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에 일시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며 나는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이어 두 팔은 물론 온 몸이 후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머리를 운전대에 묻는 그때 내 눈에 똑똑히 보여지는 내 발..
작고 아담한 내 발을 감싸고 있는 필드화가 가속패달위에 놓여있다.
"아니..어떻게..초보도 아닌 내가..."
아뿔사, 머리속으로 엉뚱한 생각들을 하면서 한 눈을 판 사이..
정지패달을 밟는다는 것이 그만 가속을 시켜버린 것이다.
황망중에 가슴만 벌럭벌럭 심하게 뛰고있다.
잠시 후 차창밖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난다.
아마도 접촉사고를 당한 그 차의 주인임이 분명하다.
[이..이, 여자가...!!?]
거친 동작으로 차창을 쿵쿵 두드리는 남자, 그 험악한 얼굴 표정이 보지않아도 짐작이 된다.
나는 그렇게 운전대에 얼굴만을 묻은 채 한참 동안을 꼼짝하지 않았다.
[..이봐요..문 열어봐요, 얼른! 집에서 살림이나 하..]
말을 끝맺지도 않고 다시 창문을 쿵쿵 두드리는 남자.
잠시 마사지 샵의 일 때문에 넋이 빠져 있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더듬더듬 윈도우를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 매우 미안한 표정의 가면을 쓴 후에 차창을 내렸다.
[어쩌죠. 초보 운전이라 서툴러서...]
남편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배운 운전이 벌써 3년쯤 되었지만, 내 입에서는그렇게 변명이 나온다.
[처음엔 다 그렇죠..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일단 차를 옆으로 뺄까요?]
마침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뜸한 관계로 접촉 사고가 일어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인이 없어 다행이다.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초보 티를 내면서, 남자의 자상한 지시에 따라 도로 옆으로 차를 세웠다.
나는 내 귀가 잘못되었나 하고 그제서야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뜸 "뭐냐 말이야..여자가 집구석에서 솥뚜껑 운전이나 하지.."
"아~ 짜증나..이래서 길이 밀린단 말이지.." 라고 마구 윽박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어 무조건 빌어야 할 판국이다.
얼핏봐도 상대방의 차는 국산 차종이 아닌 듯 했다.
한 눈에 봐도 늘씬한 동체에 중량감이 있어 보이는 그런 차였다.
[어..어떻게 해요, 제가 그만 깜빡! 한 눈을 팔다가..]
[참, 나..이 아가씨.. 브레이크를 밟아야지..거기서 가속페달을 밟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백주 대찾에 술 드신겁니까?]
그 와중에 어처구니없게도 그 남자의 매우 잘생긴 외모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얼른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지우며,
나는 몇 번이고 현재 상황의 접촉사고를 떠올려서 확인을 거듭했다.
"100% 내 과실..? 아냐..남자 차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면..그래 2:8..
가속패달을 밟았으니..꼼짝없이..다 물어줘야..아~몰라 3:7..나올지도 "
언젠가 남편이 얼핏 들려주었던 외제차량과의 추돌 사고 기사..
외제차와 사고가 나면 보험처리로도 대물 배상이 모자란다,
피의차주가 개인적으로 엄청난 돈이 깨진다 뭐..그딴
맙소사..하, 하필...국산차도 아니고..그것도 은색 빤쭈(벤츠?)를...눈앞이 캄캄했다.
근데 이 남자..나를 보고 대뜸 아가씨라니...
마사지 한 번 받고 갑자기 내가 10년 쯤 젊어지기라도 한걸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남자의 말이다.
다시 한 번 겨우 겨우 정신을 수습한 나는, 흘끔흘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고 수습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어쩌면 나의 나이 또래쯤 되어보이는 얼굴인데..
도저히 그 나이로 볼 수 없는 환한 인상과 해맑은 미소가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했다.
아직도 온 신경이 마비될 지경으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는데,
그 남자는 내 상태를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차 팔아도..내 차 수리비로 충당할 수 없어요 ]
[그..그래요, 외제차는 ..]
[아시긴 아시네요..출고한지 두 달 조금 지난 차를.. 하긴 뭐.]
