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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24)

 ########################## 4화 남편 ########################## 

“오빠?”

 계단을 내려오다 성훈은 이레네와 마주쳤다.

 레이스 달린 소녀풍의 원피스 잠옷이 아레네의 하얀 피부와 어울려 귀여웠다.

 “이레네? 안 잤어?”

 못된 짓을 하려다가 들킨 아이처럼 놀라 성훈이 당황했다.

 “이제 9시도 안 됐는데 벌써 자요?”

 ‘아직 9시도 안 됐구나...’

 하루를 꼬박 새고 낮에 잠든 성훈은 그리 많은 시간을 잠들지 않았다.

 “이레네는 안 피곤해?”

 “저는 비행기에서 많이 자서 괜찮아요.”

 스무 살의 씩씩함을 과시하며 이레네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오빠 어디 가요?”

 “아... 흠! 흠흠... 목이 좀 말라서, 물 마시려고.”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목을 만지는 성훈 이었다.

 “헉!”

 이레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성훈을 잡아먹을 듯 쳐다본다.

 “흠! 흠... 흠... 왜, 왜 그래?

 과장된 행동으로 연신 가래를 끓는 성훈이다.

 ‘뭐... 눈친 챘나?’

 도둑이 재발 저리다고 성훈은 짐짓 긴장했다.

 “오빠.”

 “으, 응?”

 식은땀이 나려 했다.

 “담배 끊어요.”

 “물은 제가 가지고 올라갈게요. 오빠한테 물어볼게 있어서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먼저 가 계세요.”

 그리곤 휙, 돌아 계단을 내려가는 이레네였다.

 ‘뭐야, 그런 거였나?’

 죄 진 것도 없으면서 안도하며 올라가는 성훈 이었다.

 ‘근데, 이레네 성격이 저렇구나... 낮져밤이?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성훈의 곱슬머리가 흔들렸다.

 .......

 “오빠? 이건 뭐에요?”

 애기애기 열매를 먹었는지 하얗고 펑퍼짐한 잠옷을 입고 이레네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묻고 다녔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성훈의 물건을 꼼꼼히 물어보는 이레네였다.

 “그거? 아이스하키 스틱.”

 “하키 했어요?”

 “어, 고등학교 때까지.”

 만날 싸움만 하고 다닌다고 엄마가 억지로 시킨 운동이었다.

 아이스하키가 거친 운동이라 혈기 왕성할 때에는 적성에 맞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군에 갔다 오니 생각에서 멀어졌다.

 “그냥 추억으로 가지고 있는 거야.”

 “음... 운동했었구나...”

 그러면서 성훈의 몸을 여기 저기 다시 관찰하는 이레네였다. 

 말이 품종검사 받는 기분으로 잠시 당황해 하던 성훈은,

 “어때, 이 오빠 남성미 짱이지?”

 괜히 엉뚱한 말 했다가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이레네의 큰 눈에 민망해진 성훈 이었다.

 “하... 하하...”

 가식적인 성훈의 웃음이었다.

 “뭐....... 허우대는 그런대로요.”

 ‘허우대는? 엄마한테 한국말을 배웠다더니 쓰는 표현도 엄마 따라하네...’

 성훈이 뭐라 말 하려는 사이,

 이레네는 폭삭 소파에 앉으며 자신의 핑크색 핸드폰을 짚어들었다.

 아이 같은 그녀의 행동에 펑퍼짐한 잠옷 위로 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젖가슴이 흔들렸다.

 꼴깍-

 방금 전까지 무지하게 화나 있던 성훈의 동생이 슬슬 간지러워졌다.

 사실 스무 살의 이레네가 마냥 귀여울 수만은 없는 일 이었다.

 모니카가 너무 글래머고 매력 있어서 그렇지 이레네도 충분히 또래에 비해 성숙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나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성훈은 태극기도 없이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애국자였다. 

 “그래서 여태 이 큰 집에서 혼자 살았던 거예요?”

 “응, 작업실에 작은 촬영실이라도 있으려면 이 집이 편했거든.”

 식구가 늘은 만큼 성훈은 인화실을 자신의 침실로 바꿔야 했지만 그런 건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랬구나... 외로웠겠다.”

