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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말했다..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라고..
그것이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라면 진정한 삶을 넘어 생이 걸린 도박까지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검은색 병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김검이라는 놈이 내게 건넸다고 믿기 힘든 작은 병 안에서 출렁이는 액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걸 언제 써야할지도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는 저 작은 병에서 시선조차 때지 않고 난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든다.
이미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던 난 보영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웃는 얼굴과.. 슬픔에 빠진 얼굴..
내가 사준 보잘 것 없는 선물에 기뻐하는 얼굴과 흔한 분식에 감탄하던 얼굴....
자신의 여자에게 성감 마사지사를 붙여주는 민우놈의 행위와 자신의 마누라를 내게 맡겼던 김검사라는 놈을 이해해 보려던 내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울먹이던 얼굴까지...
어떤 표정이라도 보영이는 예뻤다...
보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어차피 끝낼 운명인데도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보고 싶은 이 충동을 억눌러야 하는 상황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게 된다.
[따르릉~~따르릉~~~]
“깜..짝이야..”
울리 리 없는 핸드폰의 갑작스러운 요란한 벨소리에 깜짝놀라게 된다.
“보영씨?”
[잤..어요?]
“아뇨. 그러는 보영씨는요? 이 시간까지 뭐하고..”
[또 존댓말...]
“...안자고 뭐해요?”
[배..고파요...]
“...네!??”
[갑자기.. 배가 고파요...]
“그래서 아까 그 비싼 스테이크 먹을 땐 왜??..... 속은 좀 괜찮아요?”
[...네.. 그런데 갑자기 배고파졌어요..]
“자요! 자면은 배고픈 것도 다 잊게 되요.”
[자다가.. 배고파서 일어났어요...]
“.....”
[저번에 먹었던... 떡볶이요.. 지금 안 팔겠죠?]
“당연하죠! 지금 새벽 1신데... 근처 편의점 가 봐요. 거기 즉석 떡볶이 팔 거예요.”
[.......]
“그것도 먹을 만해요.”
[그 떡볶이 먹고 싶다고요!]
“......”
[아니에요.. 괜히 억지스런... 며칠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이상해지나 봐요.. 주무세요.]
“...안 잘거예요?”
[..네?]
“기다려 봐요.. 그곳은 아니지만 떡볶이 타운 가보면 24시 하는 곳도 있을 거예요..”
[진짜요?]
“끊어요.. 택시타고 가볼게요.”
[...죄..송해요.]
“됐어요..”
시계를 올려다보며 난 한숨을 내쉬게 된다.
이 시간에 30분 거리인 먹자 타운까지 갈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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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앞인데.. 뵐 수 있을까요?”
[정문 앞에 있는 다방에서 30분 정도 기다리게..]
거의 밤을 꼬박 새고 출근을 한 난 외근이란 핑계로 회사가 아닌 김검이 있는 검찰청 앞에 서 있다.
저녁때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내가 어렵게 사온 떡볶이와 순대를 흡입하듯 먹는 보영의 모습에 기가 차 말도 못하고 있던 내게 반 이상을 비우고 나서야 멋쩍은 모습으로 포크를 건네던 보영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 하듯 질문을 하며 보영의 표정을 살피던 내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새벽 2시 20분이라는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음식 배달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 문 앞에서 벨을 누르며 멋쩍어 하는 표정을 짓는 날 헐렁한 반팔 메리아스만 입고 반기는 보영의 모습은...
“죄..송해요..”
반기며 사과부터 하는 보영의 모습에 피식 웃게 된다.
“됐어요. 그러니까 스테이크 좀 먹으라고 했잖아요.”
“아깐 속이 많이 안 좋았고요... 와~ 냄새 너무 좋다..”
“...이런 건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더니..”
“제가요?”
“...참나~”
날 반긴 게 아니라 떡볶이를 반겼다는 걸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낚아채는 보영의 모습으로 알게 된다.
정말 신이 났는지 낚아 챈 봉지를 들고 헐렁한 메리야스를 펄럭이며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보영의 뒷모습에 뭘 입어도 본바탕이 된다면 다 어울린다는 걸 느끼며 뒤 따라 거실로 들어갔었다.
“음~~~~.. 이것도 맛있네~”
“...그래? 다행이네..”
“아직도 문을 연 곳이 있어요?”
“24시간 하는 곳도 있어..”
“아~.. 으음~~”
“성욕하고 식욕이 동급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넌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먹을 때도 섹시하냐?”
“...?”
“그 감탄사.. 신음소리 말이야..”
“음~~... 이게 왜요?”
“.....”
