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티샤 입수 & 처지 순응 조교>
3월 15일
노예의 도시 슬레인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레인의 아침은 남들보다는 조금 이르게 시작된다.
“나갔고, 나갔고.. 아직 저긴 나가지 않았군.”
자신의 집 주변에 살고 있는 노예 사냥꾼들이 저마다 안개의 숲을 향해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나 노예상인으로서 등록이 되어 있을 뿐, 노예를 강제로 조교시킬 힘도 마력도 없는 레인으로선 결국 D+급으로 최종적으로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외모부터 가치가 떨어지는 최하급의 노예를 키우는 것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상대가 고분고분하고 잘 따라주었을 때 이야기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들었으면 좋았잖아요. 나도 빨리 노예조교를 더 시켜서 기술들을 좀 쌓아야 하는데..”
카산드라였던 잘 포장된 고기를 하나 꺼내 후라이팬에 굽는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레인의 후각을 자극한다. 후추와 같은 향신료 역시 가격이 얼마하지는 않지만 그 돈도 아껴야 하는 레인으로선 그것까지도 사치이기에 그냥 적당히 익지 않은 곳만 없도록 고기를 구워서 탁자로 옮겼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고기라 군침이 돌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내세에는 부디 더 좋은 삶으로 태어나세요.”
어쨌든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은 힘과 능력이 모든 것인 노예의 도시이다.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면 결국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만 한다. 결국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이곳에서의 생존의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작지만 영양가 있는 식사 덕에 포만감이 느껴졌다. 더럽고 제대로 된 샤워시설도 없는 이런 곳에서 언젠가는 가장 부유한 자들이 사는 화이트타운에 입성하는 것이 꿈꾼다. 꿈꾸는 것은 돈이 들지 않아서 좋다.
“좋았어. 옆집에 저 놈도 나갔군.”
이걸로 판자집에서 서식하는 사냥꾼 놈들은 모두 안개의 숲으로 떠났다. 저들은 자신의 사냥감을 잡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빨라도 3시간은 넉넉히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3시간은 의외로 짧은 시간인 만큼 서둘러야만 한다는 사실도 레인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끼이익-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슬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옆집을 시작으로 하나씩 털기 시작했다.
“이젠 아예 아무것도 없이 사는 놈들이 늘어버렸네..”
워낙 좀도둑이 들끓는 곳이라서 이젠 훔칠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문을 잠가둘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문을 잠가둔다는 것은 안에 비싼 물건, 즉 노예가 있다는 뜻이 되고 오히려 더 확실한 타켓이 되어 집이 쑥대밭이 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훔쳐갈 것은 거의 없지만.
“하아... 오늘은 할 수 없지. 일단 집에 가야겠어. 누가 들어와서 카산드라를 훔쳐 가면 안 되니까.”
레인은 조용히 밖을 빠져나와 잽싸게 집으로 돌아와 카산드라가 담겨있는 봉지를 찾았다. 다행히 카산드라는 여전히 먹음직한 모습으로 레인을 잘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잃어버렸으면 아쉬웠을 텐데.
냄새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는 주머니에 고기를 몇 개 꺼내서 둘둘 싸매었다.
“뭐, 오늘도 어제처럼 하나 걸리면 좋겠는데.”
고민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옮겨야 생존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진리가 지배하는 이곳. 집밖으로 나온 레인은 거리를 걸었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판자촌을 나오자 오늘도 활기찬 거리에는 노예들이 굴비처럼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간혹 보이는 극상품의 노예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다. 아무리 극상품이라고 해도 아무런 훈련도 되어있지 않은 노예는 그다지 비싼 가격에 팔지는 못할 것이다. 노예시장은 싸게 그들에게서 노예를 구입할 것이고 몇 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아치운다. 그리고 노예상인은 그런 노예들을 조교시켜서 더욱 비싼 가격에 납품한다. 이들간의 먹이사슬은 이렇듯 분명한 것이다.
그럼 차라리 노예사냥꾼이 직접 노예를 조교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문제는 아무나 노예를 조교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적어도 가격이 올라가는 건 C+급 이상으로 조교가 되어야만 하는데, 그까지 조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단순히 여러 재주를 익혔다고 해서 등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복종심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노예사냥꾼들은 자신이 애써 목숨을 걸고 잡아온 노예가 푼돈에 팔리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서 거래를 한다. 그리고 조교를 성공적으로 한 노예상인은 더 큰 부를 창출한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꼬마, 밖에 나가려고 하는가?”