 찾아오는 여자들로 전혀 외로울 틈이 없던 성훈이지만,

 조신하게 이 순간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슬쩍, 이레네의 앵두 같은 입술이 다가왔다.

 “오빠?”

 “으... 응?”

 스무 살 꽃다운 처녀의 살내음이 룰루랄라 성훈을 괴롭혔다.

 꼴깍-

 시선이 아까 봤던 이레네의 흔들리던 부드러움으로 가지 않으려 노력하는 성훈이다.

 “오... 빠?”

 더욱 앞으로 다가오는 꽃송이였다.

 작고 도톰한 핑크색 입술이었다.

 성훈을 부를 때마다 벌어지며 그 안에 더욱 붉은 야함이 엿보였다.

 “근데 누가 부인이에요?”

 “으... 응??”

 잠깐 주저하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아까 공항에서......”

 이레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선, 

 “아니에요! 저 갈래요!”

 선언하듯 말하고선 휙 돌아 우당탕탕 내려가는 이레네였다.

 아침에 사준 폰을 들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이레네는 성훈이 별 도움이 안 되자 성훈의 공간을 꼼꼼히 구경하고서 이렇게 사라졌다.

 ‘뭐지? 왜 저래?’

 이레네의 성격파악이 안 돼 걱정하기 시작한 성훈이었다.

 ***

 마트는 한산했다.

 동전을 넣고 카트를 뽑는 성훈의 손길이 신나 있었다.

 ‘도련님... 장 좀 봤으면 좋겠는데요...’

 아침 식사 후 모니카는 성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아니에요. 오늘 안 바빠요. 프리랜서라서 바쁠 때는 바쁜데 요즘은 한가하네요. 그럼 준비하고 나올게요.’

 ‘김 사장님, 제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네... 네... 죄송합니다.’

 빠르게 전화 몇 통을 돌리고 향수 까지 뿌리고 나온 성훈 이었다.

 검은색 칠보 레깅스트레이닝복에 얇은 하얀색 티 하나만 걸치고 나온 모니카는,

 ‘야해, 야해... 뭘 입어도 좋아...’

 늘씬한 키에 풍만한 신체 조건의 모니카는 어떻게 옷을 입어도 남자들의 시선을 받았다.

 성훈 또한 흘깃 흘깃 모니카를 훔쳐보며 혼자만의 상상에 작대기를 세우려 했다.

 “도련님!”

 헉-,

 “네?”

 “침이...”

 헉, 쓰읍-

 황급히 침을 닦는 성훈이었다.

 “마트 오니까 그렇게 좋아요? 성훈 도련님 먹는 거 되게 좋아 하시나 봐요? 호호”

 다행히 시식 코너를 지날 때 나온 실수였다.

 “하하, 아니에요... 하하하”

 성훈은 붉어진 얼굴로 대충 얼버무리며 웃고 있는 모니카를 쳐다봤다.

 반달처럼 둥근 눈을 하며 모니카가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모니카가 아침 보다는 밝아 졌네.’

 누군가에게 죄진 사람처럼, 혹은 화난 사람처럼 불편해 보이던 모니카는 집을 나서자 다시 편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낯설고, 피곤해서 그랬겠지...’

 “도련님, 안되겠어요. 물건은 일단 천천히 사고 여기 시식코너에서 뭐 좀 드세요. 이거 다 공짜라고 그랬죠?”

 미소 띠며 성훈을 잡아끄는 모니카였다.

 모니카는 가정부답게 가격, 용량, 신선도 등을 꼼꼼히 비교해 가며 물건을 골랐다.

 대충 짚어 장봐서, 생각나면 먹고 잊으면 유통기간이 지나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던 성훈에겐 지루한 장보기였지만,

 이거 저거 알려주며 같이 돌아다니는 성훈의 모습에선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니카 또한 아빠를 따라 처음 시장에 나온 여자 아이처럼 밝게 빛났다.

 “우와, 섹시가 참 예쁘시네요. 신랑이 좋겠어요?”

 시식코너 아주머니가 그들을 보며 웃으며 물었다.

 “국제결혼 한 거예요? 아내분이 정말 미인이시다.”

 아주머니의 급작스런 질문에 온실 창문처럼 그들을 감싸던 분위기에 금이 갔다.

 “아... 아내요?”

 “신혼부부 아니셨어요? 전 너무 다정해 보이셔서... 그럼 이분은 누구세요?”

