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4)

 ########################## 14화 상처 ########################## 

하늘색 여름 남방을 손에 들고 모니카는 방을 나왔다.

 성훈의 쪽지를 읽다 걸려온 전화에 방에서 늦어진 모니카였다.

 밤이 오는 소리에 설레듯 붉어진 집 안은 소리 없이 고요했다.

 ‘빨리 치우고 저녁 준비 해야겠네.’

 자신이 침대에서 보낸 시간이 꽤 길었음을 안 모니카는 서둘러 세탁실로 들어갔다.

 하얀색 빨래 바구니에서 여러 옷가지와 아직 젖어있는 수건 하나가 모니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성훈이 입힌 남방을 그 속에 넣으려던 모니카는,

 ‘...... 도련님.’

 성훈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늘색 남방을 잡은 손이 놓지 못했다.

 ‘오빠를 사랑해... 진심이야.’

 어젯밤 이레네가 했던 말이 기억 저편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성훈의 옷을 잡은 모니카의 손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있던 모니카의 처진 어깨가 한동안 그대로여서 시간은 잠시 멈춰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작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듯 했다.

 좁은 세탁실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던 노을이 점점 가라앉아 어둠을 깔았다.

 하-

 닫혀있던 모니카의 입술이 살짝 벌려지며 작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풀려진 휴지처럼 길게 늘어지며 성훈의 남방이 바구니로 흘러 내렸다.

 옆에 놓인 청소 걸레를 챙겨 세탁실을 나서는 모니카의 얼굴이 깊게 숙여 보이지 않았다.

 .......

 얇고 하얀 발목아래 앙증맞은 고양이 양말이 단화에서 나왔다.

 학원에서 집까지 한 없이 걸어온 이레네의 퉁퉁 부은 발이었다.

 “이레네?”

 신발을 벗자마자 계단에서 들리는 모니카의 목소리였다.

 한 손에 걸레를 잡고 계단을 내려오던 모니카였다.

 걸어오며 노란색으로 번져 보이던 가로등을 봤을 때처럼 이레네의 눈에 모니카가 들어왔다.

 “엄... 엄마.”

 한 참을 걸려 한 참을 걸어온 시간은 이레네에게 어떠한 답도 내주지 않았다.

 ‘지금 집에 가면 엄마는 방에 있을 테니까... 일딴 화장실에 가서...’

 다만, 집에 가서 모니카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한 계획만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계획은 작은 우연에도 무너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려놓았다.

 모니카를 보는 크게 떠진 눈이 붉게 뜨거워졌다.

 그것을 식히려는 듯 차오르는 속절없는 눈물에 이레네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 방으로 향했다.

 “이레네...”

 모니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이레네.”

 방까지 따라 들어온 목소리에 이레네는 할 수 없이 모니카를 바라봤다.

 상기된 두 뺨에 무언가가 흘러 내려 차가웠다.

 “.......”

 이레네를 본 모니카의 에메랄드 눈빛이 흔들리다 천천히 굳어갔다.

 침묵이 밝게 켜진 형광등 아래서 진실을 밝히려 했다.

 “... 할 얘기가 있어.”

 모니카의 핑크색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

 왕이펑은 정 사장의 따가운 시선을 모른 체하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손님 오기 시작한 시간에 모하는 거야?’

 정 사장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 했다.

 “(어, 이번엔 확실한 거야?)”

 중국어로 대화하는 왕이펑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을 텐데, 구석진 자리에서 한 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대화하는 왕이펑이었다.

 “(저번에도 가정부 딸이 열아홉 살이라고 했다가 틀렸잖아.)”

 구겨진 말투로 왕이펑이 통화했다.

 “(웃지 마, 내가 스무 살짜리 동생노릇 하냐고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래서 일이 갑자기 왜 그렇게 됐는데?)”

 왕이펑의 허리가 조금 더 숙여졌다.

 양꼬치가 숯불에 구워지며 피어난 연기가 환기가 안 돼 가게 안을 뿌옇게 메웠다.

 “(알았어, 그럴게. 끊어.)”

 “이펑아! 환풍기 좀 틀어라.”

 정 사장이 전화를 끊는 왕이펑에게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네~”

 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뛰어가는 왕이펑이었다.

 열쇠 하나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과 부딪혀 딸깍 거렸다.

 ***

 “이제 오는 거야?”

 가게 문을 닫으며 정 사장은 차에서 내리는 성훈에게 물었다.

 “네... 일이 늦게 끝나서요.”

 성훈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닫으시게요?”

 “뭐 평일이라 더 오지도 않을 텐데... 어때, 오랜만에 둘이서 소주 한 잔 할까?”

 정 사장을 내리던 가게 셔터를 멈추고 손으로 소주잔을 만들어 한 번 꺾었다.

 “다음에 해요. 다음엔 제가 살게요.”

 성훈은 짧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긴, 니 얼굴 보면 한잔만 먹어도 뻗겠다. 어서 올라가서 쉬어.”

 “네. 들어가세요.”

 인사하고 돌아서는 성훈 뒤로,

 “다음에 사겠단 말 꼭 지켜! 이펑아 우리도 가자.”

 “네? 아... 저는.......”

 마감한 정 사장과 왕이펑의 대화가 들렸다 사라졌다.