성문 앞의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는 중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네. 숲에서 뭐라도 캐볼까 해서요.”
“그러던지. 이름.”
“레인입니다.”
“음울한 낯짝과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 가라.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면 촉수괴물에게 먹잇감이 되어서 죽은 걸로 처리해 주지.”
거친 말에도 레인은 반응하지 않고 적당히 인사를 하곤 조금 걷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 앞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돌변한 것이다. 안개의 숲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어디에선가에서 여자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괴물들도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어제처럼 하나 걸리면 좋을 텐데..”
사실 허탕을 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기대는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차피 가만히 집에서 있는 것 보다는 뭐라도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계산이 전부다.
크웨에엑! 취이익!! 치익!!
‘오크다!’
레인은 재빨리 큰 나무의 틈새로 몸을 웅크리고 숨겼다.
“꺄악!! 살려주세요!!”
먹잇감을 발견한 오크가 녹이 슨 도끼를 들고 쫒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여자는 달렸지만 발목이 땅으로 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아아....”
퍽-!
도끼가 내리쳐지고 여자의 머리와 목은 깔끔하게 분리가 되었다. 오크는 피를 흘리고 있는 목이 아닌 발목을 잡고 땅에 질질 끌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휴... 꽤 괜찮은 소재였는데, 아쉽긴 하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싸워서 이길 방법도 없다. 이곳에서의 생존은 절대로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영웅심은 더더욱 위험하다. 아무리 강한 노예사냥꾼이라고 해도 이곳에 득실대는 몬스터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의 목을 쳐내고 몸을 토막내어 먹을 것이다.
‘조금만 더 들어가 볼까.’
딱 걸어서 3분이 채 되지 않는 곳까지가 자신에게 허락된 구역이었다. 운이 좋게 여자를 발견한다고 해도 자신을 순순히 따라줄 가능성도 낮고, 설령 따라온다고 해도 틀림없이 냄새를 맡고 쫒아올 무언가가 있다면 여자를 고기방패로 삼아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만 한다.
크르르르....
‘늑대다.’
“허억..허억... 안 돼.... 흐으으으....”
헐떡거리면서도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용히 접근하자 보이는 것은 갈색머리카락이 어깨에 미치지 못 하는 비쩍 마른 여자가 옷이 거의 찢어지고 온몸이 긁힌 자국이 선명한 채로 암캐처럼 엉덩이를 치켜든 채, 송아지만한 늑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하윽... 안 돼..... 제발...”
여자의 눈엔 공포와 절망이 서려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기분 좋은 사정이 끝나고 늑대는 여자를 먹어치울 것이다. 그 증거로 큰 입으로 여자의 목을 죽지 않게끔 물고 있었다. 사정함과 동시에 그대로 주둥이에 힘이 들어갈 것이고 여자의 연약한 목은 몇 개의 구멍이 생기며 피가 뿜어져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을 것이다.
‘좋아. 해보자고.’
레인은 조용히 천천히 늑대의 근처로 다가갔다.
크르르르!!
늑대는 곧 레인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 채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고 아래에 깔린 여자는 신음소리를 내며 어느새 자연스럽게 암컷으로서 자신의 엉덩이를 바치고 있었다.
“배고프지? 그럴 거야. 너흰 배가 고프지 않으면 나오지 않으니까.”
컹컹!!
늑대는 사납게 짖으며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레인은 주머니에서 카산드라의 고기를 꺼냈다.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늑대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확인했다.
“어때? 맘에 들지? 최고의 고기야. 당장 뛰어들어서 먹고 싶지?”
크르르르....
레인이 고기를 늑대의 앞으로 던지자 늑대는 범하고 있던 여자의 꽃잎에서 자신의 길쭉한 성기를 꺼내고 땅에 떨어진 고기를 물어 삼켰다.
“괜찮아. 난 너한테 해를 입히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하나 더 줄까?”
여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기를 던지자 곧장 기어가 고기를 삼켰다. 하지만 이런 걸로 경계가 풀릴 리는 없다. 오히려 늑대는 레인의 손에 뭍은 피의 냄새에 강하게 자극되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었다.