그런데 창밖으로 살짝 훔쳐 보았을때 그의 승용차엔 이렇다 할 큰 흠집은 보이지 않고,
손상을 입은 쪽은 오히려 내 차.. 범퍼가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어떡해요. 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차문을 밀고 나왔다.
될 수 있는 한 우아한 자세로 늘씬한 다리를 천천히 일으켜,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는 내 몸을 감싼 옷차림을 매우 놀라운 눈으로 재빠르게 훑고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골프를 다녀오시나 보네요..]
[아니에요, 친구랑..연습장.. 구경만..]
가능한 한 빈티가 나도록, 남자의 동정심이라도 유발시키려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다.
하긴 도심 한가운데는 골프 연습장밖에는 없으니까..
얼굴 윤곽이 다 덮일 만큼 큰 선글라스를 벗은 나는,
감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약간 오므리면서 난처한 입장을 나타내 보였다.
[제 연락처를 드릴게요. 나중에라도 혹시...]
[음..그럴까요, 겉보기에 크게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사실 남자의 빤쭈차도 문제지만 내 차가 더 걱정이다.
출장을 떠나면서 흔쾌히 오케이는 했지만,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알면
남편은 당장 운전을 그만 두라고 호통칠 것이고
두 번 다시 내게 승용차를 맡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에서 면허증과 핸폰을 꺼내려고 다시 차안쪽으로 허리를 숙인다.
왠지 뒷머리가 간지럽다.
나의 뒷테를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남자의 시선이 등뒤로 느껴진다..
[자..아가씨..이건 제 명함입니다..]
[저어..저..아가...]
[차는 그냥 두고.. 곧장 병원 가보세요..안색이 좋지않아 보여요]
[...............?!!]
남자는 내가 미처 아가씨가 아니란 사실을 변명하기도 전에 성큼 자기 차쪽으로 걸어갔다.
후리후리한 몸매, 마치 남자 모델이 런웨이를 워킹하는 그런 자세의..긴 다리..다.
엉덩이는 작아보였는데 어깨는 넓어보이고..
"미쳤어..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나는 남자가 건넨 명함을 쳐다볼 사이도 없이 차에 올랐다.
다행히 남편은 내일까지 출장이다.
하지만 무슨 말로 어떻게 승용차 접촉사고를 변명해야 할지 걱정이다.
이튿날은 오전 내내 침대위에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오후 참에사 장바구니를 챙겨들었다.
꽃게해물탕과 갈비찜을 좋아하는 남편, 비위라도 맞춰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나른한 느낌을 애써 떨쳐내며 앞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 했으나 그런데 아무 생각도 안난다.
다만 어제 하루는 재수가 좋지않아(?) 개꿈을 꾸었다고 애써 자위를 해본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자 마트를 향해 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어? 103동 이쁜이 색시..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소고기 좀 주세요..갈비로..]
주인아저씨가 고기를 꺼내 절단하여 적당히 기름덩이를 제거해 낸다.
[색시..는 그거 알아요?]
[네에? 뭐요? ]
함께 가게에 나와있던 고깃집 여자가 뜬금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가 밤에 일을 잘 하면.. 다음 날 아침 밥상에 갈비를 해주고,
시원챦으면 김치 하나에 라면을 끓여주는 여자들이 많다는..호호!! ]
[네에...?]
[명희 아빠도 갈비먹고 싶으면.. 잘 해요! ]
[글쎄...흐흐!! 난 라면이 좋아.. ]
내심 뜨끔했지만..여자가 주인아저씨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세상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의 내 일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배우자에 대하여 모두 한두 가지 고민거리는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앞으로는 자주..갈비사러 와야겠네요..]
그렇게 인삿말을 남기고는 해물거리를 파는 가게로 걸음을 옮겨갔다.
대충 집안 정리를 마치고 주방에서 부산을 떨고나니 얼추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다.
목에 둘렀던 앞치마를 걷어내며 잠시 고민에 빠진 나,
문득 언젠가 남편이 선물이라고 사다주었던 원피스가 생각났다.