“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던데!”
“....그래 내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인다.”
“크~.. 하여튼.. 음~~”
“.....”
“이건 뭐에요?”
“순대.. 순대를 몰라?”
“순대는.. 원래 검은색으로 된 거 아니에요?”
“아바이 순대 몰라?”
“아바이?”
“...먹어 봐. 생긴 건 그래도 그것도 맛있어.”
“진짜.. 생긴 건 좀 그러네..”
“그런데.. 그 반팔 나시는 뭐야?”
“네?”
“지금 입고 있는 거..”
“이거 필민씨 껀데.. 저번에 웨딩드레스에 딸려 왔었나 봐요. 세탁하는데 딸려 왔더라고요.”
“그게 내거야?”
“네.”
“....”
내 옷이라는 걸입고 있는 보영의 모습이 귀엽게 보일 줄은 몰랐다. 여자라서 그런 건지.. 꼭 원피스처럼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오뚝이처럼 무릎을 늘어난 내 메리아스 안에 집어넣고 신기한 듯 음식을 내려다보는 보영의 모습에 익숙해지듯 마음까지 편해진다. 편해질 수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포크로 쿡쿡 찔러보는 보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보영아..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
“민우란 놈하고 결혼을 안 한다면.. 나랑 같이 살 생각은 있니?”
“......”
“...나 같은 놈은 싫....”
“알잖아요.. 민우씨가 어떤 사람인지..”
“도망가면? 우리 도망이라도 갈까?”
“...어디로요?”
“친구 있는 부산도 있고.. 아예 멀리 제주도로 갈까?”
“만약에.. 해외로 도망을 간다고 해도 민우씨 손바닥 안 일거예요.. 아무리 먼 곳으로 간다고 해도.. 민우씨라면 어디든지 다 알아 낼 거예요..”
“아니야.. 지금까지도 나하고 보영씨와의 관계를 모르고 있잖아. 그리고 김검사란 놈이 도와준다면..”
“김검사라뇨?”
“저번에 너도 봤잖아. 김검사란 놈도 나쁜 놈이긴 하지만 우리 비밀을 지켜주고 있다고.. 물론...”
“.....”
“김검사란 놈을 잘 이용하면.. 어쩌면 말이야..”
혼자 열중에 열변을 토해내듯 얘길 하던 난 보영의 사색이 된 얼굴을 쳐다보곤 말을 끊게 된다.
민우 놈의 존재가 보영에게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에 대해 보영의 표정을 보며 새삼 느끼게 되어 우선 보영을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놀라지 말고.. 우선 진정해. 보영아. 김검사는 그래도 내 편처럼 민우 놈한테는..”
“김..검사가.. 또 뭐라고 했어요? 단지 비밀을 지켜 준다고.. 그런 말만 하진 않았죠?”
“...응?”
“...맞..죠?”
“.....”
“뭐에요? 김검사란 사람이.. 필민씨한테 뭘 원했어요?”
“내..가 아니라.. 너야...”
“...네?”
“널 안고 싶어 한다고...”
“......”
“사실.. 아까 말을 하려던 게..”
“절.. 안으면... 모든 걸 눈감아 준다고 했어요?”
“....”
“.........”
“왜.. 그래? 걱정 마.. 저번 마사지에서 느낀 거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차라리 너랑 완전히 헤어지면 졌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정말 민우씨가 모른데요? 김검사가 자신만 안다고 말을 해요?”
“응..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분명히..”
“필민씨 바보에요?”
“....뭐?”
“민우씨가 정말 모를 거 같아요?”
“알 리가 없잖아.. 만약 알고 있다면 날 가만히 뒀겠어? 저번에..널 귀찮게 했을 때 생각해봐.. 날 사회에서 아주 매장시키려고 작정한 것처럼 행동했던 놈인데...”
“그땐 제가 민우씨한테 언지를 했던 거고요...”
“....그거야.”
“김검사라는 사람.. 필민씨 친구를 불러냈을 때.... 그 자리에도 있던 사람이에요. 그때 이상한 농담을 하는 민우씨 옆에서 맞장구치며 더 저질스럽게 얘기 했던 사람이....그 사람이라고요.”
“사강이?”
“...네.. 그 분이요. 그때 말 했잖아요 사강씨란 분을 거기 여직원들하고 짝짓기를 시켜놓고 친구들이랑 웃었다고..”
“,,,,,,,”
“만..약.. 만약에 절 안게 해주면.. 정말로 필민씨를 보내준대요?”
“그게 지금 문제야!? 그럼.. 민우란 놈이 다 알고 있으면! 넌 어떻게 되는데!?”