“끼잉.. 끼잉... 끼이잉...”
레미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고 마치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바닥에 배를 뒤집어 깠다. 완벽한 복종의 표시. 상대의 강함을 존경하는 행동에 늑대는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망칠 생각만 하지 마라. 넌 내거니까.’
여자는 여전히 엉덩이를 치켜들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움직일 생각도 못할 만큼 머리가 텅 비어버릴 정도로 박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망가지 않는 건 레인에게 좋은 징조다.
킁킁킁킁...
“끼이잉....헥헥헥...”
레인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개처럼 헥헥 거렸다. 그런 레인에게 흥미를 느낀 늑대는 레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고 그의 오른손에 묻어있는 피를 핥았다.
크르르...
확실히 아까보단 안정된 소리가 늑대에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레인은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고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연기하기 위해 뒤집은 배를 원위치를 시킨 다음 주머니에서 고기를 토하는 모양새로 나오도록 땅에 떨어뜨렸다.
크르!
“끼이잉...”
늑대는 어서 음식을 내놔라는 듯 위협을 하였고 레인은 그에 순순히 복종하며 발을 뒤로 빼었다. 그러자 약간의 경계는 하고 있지만 늑대는 고기를 아까보다 여유롭게 즐기기 시작했다.
취익!! 치이익!!! 킁킁!!
오크의 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레인은 주머니에 남아있는 던지기 좋은 안심스테이크를 꺼내 오크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최대한 빠르고 세게 집어던졌다!
컹컹!!
마치 공을 던져주자 쫒아가는 개처럼 사나운 늑대는 달리기 시작했다. 레인은 그 틈을 이용해 여자에게 접근했다.
“사..려.. 사려주...”
짝-!
“정신 차려요.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죽고 싶지 않다면 날 따라와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어.. 사람... 사람...”
짝-!
레인은 거칠게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로는 단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지만 혹시라도 되돌아올 늑대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게 된다. 살려서 성안으로 들어가야만 수확이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게 안 된다면 죽어서라도 고기라도 챙겨야 한다. 그것도 실패하면 애꿎은 카산드라 고기만 낭비한 바보 같은 하루가 되는 것이다.
“달릴 수 있죠?”
“...네.. 네!”
여자의 눈에서는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레인은 여자를 일으켜 손을 잽싸게 준비해둔 튼튼한 끈으로 묶었다.
“왜..?”
“여긴 안개가 자욱해서 조금만 떨어져도 놓치기 십상이에요. 살고 싶으면 따라오세요. 질문은 나중에. 지금은 살아야 해요. 나는 당신 때문에 지금 목숨을 걸고 이 짓을 하는 거니까, 알겠죠?”
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레인은 최대한 빨리 성문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돌아가는 길이 약간 내리막이라는 점. 그래서 더 빨리 속도가 붙는다. 여자는 엉거주춤하면서도 살겠다는 일념으로 신고 있던 신발이 벗겨지면서 까지도 열심히 달렸다. 매우 기특했다.
께에엥!!!!
저 멀리서 늑대가 죽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 늑대는 최대로 자라면 허름한 판잣집만한 크기까지도 클 수 있지만, 이곳에서 그렇게까지 자라는 경우는 드물다. 이 숲에서 늑대는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괴수들은 여자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상대는 무조건 죽이고 먹는다. 그리고 저 늑대도 그렇게 고기가 되었다.
“조금 더 빨리! 다 왔어요.”
“네!!”
여자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생기가 느껴졌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는 놀란 눈으로 레인을 바라봤다.
“하?! 꼬맹이가 제법이군?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이! 대장!! 10골드야!”
“알았다!”
“헤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는걸요.”
레인은 방금 기사와 그의 부하가 한 말의 내용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저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밖에 나간 자신이 죽어서 올지, 살아서 올지 내기를 한 것이다. 저들에겐 나간 슬레인의 주민의 안위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이 문을 지키고 골드를 벌면 그만인 것이다.
“전리품도 얻었으니 축하할 일이군. 꼬맹이, 이름이 뭐냐?”
“레인입니다.”
“미안하지만 난 너의 하찮은 이름 따위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운이 너를 지켜줄지 보고 싶군.”