"새삼스럽게.. 그 옷은 왜...?"
노출이 너무 심해서..외출용으로는 입을 수도 없는 그 원피스는,
길이도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짧은 디자인이라,
가정주부가 입기에는 좀 꺼려지는 그런 옷이었다.
"갑자기 변신을 하면..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남편이 사다 주었을 때는 내가 입기를 바라고 선물했을 테니까..
그래..모처럼 애교도 좀 부릴려면..그래서 큰 맘먹고 그 옷으로 갈아 입기로 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와 조금 짙게 화장을 마치고 거울을 쳐다본다.
"훗! 그 남자가...나를 아가씨로 착각한 게..."
거울속에는 20 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또 다른 나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역시.. 나도 꾸미니까.. 쓸만해..."
나는 그렇게 스스로 만족하며 다시 몸 전체를 거울에 비쳐보았다.
아직 탄력을 잃지 않은 탐스러운 젖무덤과 팽팽한 엉덩이가 돋보인다.
서랍을 열어 팬티를 고르던 내 손이 민망한 속옷을 집어들었다.
남편이 조르는 바람에 딱! 한 번 입어봤던 야한 속옷이다.
밴드 부분과 엉덩이골짜기를 채 반도 가리지 못하는 천을 제외하고는,
사타구니 그 부분을 망사로 가려주는 야시시한 팬티..
언젠가 남편이 선물로 사다 주었던 망사 팬티를 꺼내 들었다.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는 아직도 불을 꺼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은 나.
근데 그런 야한 속옷을 챙겨 입으면서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
하지만 내게도 숨은 본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팬티를 입고 나서 브래지어를 집어 들다가는 그만두었다.
원피스의 가슴 안쪽으로 얇은 캡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거울에 비춰 본 나의 모습은 너무나 도발적이다.
망사로 된 팬티 앞쪽으로 붕긋하게 솟아오른 둔덕과 거뭇한 실이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이..이런 모습을..그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야릇한 상상까지 하던 나는 서둘러 원피스를 몸에 걸쳤다.
거울앞에서 살짝 몸을 돌리면서 허리를 약간 숙이자..팬티가 보일락말락한다.
"아~ 너무 아슬아슬해..!! "
아무리 남편앞이지만 너무 천박하게 보일 것같아,
행동을 조심해야 겠다고 생각하는데..현관 벨이 딩동~~울린다.
남편이었다.
출장갔던 일이 힘들었던 듯 조금은 피로한 기색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던 남편,
이내 야시시한 내 모습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윽! 누..누구세여?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호호..오빠두 참.. 이틀 사이에..그래..자기 아내 얼굴도 몰라봐요?]
서류가방을 바닥에 내팽게치고는 나를 덥썩 안으려는 남편,
나는 까르르 웃으며 살짝 몸을 빼낸다.
[샤워부터 하세요..오빠 좋아하는 갈비랑..꽃게해물..읍..흐읍..쬭!! ]
남편은 헐헐거리며 내 입술에 도장을 찍은 후에야 욕실로 향했다.
입술가에 번들번들 기름을 묻혀가며 정말 맛있게 갈비를 뜯는 남편,
나는 그런 남편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수저를 놀리는 것도 잠시 잊었다.
저렇게 착하고 순진한 남편을 배신하고..내가..
[어? 이쁜이..무슨 생각해...전화 안 받어..?]
[네? 아..네..당신 먹는 모습이 너무....]
[촌스럽게..남편 음식먹는 모습이 뭐 보기좋다고..얼른 전화나 받어요..]
[이 시간에..내게 올 전화 없는데...]
[무슨.. 고민있어..? 아까랑..다르게..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네...?]
[아, 아네요..고민은 무슨..민주가 갑자기..시골갈 일이 생겼다고 해서..우리 차를..]
[오라..그래서 그랬구나..들어오면서 보니까..차가 안보이길래 이상타 했는데...]
[사나흘 쯤 걸릴 것 같아요..오빠 불편할텐데..]
[이런..쯧쯧, 자동차랑 여자는 내 돌리는 법이 아닌데..