“.....”
“혹시 보영씰...”
“아..닐 거예요.”
“..?”
“그 사람은.. 모든 걸 게임으로 알아요.. 게임처럼 모든 걸 조종하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언제든 리셋 시키려고 하죠.. 제 아빠도...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조종하고 있는걸요.”
“아..빠라뇨? 아버님이요?”
“정확히는 그 집안사람들이......제가.. 현실을 잊고 너무 오래 꿈을 꿨나 봐요. 필민씨하고 있다 보니.. 평범한 삶이란 걸 소원했던 제 꿈 때문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필민씨...”
“....네?”
“절... 사랑해요?”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사랑 하냐고요.”
“......”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 해준 적 없잖아요. 정식..으로...는...”
“...사랑해요.”
“...절 믿죠?”
“...”
“사랑하는 사람은..원래 믿어야 되는 거잖아요.”
“..믿어요.”
“저도.. 필민씨.... 사랑해요.”
“....”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에요..”
“...”
“김검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아니... 시키는 대로 해요.. 우리.”
“네?”
“사랑이란 것도.. 살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
“어차피 우리 만남의 끝이 정해졌다면..”
“그냥 김검사.. 민우 놈 놀이란 거에 놀아나자고요?”
“그럼.. 어떡해요? 민우씨란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이제 알겠잖아요.. 민우씨란 사람은..”
“보영씨를 사랑하잖아요. 그럼 저만 도망을 갈게요. 차라리 멀리 도망을 가면..”
“사랑이요?”
“저번에 회사에서..”
“민우씨는요.. 제가 겪어본 민우씨란 사람은요..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이 안 되면...”
“그럼 그 김검사라는 놈이 시키는 대로 보영씨한테 약을 먹이고 그 놈들한테 윤간을 당하는 걸 지켜만 보라고요?”
“...약이요?”
“그래요! 약이요!”
“차라리.. 잘 됐네요..”
“잘 돼요? 그게 지금 말이라고...”
보영의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게 된다.
“수면제를 먹으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 약이 수면제겠어요?”
“...네?”
“......”
내 생각이 맞다면 김검사라는 놈이 내게 전해준 건 분명 수면제가 아닐 것이다.
절대로 수면제는 아닌 게 분명했다. 만약 보영의 말대로 모든 것이 민우놈이 짜놓은 각본대로라면.. 그것이 보영의 의식을 완전히 잃게 만들어 아무것도 모르도록 재울 수면제일 리가 없었다...
“보영씨 차라리 우리 헤어져요.”
“....네?”
“김검사란 놈이 분명히 말했어요. 제가 모든 걸 포기하고 보영씨하고 헤어지면...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될거라고요.”
“...”
“보영씨가 민우란 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겠지만, 보영씨 말대로 우선 살아 있어야 다른 계획이란 것도 세울 수 있잖아요. 우선..”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 그 놈들한테 당하는 걸 저보고 보라고요!?”
“..필민씨.... 저한테 물어봤던.. 얘기 기억해요? 마사지사한테.. 당할 때 느꼈냐고.. 사실 느꼈어요. 필민씨가 그 자리에 정말 없었다면 참지 못하고 그 남자한테 몸을 맡겼을..”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
겁을 먹으면 존댓말을 하게 된다는 내 버릇을 보영이도..나도 인식하지 못하고 식어가는 떡볶이를 지켜만 보게 된다. 어느새 왕성했던 식욕도 떨어졌는지 보영이는 연신 휘젓기만 할 뿐 더 이상 입에 가져가질 않는다.
“휴~.. 미안하네. 좀 늦었지?”
“..아닙니다.”
“그래서?”
“...네?”
“검사가 한가한 직업 같나? 이렇게 찾아 온 이유라면 뻔 하니까. 언제 어디서 할 건지만 말을 하라고.”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여전히 미안한 표정 하나 없이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김검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난 앞에 앉은 김검사에게 약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보여주게 된다.
일순간 김검사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듯 애써 표정을 숨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뭐지?”
“검사님이 주신 약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이게 뭐하자는 짓이냐고 묻자나!”
“...보영씨랑 헤어질겁니다.”
“뭐?”
“분명히.. 저한테 말씀하셨죠.. 보영씨랑 헤어지면 김검사님도 눈 감아 주겠다고..”
“....”
“그래서 헤어지려고요.. 하늘에 맹세코..”
“장난치나...”
“....네?”
“먹을 거 다 먹고 맛 떨어지니까.. 나 몰라라 하겠다고?”