레인이 기사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여자도 눈치를 보다 인사를 했다. 군영지를 지나 나가기 전에 레인은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이름이..?”
“래티샤에요..”
“잘 들어요, 래티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요. 우린 지금부터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보게 되는 관경이 충격적이더라도 절대로 소리를 지르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세요.”
“어째서죠?”
“곧장 의심을 사고 죽을 수 있으니까요. 이곳은 생각보다 안전한 곳이 아니에요. 운이 좋게 구조되었지만 앞으로는 더 험난하겠죠. 약속해 줄 수 있겠어요?”
“... 절 어떻게 할 생각이죠?”
“나쁜 마음을 먹었더라면 굳이 그 늑대에게서 구해주진 않았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죠? 아가씨는 위험했고, 우연찮게 제가 발견을 해서 목숨을 걸고 살린 거라고요. 그건 인정하죠?”
“네.. 경황이 없어서.. 죄송해요..”
“그럼 앞으로 보게 되는 관경도 지금처럼 차분하게 행동해 주세요. 무서워서 견딜 수 없으면 제게 기대세요. 그럼 한결 나을 거예요. 그럼 가도 되겠죠?”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래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이 만약 힘이 세고 래티샤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더라면 오히려 이럴 땐 폭력이 가장 빠른 굴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늑대에게 강간을 당해 정신줄을 거의 놓은 상태였고, 이를 이용해 빠르게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레인으로선 그럴 만한 힘이 없었기에 설득을 하는 방향을 쓴 것이다.
“!!!”
군영을 나가자마자 보이는 관경에 레티샤는 눈을 떼지 못했다. 충격과 공포가 눈에서 읽힌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절 믿어주세요. 아시겠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레인은 래티샤의 발에 맞춰 걸었다. 옷은 사실상 넝마가 되어 거의 벗겨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옷을 벗기고 들어가는 수고를 덜었다는 점에서 레인은 무척이나 이 상황들이 자신에게 맞게 잘 굴러가고 있다고 느끼곤 흐뭇한 감정이 들었다.
“여기에요. 일단 들어가세요.”
“여긴...”
“제 집이에요. 초라하죠?”
“... 아늑하지는 않네요.”
생각보다 래티샤는 침착해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아랫배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흑.... 동물에게.. 흐으으으으....”
서럽게 흐느끼며 이제야 겨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혼란스럽죠? 죄송해요.. 그런 일을 겪기 전에 봤으면 먼저 구했을 텐데... 이미 늦어버려서...”
“흑흑흐윽... 아니에요.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전... 흑흑...”
래티샤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레인에게 안겨 울기 시작했다. 레인은 차분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요. 이제 일단은 안전하니까요. 그보다 도시 안의 모습을 보통 처음 보면 놀라는데, 그러진 않으시네요?”
“사실.. 놀랐지만 놀랄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직도 아랫배가 아파요... 씻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여긴 샤워시설이 없어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는 거죠?”
“말을 하려면 사연이 길어요. 일단 누추하지만 여길 앉으세요.”
“저.. 죄송하지만 이걸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레인으로선 갈등이 생겼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는 정서적으로 불안할 뿐만 아니라, 도시 안의 모습들을 보며 대충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눈치 챘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론 집에 있는 물건을 들고 저항할지도 모르고, 노예에게 맞아서 쫒겨 난 남자의 최후는 볼 것도 없이 비참하다. 더군다나 그는 일단은 직업이 노예상인이었기 때문에 길드가 그런 멍청한 일을 저지른 상인을 처단하기 위해 이름을 걸고 나설 것이다.
“좋아요. 풀어드리죠.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하니까요.”
레인이 나이프를 품에서 꺼내 묶여있던 손을 풀어주자 침울해 있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여긴.. 어디인가요? 성노예...가 많던데..”
“성노예가 있던 곳에서 오셨나 봐요?”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전 시장에 있는 조금 재력이 있던 상인의 집안에서 하녀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고용주님이 취급하던 물건인 성노예도 몇 번 봤었어요..”
레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이유가 래티샤가 살던 곳과 이곳이 조금이나마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설명 드릴게요. 일단 이곳이 너무 열악해서 곧바로 씻기지 못하는 건 정말 죄송해요. 이해해 주세요.”
