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유혹 ##########################
이레네가 이상했다.
오늘 학원에서 어땠네, 점심이 어땠네, 버스에서 어땠네, 자기 전 엄마에게 재잘재잘 거리던 아이가 눈을 꼭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맞아, 오늘 학원에서도 일찍 왔었어.’
자리에 눕기 전 물어 봤어야 했는데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모니카는 그러지 못했다.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약간 열도 있는 지 하얀 두 뺨이 살짝 상기 돼 있는 이레네였다.
그런 이레네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자신을 따라 타국에 온 이레네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모니카였다.
‘그냥 고향에 두고 온 다음에 자리 잡고 부를걸 그랬나?’
모니카는 이레네와 같이 한국에 들어온 게 너무 빠르지 않았나, 후회했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있기엔 너무 위험했어...’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붕괴된 그녀들의 고향은 지구 반대편 뉴스에도 가끔 나올 정도로 막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착하기만 한 이레네를 그런 곳에서 계속 있게 할 순 없었어. 잘 한 일이야...‘
붕괴된 사회 속에서 여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한 모니카는 고향 소식을 들을 때 마다 잘한 일이었다고 자위했다.
모니카의 가는 손이 한 번 더 이레네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우리 딸.’
딸아이를 위해 한국에 왔다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그래서 이레네를 위한 결정이었음을 확신하면서도 이런 날이면 미안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니카였다.
“으음...”
엄마의 손길에 잠시 깼는지 이레네가 작은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도련님과의 일은 이레네가 몰라야 할 텐데...’
어젯밤 취한 성훈을 위층에 올려 보낼 때부터, 성훈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변한 모니카였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심적으로 혼란했다.
설레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 자신과 딸의 앞날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혼자 걱정하는 모니카의 눈앞에 돌아누운 이레네의 작은 등이 멀게 느껴졌다.
***
“성훈 잘 자써요?”
“어, 스미스 언제 왔어요?”
성훈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에 내려오니 식탁에 앉은 스미스가 보였다.
“새벽에 와써요. 올했만에 같이 아침 먹네요.”
새아빠와 오랜 시간 같이 보내며 돈독한 정을 쌓으라는 엄마의 바램과는 달리 스미스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스미스랑 있는 시간이 아직은 낯선 성훈에겐 좋은 일이었지만, 엄마의 바람을 외면하는 거 같아 마음 한 켠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뭐, 가끔 보는 얼굴이니까 볼 때는 좋은 얼굴로 보는 게 좋겠지.’
그래서 성훈은 만날 때마다 스미스에게 살갑게 굴었다.
“날도 더운데 쉬엄쉬엄 일해요 스미스. 무슨 공무원이 그렇게 바빠요.”
친근하게 스미스를 대하는 성훈이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요.”
어느새 쪼르르 달려 나온 이레네가 성훈 옆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모두 같이 먹나?’
스미스가 있으면 항상 나중에 식사를 하던 이레네가 식탁에 앉은 모습을 보고 성훈이 모니카를 찾았다.
하지만, 모니카는 주방에 있을 뿐 식탁에 앉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오빠.”
“어? 어, 어...”
모니카를 바라보다 이레네가 부르자 성훈이 놀랐다.
“잘 잤어요?”
“어, 어.. 그래”
이레네가 말 할 때마다 주저하며 말을 더듬는 성훈이었다.
어제의 키스 때문인지, 모니카 하고의 비밀 때문인지 성훈은 이레네를 대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애는... 아무렇지 않은 가 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이레네를 보며 성훈은 당황했다.
‘앞으로 이레네와 불편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에 밤새 뒤척이던 자신이 억울할 정도였다.
“모니카도 가치 먹어요.”
스미스가 음식을 나르는 모니카에게 얘기 했다.
스미스의 요청에 몸을 잠시 움찔하는 모니카가 자신 때문일 거라 성훈은 생각했다.
“그래요 의자도 있는데 앉아요.”
성훈이 스미스를 거들었다.
“아니에요, 전 주방에 정리할게 남아서 이따 먹을 게요. 먼저들 드세요.”
누가 잡을 까봐 급히 식탁을 뜨는 모니카였다.
