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환자 ##########################
꺅-
여자의 비명 소리를 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검은색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밤의 그늘 속에 더욱 어둡게 몸을 숨긴 남자는 커다란 마스크 속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칼을 품은 자객 같은 눈빛이 그곳을 찌르듯 바라봤다.
여자의 비명은 여운을 남기지 못하고 끊어졌고 그 뒤로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골목 어둠에 숨어 성훈의 집을 감시하던 왕이펑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뭔가 잘못됐나?’
성훈의 집 2층에 불이 켜지며 창밖으로 여러 인형의 그림자가 스쳤다.
‘이 새벽에 모두 깨우다니... 오늘은 날이 아닌가?’
왕이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소리 나지 않게 열쇠를 쓸었다.
‘쉬운 일이 없구나.’
체념한 듯 돌아서는 왕이펑의 어깨 너머로 집을 급히 나서는 성훈과 사람들이 보였다.
급히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긴 왕이펑이 모자를 더욱 눌러 얼굴을 가렸다.
성훈의 집 차가 전조등을 켜고 빠르게 그 앞을 지나갔다.
***
잠시 뒤, 작은 코골이 소리와 함께 성훈은 잠이 들었다.
아침 햇살이 어느새 자라난 그의 턱수염을 지나가며 꺼슬한 지난 피곤을 보여줬다.
그것을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두 눈이 겨울 바다 속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하... 난 어쩌라고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모니카는 답답한 가슴이 돌처럼 굳어 무거웠다.
새벽에, 기다렸던 성훈과의 대화 속에서 준비된 연기를 끝마치고 내려가려 했었다.
터지기 직전의 물 풍선처럼 위험했던 감정들이, 계단 앞에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얘기하는 성훈 때문에 금세 터질 거 같았다.
‘도련님의 고백에 아무대답 못 했던 건 대답대신 울음이 터져나올까봐 무서워서였어.......’
그의 손을 간신히 뿌리치고 어두운 계단을 뛰쳐나가듯 내려가던 모니카는
꺅~
어둠속 두 개의 인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보고 놀라 소리 질렀었다.
‘내가 너무 감정에 휩싸여 있었던 거야. 아무리 어두웠다지만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밤을 찢는 모니카의 비명소리에 성훈이 놀라 계단을 뛰어 내려왔고, 발을 겹질러 뒹굴었다.
우당탕탕 계단을 구른 성훈은
모니카, 괜찮아요?
모니카가 겹쳐진 혼란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를 부르며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오빠!
썽훈, 괜찮아요?
이어서 밑에서 들려온 소리는 모니카가 놀랐던 인형들이 스미스와 이레네임을 증명했다.
“하~”
‘정말, 바보 같았어.’ 하고 모니카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새벽의 소동을 자책했다.
깁스한 성훈의 한 쪽 다리가 얇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파란색 그물처럼 성훈의 발에 감긴 깁스에
오빠, 빨리 나!
라고 쓰인 글씨는, 그러는 건 어디서 들었는지 이레네가 학원가기 전 매직으로 쓴 글씨였다.
한글을 쓰는 게 아직 어색한 모니카는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이레네가 쓴 글을 잠시 어루만지는 모니카의 손끝에 오돌토돌한 느낌이 차갑게 전해졌다.
‘나도 뭐라 쓸 수 있었으면...’
깁스한 곳에 글씨를 적는 것이 한국의 쾌유를 비는 의식 같은 걸로 믿는 모니카였다.
내비치지 못한 감정의 아쉬움이 손끝에 머물다 사라졌다.
‘깨어나면 배고프시겠지?’
잠든 성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모니카였다.
성훈의 방을 나가는 모니카 뒤로 성훈의 코고는 소리가 조용히 멀어졌다.
어제 청소할 때와 달라진, 조금은 흐트러진 방안 물건들이 숨죽이고 숨어있었다.
***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한 여름의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며 성훈을 깨웠다.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운 성훈이 눈부신 방안의 햇살에 실눈을 떴다.
‘하... 커튼을 바꾸던지 해야지 잠도 못 자겠네.’
떡진 머리에 까슬하게 자라난 턱수염, 씻지 않아 눈에 낀 눈곱에 여름철 반바지 아래 파란 깁스까지......, 하루 만에 환자 꼬라지를 완성한 성훈이었다.
실눈을 감고 다시 잠들려던 성훈은 감으려는 실눈 사이로 모니카가 보여 깜짝 놀랐다.
“어? 모니카. 언제 왔어요.”
언제나 비슷한 차림이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모니카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요. 혹시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아, 아니요. 다 잤어요.”
성훈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침대에 앉았다.
“더 주무셔도 되는데...”
“더 자긴요. 다 잤어요. 모니카야 말로 피곤하지 않아요?”
식구들 모두 우르르 스미스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병원 응급실에 다녀온 시간이 아침이었다.
에메랄드빛 눈으로 걱정하던 모니카와 발을 동동 거리며 곧 울 것 같던 이레네, 그리고 툭하면 하품하던 스미스까지 모두 한 잠도 자지 못했다.
“저도 아까 잠깐 쉬어서 괜찮아요.”
‘쉬지 않았을 거야...’
조금 초췌해진 모니카의 얼굴이 성훈의 마음을 긁었다.
“더 쉬어요. 집안일은 괜찮아요.”
모니카의 볼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성훈이었지만, 손은 조금 꿈틀만 할뿐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많이 쉬었어요. 그것보다 도련님 깨면 배고프실까봐 음식 좀 가지고 올라왔는데...”