“아니에요.. 그 늑대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죽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는 걸요.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기적인데 요구를 하는 건 옳지 않겠죠.”
하녀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무척이나 차분하고 예의 있게 반응하는 모습이 레인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로서는 힘으로도 마력으로도 노예를 굴복시킬 힘이 없다. 결국은 설득을 해야만 하는 것인데 이렇게 이상적인 노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얼굴이 예쁘지 않아 D+등급이 한계겠지만 일단 고분고분한 노예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하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담...”
“의외로 상황을 잘 받아들이셔서 제가 마음이 놓이네요. 늑대.. 아니 숲에서 헤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어땠어요?”
“그냥.. 평소와 같았어요. 고용주님의 빨래와 청소가 제 일이었죠. 그 날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어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바뀌었어요. 그래요, 마치 안개가 저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무언가에 삼켜지듯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놀라서 소릴 지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안개 숲에 있었죠. 어딘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는데.. 무서운 소리가 숲에서 들려서 뒷걸음질을 쳤어요. 그때 늑대가 갑자기 제 목을 물어서 죽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 갑자기...”
“죄송해요..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너무 힘드네요... 그럼 여길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 건가요?”
“네.. 저 숲으로 돌아가는 건.. 아시다시피 죽는다고 봐야 맞고요. 이곳에서 여자는 모두 노예에요. 그게 이곳의 생존법칙이죠. 딱 하나만 주의사항을 말씀드릴게요. 절대로 밖으로 혼자 나가지 마세요. 브랜드 낙인, 그러니까 노예의 소속을 나타내는 직인이 없는 노예가 혼자 돌아다니면 다른 남자에게 잡혀서 그 사람의 노예가 되거나 설령 죽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 설령 낙인이 있다고 해도 주인이 곁에 없는 노예의 운명은 분명해요. 주인에게서 떨어진 노예는 기본적으로 주인이 없는 무주물로 간주가 되죠.”
“그렇군요.. 그럼 레인님이 제 주인님이 되시는 건가요?”
“음.. 이곳의 법대로 본다면 그렇게 되겠죠.”
“그렇군요.. 절 파실 생각인가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없어요.”
“제가 그럼 레인님을 위해서 뭘 하면 되죠?”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피곤하시죠? 식사부터 할까요? 목욕이 먼저이긴 한데..”
레인은 물이 담겨 있는 나무통과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제대로 된 물건은 아니지만.. 이걸로 씻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난감한 문제였다. 좁은 판잣집에선 어느 위치에 있어도 훤히 상대가 보일 수밖에 없다.
“전 음식을 준비할게요.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씻어서 나쁜 기억도 잊었으면 좋겠네요.”
“상냥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래티샤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감사의 인사를 하자 레인은 곧바로 사료가 담긴 봉지를 꺼내 통조림이 들어 있었던 빈 깡통에 적당히 부어 담았다. 그림자로 비치는 래티샤의 모습은 거의 찢어져 걸레조각이 된 옷을 벗고 몸을 닦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자지가 팽팽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직 안에는 카산드라의 마지막 한 조각이 남아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굳이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 됐나요?”
“네.”
찢겨지고 엉망인 옷이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기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일이라도 당장 새 옷을 구해올게요.”
“감사합니다. 이건?”
“율바스 유마스라고 불리는 건데요. 보다시피 사료죠. 여긴 먹을 것이 그다지 풍족하지 않거든요. 이건 노예들이 보통 먹는 사료인데 어쨌든 생존식품으론 이만한 것도 없긴 해요. 필요한 영양소와 섬유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건강에 나쁜 건 아니지만..”
“냄새가 좀 역하네요..”
“맛은 더 지독하죠. 미안해요. 제가 좀 잘났더라면 더 나은 음식을 대접할 텐데..”
“반대로 뛰어난 노예상인을 만났더라면 지금 전 더 심한 학대나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오히려 감사해요. 당신이 말한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지금 전 아주 상냥한 주인을 만난 거니까요.”
“아하하.. 이렇게 둘이서 밥을 먹은 지가 언제인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 조금 기쁘네요. 적어도 내일 혼자서 일어나진 않아도 되니까요.”
가장 위험하면서도 걱정되는 첫날은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