“아니요! 지금도 보영씨가 보고 싶고..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보영씨를..”
“.....우리랑 같이 공유하긴 싫으시다?”
“....네.”
“산파극 찍고 있네..”
‘드르르르르~~~’
김검사가 손끝으로 약병을 내게 밀어대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냥 하던 대로 하자고.. 자네는 결혼전까지 보영이란 여자와 즐기면 되는 거고.. 우린 덕분에 그 환상적인 보영씨를 맛보는 기회도 얻고.. 어때?”
“싫습니다.”
“....이 친구가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되나 본데..”
“검사님이야말로 한 입가지고 두 말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뭐!!!”
간댕이가 배 밖으로 튀어 나왔다는 말.. 지금 내가 그랬다..
“분명히 약속 했잖아요. 두가지중에 선택하라고 하셨고.. 그래서 선택 한 겁니다.”
“그렇지.. 약속이란 걸 했었지.”
“만약에.. 제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 보영씨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혀 깨물고 죽어버린다고..”
“.....”
“그럼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겠습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거지.... 그런데 아무리 약속이라도 나도 가장 친한 친구한테 언지라도 줘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 친구 성격상.. 그냥 넘어 갈 놈이..”
“어차피 다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닙니까?”
“.....?”
“보영씨하고 얘길 해보니까 민기란 분이 이 번 일을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번 마사지 때엔 맞느라 정신없어서 모르고 넘어갔는데.. 그때도 절 막는 타이밍이 좀 이상하더군요.. 꼭 일부러 늦게 막는...”
“....그래서?”
“...네?”
“민기 놈이 알고 있다고 치자고.. 그럼 자넬 그냥 놔둘 거 같나?”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시키는 대로 다 한다면.. 그냥 놔둘 겁니까?”
“...”
“어차피.. 이래저래 맞아 죽을 바에야 빨리 치고 도망가는 게 더 확률이 높지 않겠냐고요.”
“허~.”
“그래도.. 김검사님은 약속이란 걸 지키시는 분이라고 믿어서... 도망가기 전에 이렇게 직접 들렸습니다. 보영이라는 여자한테는 정말 손을 땔 테니..”
“......”
“한..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
“보영씨요.. 정말 앞으로도 무사한 거죠?”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같이 도망이라도 가게?”
“....네.”
“.....”
“무사 한 게...아닙니까?”
“네가 상관 할 일도 아니지만.. 그건 걱정마라. 아무리 민우 놈이라고 해도 보영씨한테는 함부로 하진 않을 테니까.. 또 모르지.. 보영씨가 반항이란 걸 하면..”
“그런데 왜...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죠?”
“.....”
“모자랄 것도 없는 분..이... 돈도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잖아요. 그 돈이면 영화배우나 탤런트 같은 여자들도 손쉽게 사서 즐길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미친 짓을... 보영씨를 사랑하기는 하는 겁니까?”
“킥킥~.. 사랑.. 좋지.. 사랑이라..”
“...”
“그런데 자네 진짜로 도망갈 건가?”
“...네.”
“보영씨를 사랑하는데도?”
“목숨이.. 사랑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고 어제 보영씨와 얘길 나누면서 깨달았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
[여보세요.]
보영의 번호를 찾아 누른 핸드폰을 스피커모드로 해놓고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저요.”
[지금 좀 바빠..]
“그동안 고마웠어요.”
[...네? 갑자기 무슨..]
“그동안 고마웠다고요. 덕분에 이번에 진급해서 중국 공장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중국이라뇨? 저 바빠요. 장난치지 말고...]
“그럼 결혼 축하해요. 잘 지내요...”
[피..필민씨!! 필...]
전화를 끊고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다시 보영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난 조용히 핸드폰 배터리를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하하하~.. 너무 뻔하지만.. 뭐 속아주기로 하지..”
“진심입니다.”
“알았다고.. 아주 간단한 이유야. 보영이란 여자는 일찌감치 민우 놈 어머님이 정해주신 와이프감이었고, 보영씨도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 민우 놈은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 그 친구만큼 변태기질이 다분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지.. 한 때는 마약에도 손을 대고 그것도 모질라서 여자친구를 뿅 가게 만들어서... 하여튼 내가 고생 좀 했을 만큼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놈이 그 놈이란 말이야.”
“...”
“그런 놈이 순종적이다 못해 바보 같은 보영이란 여자한테 만족을 하겠냐고.. 외모하고 몸매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데 무슨 소용이냔 말이지. 뭐~.. 처음엔 미모의 보영씨한테 나름 만족하기도 한 거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이것저것 시키는 재미에 정말 한동안만이지만 나름 즐긴 거 같기도 하지만..”