하지만 어쩌겠어..민주씨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구..
걱정마..내일 모레가 토 일요일이니..월요일만 택시타면 되겠다]
그렇게 남편과 대화를 나누면서 전화기가 놓여있는 거실 탁자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나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다행이랄까..남편은 더 이상 꼬치꼬치 캐 묻지는 않았지만..
[여보세요...은애씨..! 서준입니다..]
약간 저음의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폴더를 열고 폰을 귀에 대자마자 들려왔다.
[네에? 잘못 거셨어요]
나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주방 식탁쪽으로 천천히 되돌아왔다.
[누구야..? ]
[잘못 걸려 온 전화에요..왠 미친..]
[꽃게해물탕에 가볍게 술 한 잔 할까..그리고 오늘밤엔 모처럼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그, 그래요..양주 꺼내올까요?]
[아니지..뭐니뭐니 해도 이런 안주엔 소주가 최고야..]
"서준..? 서준..이 누구...아~ 어제...그 빤쭈 차주인..."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는 동안에도 머리속에서 뱅뱅 돌아다니는 낯선 남자의 전화.
아직도 그 남자의 명함은 구겨진 채 핸드백속 어딘가에 숨어있을텐데..
"아가씨..아가씨...! 골프를 다녀 오시나 보네요.."
중저음의 믿음직한 그 남자 목소리와 서준이라는 이름이 그제사 매칭이 된다.
"어떻해..남의 차를 받아놓고..걸려 온 전화까지 끊어버렸으니..
이 남자 속이 얼마나 상할까..몰라...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연락처를 가르쳐주기 위해 핸폰으로 전번을 찍어준 것은 기억이 나는데..
운전면허증을 보여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
그만큼 어제는 내가 경황이 없었다는 증거였다.
[저어..여보! ]
[캬아~ 응..왜?]
소주 한 잔을 단숨에 털어넣은 남편은 그 맛난 캬~ 소리를 내뱉으며 가자미눈을 뜬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아있는 의자쪽으로 다가왔다.
[민주.. 우리 차 끌고가서 별 일 없는지.. 전화좀 하고 올께요]
[밥먹고 천천히 하지 뭐..초보도 아닌데.. 별일이야 있을라구..응..이쁜아! ]
여태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입고 있는 반바지 앞섶이 금새라도 뭔가 튀어 나올 듯 불룩하니 텐트를 치고있다.
[그래도..아이~그럼..나 잡아봐요..!.]
[크크..나, 나흘이나 굶은 거...알지..]
[급할 수록 돌아가라고 했어요...호호! 체하면 어떡해요..]
[어딜..도망가려구..]
여자의 가면속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나는 그렇게, 조마조마한 내 마음을 감추려고 난생 처음 애교섞인 장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서준 그 남자와의 통화는, 저녁 늦은 시간에 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내 입술로 디저트를 제공하고, 주방 설거지까지 마무리해야 했으니까..
* * * *
흐릿한 아침의 하늘자락 끝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몰려있다.
새벽 일찍부터 낚싯대와 도구들을 챙긴 남편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현관을 나선다.
[비가 올 것 같아요.. 뭐 빠뜨린 건 없어요?]
[으응, 잘 마셨어..]
내가 부랴부랴 준비해 준 녹즙을 마시고는 싱긋 웃음을 보여주는 남편,
신혼 시절이 지난지 언제인데 잊지않고 입맞춤을 해온다.
[어떡해요...짐 가방이랑.. 먼길에..차도 없이..]
[색시는 걱정안해도 돼..오메가 전자..민전무 차로 함께 갈거니까..
오늘 낚시도 사실은.. 민전무가 보채서 마지못해 가는 거야..]
고무장화를 챙겨신고 집을 나서는 남편을 따라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다.
[저..오늘 낮에.. 외출할지도 몰라요]
[그래, 종일 혼자서 집에 있으면 무료하쟎아, 친구도 만나고 쇼핑도 하고 그래..
어..때 마침 저기 오네..]
남편 옆구리에 팔을 두른 채 1층으로 내려오자,
아파트 단지 입구쪽에서 검은색의 에쿠 한 대가 마악 진입해 들어오고 있다.