아쉬워서 주방으로 향하는 모니카를 보고 있느라, 성훈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스미스의 음흉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이레네 학원은 어때요?”
어느새 고개를 돌린 스미스가 물었다.
“다닐만해요. 아 밑에 가게에서 일하는 애도 우리 학원 다녀요. 신기하죠.”
“오~ 진짜요? 이런 우연이... 인연? 한국말로 인연이라고 하나요? 하하 신기하네요.”
스미스의 말에 갑자기 장난기가 돋은 성훈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둘이 사귀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헉-
강렬한 다크 포스에 성훈이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치켜 뜬 눈으로 노려보는 이레네의 눈빛에 솜털까지 일어나며 창백해지는 성훈이었다.
“아... 아니, 어디 그딴 알바 놈이 우리 이레네... 이레네를 넘봐. 죽을라고.”
갑자기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성훈이다.
“저도 봤어요. 왕이펑이라고 했나? 키만 되게 크고 너무 말랐던데요. 그런 남자한테 우리 이레네 못 뺐기죠.”
주방에서 모니카가 거들었다.
“그죠? 근데, 모니카도 알아요?”
“네, 저한테 꼬박꼬박 인사 잘 하던데요.”
‘이펑이가 그렇게 인사성이 밝았나?’
이레네가 잠시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이레네는 어떤 남자 좋아해요?”
찌릿.
본능적으로 성훈을 흘겨본 이레네였지만, 지금 성훈에겐 노려보는 것으로 느껴져 감전된 듯 잠시 몸이 멈췄다.
‘안 돼... 말하지 마.’
이레네가 자신의 이름을 말 할 거 같아 긴장하는 성훈이었다.
“스미스 아저씨 같은 남자요.”
이레네가 앞에 스미스를 보며 귀엽게 웃었다.
“하하, 역시 이레네 바께 없네요. 하하하”
이레네의 대답이 그렇게 기분 좋았는지 스미스는 한 참을 즐거워하다 방에 들어가 봉투를 한 장 가져왔다.
***
“집에 안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만 고치고 있는 이레네에게 왕이펑이 짜증난 듯 말했다.
“약속 있어. 먼저 가.”
거울만 쳐다보며 이레네가 무심히 말했다.
“으... 그럼 진작 말하지. 기다렸잖아.”
왕이펑은 자신이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누가 기다리래?”
이레네가 자신을 보며 도끼눈을 뜬다.
‘아... 요 쪼그만걸 때릴 수도 없고...’
“나 어때, 예뻐?”
평소보다 공을 들였는지, 더 짙어진 이레네의 얼굴이었다.
“어디 남자 잡아먹으러 가냐?”
“뭐?!”
“아냐아냐, 이뻐. 평소보다 진짜 이뻐.”
“그럼 평소엔 안 이쁘단 말이야?”
‘아, 또 왜 말이 그렇게 되~’
“아니 평소에도 이쁜데 오늘 더더욱! 이쁘다고.”
잠시 노려보던 이레네가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 거울을 본다.
“누구 만나?”
“응, 우리 오빠.”
“건물주님? 둘이 모하게.”
“영화 보러 가기로 했어.”
“오~ 그럼 데이트?”
놀리는 듯한 왕이펑의 어투에 이레네가 다시 한 번 그를 노려본다.
그러다,
“휴~ 네가 뭘 알겠니. 누나 일엔 신경 끄고 가게에나 가라~”
끝까지 누나 행세하는 이레네였다.
“아줌마는 같이 안가?”
모니카 얘기였다.
“엄마는 같이 안가. 둘이서만 가... 너 자꾸 꼬치꼬치 물을랫?”
이레네가 귀찮은 듯 짜증을 냈다.
“칫, 아줌마도 같이 데려가지 지네만 가냐.”
“엄마는 괜찮다고 했어.”
화장을 다 했는지 이레네가 일어나며 가방을 쌌다.
“누난 갈 테니까 동생도 어여 일 하러 가 보세요.”
기분이 좋은지 이레네가 신나 보였다.
“어디가? 문 그쪽 아니야.”
“확! 쪼그만 게. 참견 말라니까.”
못 참겠는지 쪼그마한 이레네가 쬐끄마한 주먹을 들어 왕이펑에게 겁을 준다.