 .......

 성훈이 들어온 시각은 새벽이었다.

 어깨에 걸쳤던 카메라 가방이 무릎 밑으로 흔들거리며 신발을 벗는 성훈의 행동을 재촉했다.

 소리 나지 않게 신발을 구두를 벗은 성훈은

 ‘휴... 힘드네.’

 어제 설친 잠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강행군에 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딸깍-

 조용히 들어온다고 들어온 성훈이지만 아니었나보다.

 방문을 열고 검은색 실루엣이 나와 성훈에게 다가왔다.

 “오셨어요, 도련님.”

 “아, 깼어요? 미안해요.”

 모니카였다.

 그녀는 성훈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다 나온 기색이 아니었다.

 “식사하셔야죠.”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 몸은 괜찮아졌어요?”

 아침에 쓰러졌던 모니카를 생각하며 성훈이 물었다.

 “네, 좋아 졌어요.”

 살짝 뺨이 붉어지는 모니카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쉬어요.”

 성훈은 아픈 모니카가 자신 때문에 쉬지도 못했단 생각에 빨리 올라가려 했다.

 “출출하실 텐데 뭐라도 간단히 가져갈게요. 먼저 올라가세요.”

 괜찮다는 성훈에게 모니카는 그렇게 말하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뭣 땜에 그러지... 무슨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혹시 낮에 쪽지를 보고? 아님 이레네가 무슨 말 했나?... 그럼 안 되는데.......“

 계단을 올라가는 성훈의 발걸음이 묘한 설렘과 두려움에 조심스러웠다.

 “낮에는 고마웠어요.”

 답답함에 주스 잔에 손을 대려는 성훈에게 들려온 모니카의 첫 마디였다.

 평소 소파 테이블에 음식만 놓고 가던 모니카는 성훈이 청하기도 전에 성훈 앞에 앉았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모니카의 낯선 모습에 성훈은 침묵해야 했고, 모니카 또한 입을 열지 않았었다.

 “아니에요. 좀 놀랐지만, 그것보다 빨리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아, 약...’

 “잠시 만요.”

 성훈은 모니카가 뭐라 할 라는 찰나에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살짝 입술을 깨문 모니카의 모습이 꼿꼿하게 소파에 남겨져 깊은 밤의 무게를 받치고 있었다.

 성훈은 곧 하얀색 종이봉지를 들고 나왔다.

 “몸살 약이에요. 낮에 샀어요.”

 모니카 앞으로 ‘보람 약국’이라고 쓰인 흰 봉지가 전해졌다.

 약봉지를 내려 보는 모니카의 시선이 정지한 듯 가만히 있었다.

 에메랄드 눈동자가 그 의미를 깊은 저편으로 숨긴 채 눈을 떼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다시 둘 사이에 앉았다.

 다리위로 포갠 가느다란 두 손을 꼭 잡으며 모니카가 성훈을 바라봤다.

 이유모를 모니카의 두 눈을 바라보는 성훈의 목울대가 살짝 넘어갔다.

 “이러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바싹 마른 모래가 살갗을 할퀴며 잠식하듯, 모니카의 그 말에 성훈이 빠져들었다.

 “네?”

 흔들리는 동공 사이로 성훈이 간신히 되물었다.

 “자꾸 이렇게 선을 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도련님과 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유지해 주세요. 안 그러면 이 집에서 일 안하겠습니다.”

 성훈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모니카였다.

 흔들림 없는 어깨가 이상하게 커 보였다.

 성훈의 넓은 가슴 어딘가 금이 갔다.

 부서지기 전에 가장 아프게 갈라지듯 금은 순식간에 퍼져갔다.

 “그게 무슨....... 혹시 이레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거예요?”

 성훈의 입에서 갑자기 나온 딸의 이름에 모니카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이레네는...”

 성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긴장한 두 귀가 모니카의 소리에 집중했다.

 순간의 시간이 길게 늘어났었다.

 “이... 레네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을 하며 모니카는 끝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아.’

 “가볼게요. 제가 드린 말 꼭 지켜 주셨으면 해요.”

 자리를 뜨는 모니카였다.

 일어나 등을 돌리는 모습이 급해 보였다.

 “그리고... 이레네, 많이 이뻐해 주세요.”

 계단을 향해가며 성훈에게 하는 마지막 말소리가 떨리는 듯 했다.

 내려가는 계단을 한 걸음 남겨두고 모니카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모니카의 가는 팔목을 잡은 성훈이 손이 땀에 젖어 떨고 있었다.

 “말... 말 좀 해요.”

 하지만 성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등 돌린 모니카의 모습이 붙잡고 있어도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나 진심으로 모니카 좋아해요.”

 성훈의 고백이 어두운 계단 밑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이레네는 그냥 동생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모니카에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돌아오지 않는 고백을 다른 말로 붙잡으려 했지만 그마져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성훈이 대답 없는 모니카의 잡은 팔에 힘을 주어 돌려 세우려 했다.

 하지만,

 이내 뿌리치고 어두운 계단 아래로 뛰쳐가는 모니카였다.

 테이블 위, 혼자 남겨진 약봉지 속으로

 “꺅!”

 모니카의 비명 소리가 담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