함께 다가가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집안에서 입는 옷차림, 더군다나 슬리퍼를 신은 모습으로 그러기에는
아무래도 남편 체면에 문제가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중소기업체(성일정밀)의 사장이지만, 민전무란 사람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이다.
대형마트와 동네 구멍가게의 차이랄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집안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평소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부품 일체를 모기업이나 다름없는 오메가에 납품하고 있는,
남편과 그의 사이는 아마 모르긴 해도 종속관계 그 이상일 것이다.
원래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어제까지만 해도 근교에 등산을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저녁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새벽 일찍 낚시 가방을 챙겼으니..
차 드렁크에 짐을 실은 남편은 이쪽을 쳐다보며 손키스를 날려보낸다.
왠일일까..나 혼자만의 우려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남편의 모습이
잔뜩 찌푸린 흐린 하늘만큼이나 아련하게 내 눈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왔다.
불과 며칠 사이에 우리 부부의 사이를 무언가가 자꾸만 가로막는 듯한 불안한 느낌.
후우~~나즈막이 한숨을 내쉬던 나는,
남편이 탄 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간 뒤에야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 평 남짓한 공간..혼자 오두마니 서 있는 내 모습이 벽거울에 비친다.
숫자 14의 버튼을 누르려고 왼손을 내민 순간,
내 눈에 확! 띄어야 할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분명 무명지에 끼고는 있지만..자격을 상실한 반지의 주인을 나무라는 듯,
늘 반짝이던 돌알맹이는 하얗게 무채색으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같았다.
차량 추돌사고 처리 문제를 두고 오늘 낮에 서준 그 남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의외로 수리비용이 많이..나와서..."
나는 처음에 그 남자의 말을 전화를 통해 듣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수입외제차..그것도 출고한지 두 달밖에 되지않은 신형이지만..
400만원도 아니구...동그라미가 한 개 더 붙을 수가 있는 건지..
4,000만원?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벙어리가 되어버린 나는 말을 잃은 사람같이 벙쪄 있었다.
"일요일.. 오후 1시에...구정물역 3번 출구..."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띵해서 남자의 다음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카센타에 맡겨진 우리 차는 범퍼를 새 것으로 갈고 여기저기 손질을 다 해도,
200만원 남짓 견적이 나왔었는데, 겉보기에 별루 이상도 없던 차...수리비가 4천이라니..
" 대물보험 배상한도를 1억으로 올렸으면..."
하지만 그런 후회나 보험관련 문제는 지금의 내가 생각하고 있을 게제가 아니다.
남편에게 말을 할까도 고려했었지만, 차 사고가 거론되면 결국 마사지샵의..?
그리고 초보도 아닌 내가 그런 뚱단지같은 사고를 냈었다고 하면,
남편은 농담하냐고..웃어 넘길게 분명했다.
"어쩌지..우리 집을 아는 것도 아닌데...전번을 바꿔버릴까..?"
"사천..사천...그 큰 돈을 어디서 구하나..."
"이제라도 남편에게 .. 이실직고를 해야하나..안돼! 그건...절대! "
"근데..옷은 뭘 입고 나가지..?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빈티를 낸다는 것도 이상하고.."
마음이 안정되지않아 오전내내 이리저리 거실과 주방쪽을 왔다갔다 서성거리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나보다는 경험이 많은 민주에게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응..나야...은애..어디니...?]
"..저수지..."
[저수지라니...이 시간에 그런 곳엔 왜..? 누구랑..]
"후후, 일요일이라...남편따라 낚시왔다..여기 온월저수지"
그새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진 건가..
나만 만나면, 못살겠다느니 이혼이 어쩌니, 자기 남편 흠담을 아끼지 않았던 민주..는,
"은애는 자상하고 착한 신랑만나 호강한다"느니..
"능력있는 남자에게 늘 신혼처럼 사랑받는 기분이 어떻냐" 는 둥
은근히 질투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그런 말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근데..무슨 일 있어...목소리에 힘이 없네..."
