군. 큭큭큭...”

보기 드문 아름다운 노예의 등장에 길거리를 지나던 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키아라는 수치심에 몸을 떨면서도 레인의 뒤만 보며 따라갔다. 괜히 고개를 돌려 다른 무언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지금의 평정심마저 잃어버릴 것 같았다.

“휘유~! 꼬마야, 그 물건을 경매에라도 내놓으려 온 거냐?”

암시장으로 들어서자 문앞을 지키는 게이트 키퍼가 음흉한 미소로 키아라를 훑어보았다. 

“아뇨. 집안에만 뒀더니 따분해 하는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어요.”

“돈이 썩어나는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주운 건지 모르겠지만 부럽군! 들어가라!”

짝-!!

“꺗!!”

키아라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치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계집 같은 목소리에 당황했다. 

‘감히.. 저 죽일 놈이...’

찢어죽이고 싶다는 분노를 담아 게이트키퍼를 노려보았다. 

“허허? 이 년 봐라? 아우스펙스!”

“뭐.. 뭐야?”

“반항의 씨앗이 7개.. 뭐야? 이거 완전히 야생이나 다를 게 없잖아. 어이 꼬마! 썩 꺼져!! 여길 장난으로 아는 건가?”

“네? 그럴 리가요..”

“이 멍청이가 아우스펙스도 써보지 않은 노예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 이 년이 깽판이라도 쳐서 손님들이 불쾌해 하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썩 꺼져!!”

단 한 번에 축객령이 떨어지자 레인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건 키아라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지금 내 감정을 확인 한 거야? 마법으로? 그런 게 가능해??’

키아라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알몸이 되어 거리를 돌아다니며 모멸 찬 말들을 들으며 참았던 것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아... 어쩌지...”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소년은 마음씨는 착할지 몰라도 경험이 전무한 것인지 자신보다도 더 당황하고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내려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너무 편안하게 대해 주셔서 제가 잠시 본분을 잊었습니다..”

키아라는 스스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레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뭐야? 장난하냐? 왜 그러면서 까지도 이 안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지? 안에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나? 아니면 죽이려고 계획한 누군가라도 있나? 여전히 반항의 씨앗이 6개나 되는 군. 어서 안 꺼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키아라로서는 어떻게 해야 저 문지기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법으로 정신을 스캔해서 보고 있으니 뻔한 거짓말은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저를 자상하게 대해주셔서 제가 너무 건방지게 행동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키아라는 스스로 래티샤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종적이고 사랑에 빠진 노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검을 다루며 승리를 위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집중을 하던 버릇을 이용해 레인이 자신의 주인님이라는 망상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호오... 반항의 씨앗이 두 개.. 마음만 먹으면 금방 바뀔 자세가 되어 있는 순응성이 있는 건가? 그래도 여전히 멀었는데? 안에 들어 보내 주려면 복종의 싹이 하나 정돈 보여야 해.”

‘말도 안 돼... 이제 어떻게 해야...’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레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어?!’

당황하기도 전에 밀고 들어온 귀여운 그의 혀가 자신의 소중한 입안을 훑기 시작했다. 혀와 혀가 만나며 서로 빙글빙글돌며 정신을 쏙 빼놓는 것 같았다.

‘뭐지.. 기분 좋아.... 따뜻하고... 이상한 기분...’

침이 자신의 허벅지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조금씩 자신이 더 레인을 원하며 혀를 움직였다. 무언가와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싫지 않았다. 

“츄릅... 하아... 츄르릅....”

‘몸이 붕 뜨는 것 같아... 이상한 느낌...’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늪처럼 눈을 감고 레인의 리드를 받아들였다. 처음인 자신을 배려하듯 자상하면서도 따뜻한 기분이 들도록 손까지 잡아준 그가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졌다. 

“후움...”

서서히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키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아쉽지만 기뻤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각. 이런 이상하고 괴로운 상황에서 단 한 줄기의 동아줄처럼 자신을 붙들어준 남자에게 고마운 감정이 느껴졌다.

“호오! 복종의 싹이 희미하지만 하나 나왔군!! 좋다! 들어가라!!”

“들어가요, 키아라님.”

“네.. 주인님..”

키아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레인을 주인이라고 인식하며 주인님이라고 불렀지만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냥 이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을 잠시나마 붙잡아주고 도와준 존재에 대한 고마움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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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지금: 1299골드

지출내역: 

래티샤 각성비용: 2000골드

집세: 50골드

노예의 방 인테리어: 10골드 (10일 기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노예 구매 및 처분: 20골드

소유 중인 노예: 래티샤, 키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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