그제야 성훈의 눈에 책상위에 놓인 쟁반이 보였다.
“내려가서 먹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도련님, 다리 다쳐서 불편하시잖아요.”
“살짝 인대가 늘어난 건데요 뭐. 사실 깁스도 안 해도 되는데... 출장이 잡혀서 빨리 나을라고 하고 온 거라 괜찮아요.”
“그럼 더 움직이지 마셔야죠. 빨리 나야 되니까.”
그러면서 성훈의 등 뒤로 베개를 포개놓는 모니카였다.
성숙한 모니카의 체취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성훈의 몸이 반응했다.
“기대세요. 식기 전에 식사하셔야죠.”
다시 한 번 성훈에게 접근해서 쟁반을 다리에 올려놓으려는 모니카였다.
“이불 좀.......”
“아, 아니요. 그냥 위에 올려 주세요.”
“안돼요. 이불에 흘리면 빨래하기 힘들어요.”
그러면서 한 손으로 이불을 밑으로 당기는 모니카였다.
막으려 했던 성훈의 손을 이기고 젖혀진 얇은 이불 밑에서
Good Morning~
힘차게 기상한 성훈의 동생이 발기차게 인사했다.
“어머!”
몇 번 마주쳤지만 매번 모니카에겐 어려운 성훈의 동생이었다.
“....... 이거 좀.”
“네? 아... 예”
고개 돌린 모니카의 손에서 음식 쟁반을 건네받아 성훈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올렸다.
수평이 잘 안 잡히는 걸 몸을 어떻게 움직여 간신히 쟁반의 수평을 잡는 성훈이다.
“.......”
“그냥 저 주세요.”
새우처럼 몸을 구부려 겨우 수평을 맞추는 성훈이 불쌍했는지 모니카가 쟁반을 다시 뺐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음식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게 써는 모니카였다.
작은 칼질에도 모니카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모니카.”
“네?”
“고마워요.”
성훈이 진심을 담아 낮은 목소리를 전했다.
“저도... 고맙고 죄송해요.”
모니카가 쑥스러운 듯 음식을 써는 일에 집중하는 척 했다.
지난밤의 냉랭하고 어색했던 감정들이 얼음이 물에 녹듯 풀어지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걱정을 덮을 만큼 가까이 붙은 그들의 체향이 향긋했다.
성훈은 이 순간 모니카를 붙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몸살은 다 나았어요?”
모니카는 하루 전 성훈이 자신을 간호했던 것을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발가벗겨진 몸에 홀 겹으로 걸쳤던 남방의 체취가 더욱 짙게 모니카 옆에서 풍기고 있었다.
“네... 도련님, 덕분에요.”
모니카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지만 음식을 조각내던 손이 조금은 느려졌다.
“다행이네요. 내가 열심히 간호한 보람이 있네요.”
“열심히요?”
만족한 듯 큰 입으로 둥글게 미소 짓고 있는 성훈을 모니카가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네, 열심히... 참았어요.”
모니카의 에메랄드빛 두 눈이 무슨 소린지 몰라 성훈을 잠시 보다가 놀라 커다랗게 떠졌다.
“어머,” 급히 고개를 모니카가,
“수... 수고하셨어요.”
고개를 숙이고 작게 감하했다.
[ Ps. 땀만 닦고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짓은 나중에 하게 해줘요. ^^; ]
성훈이 썼던 쪽지가 생각나 모니카의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다 됐어요. 이제 드세요.”
모니카 쟁반을 자신이 앉은 자리에 두고 다급히 일어서려 했다.
놀란 토끼마냥 움츠려진 몸이 빨랐다.
“잠깐만요.”
성훈이 모니카의 가는 손목을 급하게 잡았다.
꿀꺽,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왠지 이대로 모니카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성훈의 본능이 한 일이었다.
“네?”
“......, 머, 먹여줘요.”
“네에?”
다리 다친 성훈이 팔 다친 화자 흉내를 내려는 상황에 모니카가 놀라 되물었다.
성훈도 ‘이 무슨 말도 안 돼는 부탁이란 말이냐, 성훈아~!!!’ 하고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기고 보자.’
“저번에 모니카 쓰러졌을 때 내가 일도 못가고 진짜 열심히 간호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모니카가 나 좀 간호해줘요.
나, 나 지금 힘들어서 팔 올릴 힘도 없어요.“
팔 올릴 힘도 없다는 사람이 하체는 우뚝 솟아있다.
성훈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모니카를 바라봤다.
“배고파요. 모니카... 네엥?”
‘내가 지금 무슨 꼴을 보이고 있는 거지?’
자기가 하는 개수작에 깊은 자괴감이 드는 성훈이었다.
“휴~, 도련님.”
모니카가 한숨을 쉰 뒤 성훈을 불렀다.
“네?”
“어제 제가 도련님께 선을 지켜달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
새벽에 쌀쌀맞게 자신을 찾아와 선포하던 모니카가 생각나 성훈은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오늘만 이에요.”
쟁반을 다시 무릎에 얹고 성훈 옆에 앉는 모니카였다.
겁먹은 표정의 성훈이 모니카의 두 눈에 귀엽게 들어왔다.
“아~ 하세요.”
포크로 음식을 찍어 한손으로 받치며 들이미는 모니카였다.
에메랄드빛 두 눈이 살짝 웃고 있는 듯 했다.
“앙~~~”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성훈이 큰 입을 찢어질 듯 크게 벌리며 앙 소리를 냈다.
작은 소곤거리는 소리와 이따금 웃는 소리가 방안에 잔잔히 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