 난감한 질문 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니 모니카의 젊은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그 뒤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가정부로 있어 집안 일만 하겠느니 같은 뒤따라올 흔한 오해들, 계속 장을 보러 올 때마다 모니카를 볼 시선들이 성훈은 걱정됐다.

 모니카도 그러한 사실을 아는 지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어색한 고요가 잠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네, 아내 맞아요.”

 “예쁘죠? 하하”

 “아이고, 남편 분이 아주 입이 찢어지네요. 찢어져. 호호”

 성훈은 이쑤시개로 음식을 찍어,

 “자, 자기도 한 번 먹어봐, 맛있어.”

 놀라 커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니카의 작은 입에 넣어 주었다.

 “그래, 요즘 국제결혼이 무슨 부끄러운 일인가요? 서로 사랑해서 잘만 살면 되지... 근데 남편분이 능력이 좋네요? 이렇게 예쁜 색시를 다 얻고. 호호”

 “하하, 그렇죠? 맛있네요. 이거 주세요.”

 별로 맛없던 냉동 완자를 두봉이나 사서 돌아서는 그들이었다.

 카트위에 덩그러니 묶여 있는 냉동 완자를 보며 성훈은 카트를 밀었다.

 “미안해요... 아주머니가 너무 오해를 하셔서......”

 카트를 미는 방향만 보며 성훈이 모니카에게 말했다.

 어색한 감정의 그늘이 그들을 비췄다.

 “아니에요...”

 모니카의 목소리가 작고, 왠지 따뜻하게 들렸다.

 잠깐의 정적 속에 모니카가 성훈을 올려 봤다.

 “이렇게 된 거 우리 오늘 신혼 부부 놀이해요?”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는 성훈에게 모니카가 수줍게 웃으며 반달의 예쁜 눈을 했다.

 홍조 띤 그녀의 볼이 사춘기 소녀처럼 빛났다.

 “저기 가 봐요.”

 카트를 미는 성훈의 팔 사이로 팔짱을 끼고 성훈을 잡아끄는 모니카였다.

 그들을 비췄던 감정의 그늘이 다시 핑크색으로 바뀌었다.

 한산한 마트를 하하, 호호, 하며 걷는 그들...

 이 순간에도 모든 감각을 팔뚝에 집중해 팔뚝에 닿은 모니카의 가슴을 느끼려 하는 성훈이었다.

 ***

 “보호자 분이 외국 분이세요?”

 검정고시 학원에서 이레네가 서류를 제출하고 받은 첫 질문이었다.

 “네... 어머니요.”

 낯선 환경에 다소 공격적인 접수원의 시선이 이레네를 주눅 들게 했다.

 “음... 저희가 외국인 수강생은 처음 이라 서요... 혹시 한국인 보호자는 없어요?”

 “없는....... 꼭 필요한가요?”

 “그건 아닌데, 저희가 외국분이 처음이라 혹시나 해서요. 있으면 여기 밑에 적어 주세요.”

 무슨 학원 등록 하는데도 배타적으로 내·외국인 가리는 접수원이었다.

 접수원이 내민 종이에서 이레네는 자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차가움이 전해 오는 듯 했다.

 잠시 종이를 보며 그 서늘함을 실감하던 이레네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뭐, 오빠한테는 나중에 얘기 하면 되겠지...’

 자신을 재촉하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이레네가 종이에 글자를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최성훈

 010-XXXX-XXXX

 ‘관계?’

 ‘오빠?... 도련님?...’

 '한국인이 오빠라고 하면 이상하고... 도련님 이라고 하면 더 이상 할 텐데...‘

 마지막 ‘관계’ 란에서 잠시 고민하던 이레네였다.

 그러다 주저하는 손짓으로 한자 한자 마지막 란을 조심스레 채워 넣었다.

 “됐죠?”

 접수원한테 서류를 밀어 넣고 고개를 숙이고 급하게 달려 나가는 이레네였다.

 따라랑-

 심장이 콩당콩당 뛰며 뒤로 문이 닫히는 종소리가 들렸다.

 접수원이 이레네가 주고 간 서류를 확인한 뒤 서류철에 갈무리했다.

 이름: 최성훈

 전화: 010-XXXX-XXXX

 관계: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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