“..”
“그건 아마 보영씨도 느끼고 있었을 걸. 그러니 자네 같은 사람하고 소개팅이란 걸 했고, 넘어갔겠지.. 안 그래?”
“그럼..”
“골치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이야. 그 친구가 계획하고 다르게 갑자기 결혼을 진행한다고 하는 얘길 듣고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처음부터 내기하자는 말부터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는 거지...”
“내기요?”
“...됐고. 오늘 하루는 그래도 보영씨를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텐데.”
“..”
“걱정 말고.. 오늘 하루는 즐기라고. 어차피 민우 놈은 내일 저녁에나 만나기로 했으니까.”
“......”
“아~.. 그리고 이건...”
통장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은 김검사 놈이 내 표정을 힐끔 살핀다.
“어차피 약속은 약속이니까..”
“됐습니다.”
“받아두라고.. 도망가려면 필요할거야.”
“....김검..사님은 제 편 인겁니까?”
“편?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천하의 민우놈이지만 나도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병원 문제까지 겹쳐서 골치 아파 죽겠는데.. 나랑 접촉한 사실이 뻔한 사람의 살인사건까지 하나 터지면 내 입장이 어떻겠나... 그러니까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어울리지 않게 내 어깨를 두드리곤 김검사가 나가버렸다.
김검사가 놔두고 간 투명한 비닐 케이스에 담긴 통장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보영의 말대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게 되어 그동안 겁 모르고 나댔던 내 모든 행위가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진다.
더불어 보영이가 더 불쌍하게 느껴진다.
꺼내 놨던 배터리를 다시 끼워 넣고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다.
부재중 전화 11통....
[필민씨!!]
“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방금 김검사하고 만났어요.”
[네? 김검사요?]
“....네.”
[........]
“더 이상 안 만나다니까.. 돈까지 주네요.”
[...]
“몇 시에 끝나요?”
[지금 나갈게요. 어디에요?]
“1시간 안에 갈게요.”
“이렇게 땡땡이 쳐도 되요?”
“네! 그것보다.. 김검사님이 뭐래요?”
“....”
“...왜...요? 뭐 묻었어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를 뒤로 묶어 올백으로 넘긴 보영의 처음 보는 모습은 동그란 이마가 이렇게 귀엽게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예뻐서요..”
“......”
“잠깐 나온 거예요? 아니면...”
“김검사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알았데요.”
“...네?”
“도망갈 필요도 없다고.. 다 잊어준다고 했어요. 괜히 파견신청 했나봐요.하하.....하..”
“민..우씨는요?”
“그건 정말 몰랐나 보던데요.”
“...거짓말.”
“아니에요! 김검사 놈이.. 정말로 보영씨를 한 번 안고 싶어서 일부러 모른 채 한거 같더라고요. 하긴 보영씨 알몸을 봤으니..”
“농담하지 말고요! 거짓말도 하지 말..”
“진짜에요. 민우 놈이 알았으면 절 가만히 놔뒀겠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말했듯이.. 김검사 놈만 우리 사이를 눈치 챘더라고요.. 그것도 제 뒷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 같더라고요.”
“필민씨 뒷조사를.. 왜 해요?”
“....”
“거짓말은 그만하고 사실을 말해줘요. 언제.... 언제 약을 먹이래요?”
“사실... 김검사 놈 와이프한테도 마사지를 했었거든요.”
“.....뭐라고요?”
“비..밀로 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절 도와주는 거니까..”
“언제요?”
“...네?”
“언제.. 그 여자한테 마사지란 걸.. 해줬어요? 마사지..만 해준 거예요?”
“설마요... 하하하하하..하......하..”
“....”
“우리 다른 얘기해요..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
보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김검사와 같이 있었을 때의 통화 내용으로 똑똑한 보영이는 이미 대충의 눈치를 챈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좀 이르지만.. 밥 먹을래요?”
“...왜 다시 존댓말 해요?”
“....네?”
“...마지막이라서?”
“....”
“반말로.. 대해주면 안 돼요? 진짜 마지막..같잖아요.”
“....”
고개 숙인 보영의 말끝에 눈물이 물들어 있었다.
그런 보영을 쳐다보던 난 나까지 먹먹해짐을 느끼며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게 된다.
생각에 생각을 해봐도.. 난 보영과 이루어질 수 없었다.
단순히 불륜이라는 도리에서 어긋난 행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민우란 새끼가 아무리 보영을 놀이의 대상으로,, 내기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해도.. 보영을 버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강조한 김검사의 말대로 놈의 계획대로 결혼을 할 것이고, 그 화려한 모습까지도 스포트라이트란 나와는 동질적일 수 없는 환경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아 갈 것이다.