[힘이 없긴...뭣 좀 물어보려구..부탁할 것도 있구...]
"오라...은애..너! 그날 마사지 샵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그치?]
[얘는..일은 무슨 일....그게 아니구 사실은...차 사고가 났었어...]
"차 사고라니..교통사고..? 기집애..그런 일을 왜 이제 말하는거야..어디 다친 데는 없어?"
[차라리 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휴우~]
"한숨만 쉬지 말구..말해 봐.. 사고가 크게 난거니..?"
[응..사실은.. 그날 마사지샵에서 나오다가.. 외제차를..것도 빤추를 받아버렸어...]
"아니 어떻하다가.. 골프는 못쳐도 운전은 잘하면서.."
[그..글쎄..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후~~]
"쯧쯧..조심하쟎고..더군다나 빤쭈라면 수리비용이 엄청 많이 나올텐데..견적이 얼마나..?"
[큰 거 넉장..]
"400 ? "
[아니.. 400 이면 내가 걱정도 안하지..동그라미 한 개 더 붙어..
전화상으로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그 사람 당분간 사용할 렌트카 대여비는 뺀 것인데도 그렇다나봐..민주야..! 나.. 어떻하면 좋니?]
"도리없쟎아...남편에게 말하구..보험처리 해야지...그래도 모자랄텐데.."
[그건 안돼...남편이 알게 되면...]
"은애..너.. 정말 ...무슨 일 있었구나...내게 못할 말이 어디 있다구...?
[일은 무슨..사고는 잠시 한눈 팔다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할 게 있고, 못할 말이 따로 있지..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소리..
"저수지...낚시터에 왠 노랫소리..? "
그제서야 퍼뜩 남편도 낚시를 떠났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상기된다.
[근데..음악소리가 들리네..민주야..]
"갑자기 차사고 얘기를 하다말고 뜬금없이..아! 이 소리..남편이 그러네..
감미로운 발라드 음악을 들으면 물고기들이 미끼를 잘 문데나 뭐래나.."
[으응, 그랬구나..그리고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남편이 전화하면..
그래..시골에 볼 일이 있어.. 우리 차를 빌려갔다고..응, 후우~~]
"은애야..우리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나, 매운탕 끓일 준비해야 돼"
[칫! 민주 너..요리는 잼병이쟎아..]
"매운탕 그까이꺼..뭐 있니..호호! 고추장 확 풀고 물고기넣어서 부글부글 끓이면 되는거지.."
상큼하게 내 귓결에 와 닿는 민주의 웃음소리,
내 가슴속은 가믐에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지만,
나는 애써 민주의 그 웃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남편은 원청회사 임원이랑 접대식으로 낚시를 갔는데..
공교롭게도 민주는 남편과 함께 부부 갈등의 화해를 위해 낚시를 나간 모양이다.
전화기를 닫으며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12시 30분이다.
민낯에 비비크림만 조금 바르고는 청치마에 꽃무늬가 프린터된 남방을 걸쳤다.
그리고 까페의 커피값은 내가 지불해야 할테니..3만 원만 작은 손지갑에 챙겨넣었다.
땅바닥만 뜷어져라 쳐다보면서 마악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경쾌한 클랙션 소리가 두 번이나 울려왔다.
그리고 스르르~ 엔진소리도 부드럽게 내 옆에 다가와 멈추는 승용차..
[은애씨...!]
[...........?!]
서준 그 남자다.
아니..우리 아파트를 어떻게 알고,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타났을까.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애인이라도 마중나온 행태다.
반쯤 내려진 창문안으로 보이는..반팔 셔츠에 캐쥬얼한 바지..차림의 남자.
바람에 날린 듯 머리칼이 살짝 이마를 가린 그의 얼굴은,
꿀꿀한 내 마음처럼 잔뜩 흐린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환한 미소를 그리고 있다.
"도둑넘..사기꾼..멍게...말미잘..양의 탈을 쓴..쓰레기.."
별로 큰 이상.. 없어 보인다고 그날 그랬으면서..엄청난 돈을 챙기려는 그에게
나는 내심으로 온갖 욕지기를 다 찾아 내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