주춤한 왕이펑을 두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이레네였다.
“아... 장실. 말을 하지...”
주머니 속으로 집 열쇠를 아쉬운 듯 만지작거리는 왕이펑이었다.
***
스미스가 준건 시사회 초대권이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개봉도 하지 않은 기대작 티켓 두 장을 성훈에게 내밀며 이레네랑 다녀오라 했다.
‘이왕 가려면 다 같이...’
정확히 말하면 성훈은 모니카랑 가고 싶었지만, 표가 두 장 밖에 없다고 했다.
‘전 괜찮아요. 이레네 서울 와서 구경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데 이번에 도련님이 같이 놀아 주세요.’
나중에 개봉 하면 다 같이 가자는 성훈의 말에 모니카가 이레네를 생각하며 같이 가주길 부탁했다.
‘하... 모니카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 오늘 스미스 밖에 안 나간다고 했으니 그게 그건가?’
음탕한 생각을 하며 아쉬워하는 성훈에게,
“오빠?”
“깜짝아... 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꾸 이레네와 말을 섞으면 떨게 되는 성훈이었다.
큰 눈으로 빤히 성훈을 쳐다보던 이레네가
“이거 치운다?”
둘 사이를 막고 있는 팔걸이를 올리려 했다.
“응? 왜?”
“싫어?”
“으응? 아니, 치워야지.”
가시 돋친 이레네의 반응에 얼른 팔걸이를 올리는 성훈이었다.
“남자 여자 같이 와서 팔걸이 하고 있으면 이상하잖아...”
그런 성훈에게 작아지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이레네였다.
영화 시작과 함께 불이 꺼져 성훈은 붉어진 이레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영화는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이 나오는 그렇고 그런 멜로 액션 영화였다.
‘보리017 작가가 썼으면 훨씬 재밌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불편해진 몸의 자세를 바꾸는 성훈에게 물컹한 무언가가 기대왔다.
어?
이레네였다.
이레네가 기대오자 은은한 향이 퍼져 왔다.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어둠을 타고 성훈의 코끝을 유혹했다.
꿀꺽-
갑자기 느껴지는 물컹한 이레네의 몸짓과 호르몬을 자극하는 향수 냄새에 성훈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갔다.
‘여... 여기서 갑자기 몸을 빼면 이레네가 너무 무안하겠지...’
영화 속 여주인공이 외쳤다.
[그러면 안 돼요.]
얼음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성훈에게 더 이상 영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물컹한 기분이 조금씩 압박되며 점점 몸을 기대오는 이레네였다.
‘그래, 자리가 불편해서 그럴 거야. 영화관에서 잠깐 기대는 게 뭐.’
하지만, 생각하곤 다르게 이레네의 숨결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하는 성훈이었다.
......, 스윽
어느새 성훈을 팔을 살짝 잡은 이레네가 서훈의 팔을 어깨에 올려놓으며 안으로 들어온다.
‘어... 어?’
이미 거부할 타이밍을 놓친 성훈이 잠자코 이레네의 행동에 따른다.
‘모 친하다면...’
‘손잡고 보는 것도 아니고 좀 더 편한 자세로 영화 보는 것뿐이야...’
[그건 범죄에요.]
이레네의 작은 손이 어깨동무한 성훈의 손끝을 살짝 잡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가슴에 닿을 일은 없으니까...’
이레네와 너무 붙어 긴장하고 있는 성훈이었다.
모든 감각이 이레네가 잡고 있는 손끝에 모여져 가까이 있는 이레네의 가슴에 설레고 있었다.
[아니, 사랑이에요.]
성훈의 손끝을 잡은 이레네의 손이 성훈의 손을 살짝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꿀꺽,
어둠 속에서 성훈의 목울대가 다시 한 번 크게 넘어갔다.
‘무슨 의미지...’
[후회하지 않아요.]
스르르 자신의 손을 내리는 이레네였다.
이레네의 가슴 위에 놓인 손을 떼지 못하고 가만있는 성훈이었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요.]
그 손으로 이레네의 가슴을 살짝 누르는 성훈이었다.
화장실에서 벗어둔 이레네의 파란색 브라가 가방에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