난.... 내 목숨하나 부지한 것에도 감사를 하며 운 좋게 빛에 달려들었다가 살아남은 불나방과도 같은 벌레목숨을 영위하며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일 것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보영이를 바라만 보게 된다.
“흐읍...떡볶이 먹으러 갈래요?”
“...네?”
“떡볶이...”
“마지막인데 무슨 떡볶이를 먹어요..”
“마지막이란 말.. 하지 말고... 평범한 연인처럼 우리 떡볶이에.. 순대 먹으러 가요.”
그렁그렁했을 눈물을 숨겨 닦고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보영의 모습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 떡볶이 말고.. 술 먹으러가요.”
“술이요?”
“시~~~원한 맥주로.. 아니. 짠~~한 소주 어때!”
“벌써요? 아직.. 5시도 안 됐는데?”
“뭐 어때요.. 아니.. 어때...”
“가요. 그럼!”
“멀리 갈까? 이왕이면 인천?”
“인천이요?”
“아.. 회사 차를 안 가져 왔다.”
“...차는 저도 있는데.”
“아! 맞네! 좋은 차!”
“...”
“가자!”
수요일 늦은 오후인데도 차가 많이 막혔다.
덜 막힌다는 강변도로를 경유해 성산대교로 빠졌는데도 인천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가 가까워졌다.
차안에서 3시간이나 아까운 시간을 소비한 나였지만.. 결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별 대화 없이도 수 만 가지 얘길 나눈 듯 한 침묵은 간간히 마주한 보영과의 시선에 교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오히려 이런 침묵이 어떤 백마디 말보다 서로의 마음을 더 보듬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벌써 어둑해진 부둣가에서 잠시 차를 세워 비릿한 바닷바람을 맞아본다.
“와~.. 소리가 너무 좋아요.”
“소리?”
“바닷물이 부딪히는 소리요. 그러고 보니 인천엔 몇 번 안 와봤어요.. 저.”
“그래?”
“네.. 여기 올 일이 없죠.. 해외를 가더라도 비행기를 타니.. 같은 인천이라도 공항하고는 거리가 머잖아요.”
“내려가 볼까요?”
“..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저쪽에서 부두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던 거 같던데..”
“가봐요.”
“네.
싸늘한 바람에도 보영은 추위보다 상쾌함을 느끼는 듯 보였다.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먼저 걸어가는 보영의 뒷 모습을 보며 또 다시 잡생각을 하게 된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들을 보며 저 배를 타고 차라리 도망이라도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과도 같은 생각을 하며 점점 멀어지는 보영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쫓게 된다.
또다시 말이 없어진 우리였다.
“꽃 같네..”
케이크처럼 층을 이뤄 나온 회를 보며 보영이 또 감탄을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영을 감탄하게 했던 작은 사건들은 이 비려한 큰 물건과 음식들뿐이었다. 하긴 내 주제에 무슨..
“그런데.. 이렇게 숙성시키지 않고 곧바로 잡은 건 간흡층증이나 긴촌층 같은 거 걸리면...”
“그런 거 걱정하면 아무것도 못 먹어. 우선 이렇게 초장에다가 된장 풀고,, 겨자를...”
“....”
“자! 이거 먹어 봐.”
“...손.. 씻었어요?”
“...잔말 말고 먹어라!”
“....웁!”
억지로 보영의 입속에 쌈을 밀어 넣었다.
못마땅한 표정도 잠시 점점 오물거리며 씹는 보영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된다.
“큭크크~. 하여튼 말 많아. 어때? 쥑이지!?”
“음.. 괜찮아요.”
“괜찮기만 하나? 진짜 꿀 맛이지!”
“...아까 부두에서 무슨 생각 했어요?”
“...그냥. 저 배들을 타면 우리 두 사람 멀리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해서..”
“저도요! 아까 그 불빛들 보면서 똑같은 생각했었어요.”
“.......”
나와 보영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창밖에 그려진 작은 불빛들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소주를 혼자 2병이나 비웠지만 알코올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한 채 난 보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런 내 시선을 피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만보고 있는 보영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나였다.
“왜 안 드세요?”
“..응?... 배불러..”
“배부르긴.. 한 점도 안 먹었으면서...”
“그런 넌 왜 안 먹냐?”
“속 안 좋아요...”
“또?”
“......”
“병원에 가 봐..”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졌나봐요. 더부룩하기도 하고..”
“그런것도 있었어?”
“전 사람 아닌가.. 탈모도 있어요.”
“탈모?”
“...요기!”
갑자기 정수리를 들이밀며 머리카락을 헤치는 보영의 행동에 아주 잠깐 등을 의자에 기댔다가 앞으로 다가가게 된다.
숱 많은 머리카락들을 보영이 손가락으로 벌리자 아주 작은 땜빵과도 같은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허~..”
“오늘 아침에 발견했는데.. 얼마나 속상하던지.....”
“영구같..다.”
“뭐라고요!!”
“큭큭~..”
자세를 고쳐 잡으며 보영이 날 노려본다.
“그래도 좀 먹어 봐.. 싱싱하고 맛있네.”
일부러 한 점 집어 입에 물고는 보영에게 보란 듯이 크게 씹어대며 말을 한다.
“네.. 맛있던데요.”
“...”
“전 많이 먹었어요.”
두 세 젓가락질을 끝으로 보영은 끝내 더 이상 먹질 않는다. 아니.. 못했다.
아무리 밝아 보이려 노력해도 마지막이란 단어를 씻어내지 못한 우리는 결국 나온 음식들을 거의 그대로 남겨둔 채 보영의 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게 되었다.
이렇게 끝을 내기엔 너무도 억울하다는.. 너무나 안타깝다는 생각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웁!....”
“....”
“아... 도저히 안 되겠어요.”
경인 고속도라가 거의 끝나는 지점의 갓길에 갑자기 차를 세운 보영이 서둘러 차에서 내려 벽을 짚고는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허리를 숙여 사이드 미러로 차들의 유무를 확인한 나도 재빨리 차에서 내려 괴로워하고 있는 보영에게 뛰어갔다.
내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려 거의 도착했을 무렵 보영이가 갑자기 손바닥을 펴 보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날 저지한다.
“우욱... 더..더러워요..”
“더럽긴...”
난 보영의 행동에도 바짝 붙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맑은 물줄기만을 토해내는 보영의 모습에 전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물이 되어버릴 오바이트를 봤다고 해도 전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후~~~..”
“정말 괜찮아?”
“...속이 상했나... 먹지도 않았는데 얹혔나 봐..”
“내가.. 운전 할까?”
“...술 먹었잖아요.”
“뭐.. 어때. 사고 나면 사고 나나 보다.. 하는 거지..”
“크~..”
“내가 운전할게.”
“그래 줄래요?”
“응. 가자.”
“필민씨..”
“...?”
알코올의 기운은 전혀 없었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보영의 작은 목소리가 꿈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작은 목소리에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한참동안 쳐다보게 된다. 운전 중인데도 취기가 느껴져 한 무모한 행동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전 어떤 여자 같아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질문이냐?”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한테 빠진 더러운 여자 같죠? 사리분별 할 줄 아는 성인인대도.. 꼭 꿈같은 짓만 하는..”
“그럼 난 제비냐?”
“....네?”
“그렇잖아.. 네가 바람피는 더러운 여자라면... 대놓고 꼬신 난? 제비잖아. 카바레에서 여자 꼬시는 제비.”
“풋~큭큭~~.. 필민씨 같이 생긴 제비도 있나?”
“뭘 모르는구나.. 요즘 제비는 얼굴로 먹고 사는 게 아니야.”
“그럼요”
“아랫도리로 먹고 살지!”
“네!?? 아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도 인정하네!.. 내가 이렇게 생겼어도 아래는 끝내주잖아!”
“하긴....”
“워~~.. 너무 쉽게 인정한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강간한 상대를 좋아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나 빠졌으니.. 아!~ 그러고 보면 필민씨는 리마 증후군이네.. 내가 인질범이니까!”
“스톡홀름은 들어봐서 알겠는데.. 리마는 뭐야?”
“아닌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니까.. 리마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뭔 소리야?”
“하하.. 진짜 무식해!”
“야!!”
“그게 매력이에요.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얼굴에 다 드러나는..”
“....그럼? 그... 민우 놈은? 무슨 증후군이냐?”
“.....”
“유식한 너라면 다 알거 아니야.”
지금 순간 가장 떠올리기 싫을거라는 걸 알면서도 실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보영의 시선에 비춰지는 민우란 남자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에 덧붙이며 질문을 하게 된다.
“음~... 오델로 증후군?...아니다.. 그건 정말로 사랑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거니까..... 배덕 증후군?”
“.....배덕?”
“죄책감이란 게 없는 사람 같아요.. 민우란 남자는..”
“...”
“큰일을 하는 사람은 그래야 된다고 자기 입으로도 그랬고요.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거라나.. 하긴.. 사이코패스하고 지도자는 한 끗 차이라는 말까지 했으니...”
“뭐? 그 새끼가?”
“네! 그 새끼가요! 큭큭..하하하하하하하하”
“허~.. 그런데 그런 놈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큭큭~.. 어쩔 수 없잖아요.”
씁쓸한 웃음이란 걸 보여주며 보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머리받이에 기댄다.
“자기를 희생해서.. 그런 건 없냐? 자기를 학대하고 막 그런 거?”
“martyr syndrome?”
“말..뭐??”
“순교자 증후군이요?”
“그게 그런 거야?”
“비슷해요. 순교자로 자길 여기면서 병적으로 자신을 학대까지 하는..”
“넌 그런 거 아니야? 크크~”
“음~.. 그런가? 하지만 난 부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그럼?”
“오히려 콩쥐팥쥐 신드롬이 아닐까요?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삶속에서도 왕자님이 나타나서 날 구해줄거라는..”
“그런것도 있어?”
“증후군이란 게 별거 있나요? 갔다 붙이면 되는 거지.”
“큭큭~..”
“동화..속 얘기죠... 이루어질 수 없는...”
“........”
“아~.. 나 증말 이상하네.. 시원하게 토하고 났더니.. 또 배고파졌어요..”
“....배고프다고 해놓고는 또 안 먹을 거면서..”
“그러내요..”
누구에게 대답하는지 알 수 없는 보영의 시선을 느끼며 난 간선도로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아 고개들 돌리게 된다.
내 마음과는 달리 차는 막힘없이 도로를 잘 달리고 있었기에 얼마 가지 않아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핸들을 막 꺾으려던 내게 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요.”
“배고프다며..”
“생각 없어졌어요.”
“...참나.”
“필민씨도.....”
“..뭐?”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결혼해서 평범한 아이를 낳고.. 그냥 살아가겠죠?”
“.........”
보영의 물음에 답을 못한다.
먹먹해지는 가슴만큼이나 입술이 무거워졌다.
“아~.. 피곤하다..”
“...”
“얼마나 남았어요?”
“....십오분..”
“저..좀 잘래요.”
“.....응.”
“필민씨...”
“...”
“꼭... 잘 살아요...”
“....”
“절.. 잊지는 말고요. 잊으면 저주할 거예요!”
“저주..해.”
“치~... 끝까지.. 진짜 몸이 무거워서 안 되겠어요.. 제대로 체했나봐.. 먼저 들어갈게요.”
그녀의 차에서 내린 후 나눈 대화가 이것이 전부였다.
마지막이라며 그녀를 안을까라는 저질스러운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이겠지만.. 보영의 작별인사에 도저히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멀뚱히 서 있는 날 남겨두고 서둘러 들어간 보영의 향기를 마지막으로 음미하 듯 잠시 동안 서 있던 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대로 큰 도로가로 걸어 나가게 된다.
50분 같은 5분 동안의 시간을 보내며 몇 번이나 뒤돌아갈까를 고민하게 되지만.. 이것이 나와 보영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거리를 걸어 나갔고, 큰 도로에 도착했었다.
내가 서 있는 도로가에 손도 흔들지 않았는데 택시가 와 정차한다.
“어디로 모실까요?”
“..시내요. 아무 술집이나 가주세요.”
“....네.”
뒷좌석에 올라 멍하니 창문을 쳐다본다. 본능적으로 보영의 집을 향한 시선이란 것도 모른 채 멀뚱히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내게 오지랖 넓은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안전벨트 메세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걸리면 벌금 물어요.”
“뒷좌석인데요..”
“그래도 메셔야 제가 안 걸려요.”
“...”
기사와 싸울 기력도 없었다. 우울한 기분을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싫어 기사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순순히 듣게 된다.
“표정이 심각하시네..”
“저기... 지금 제 기분이 엿..같거든요.”
“아..하하... 네.”
“.....”
번화가의 중심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 택시가 갑자기 편의점 앞에서 말도 없이 멈춰 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룸미러 안에 비춰진 기사의 눈을 뻔히 쳐다보던 내게 기사가 어이없는 말로 변명을 한다.
“하하..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편의점에서 두통약좀 사와도 될까요?”
“...”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하하...”
“....그러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사가 황급히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기가 찼다. 무슨 저런 기사가 있냐..라는 생각을 하며 역시 안 될 놈은 끝까지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미터기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돈이 얼마나 올라가는 질 확인해 내릴 때 과감하게 안 내야지.. 라는 찌질한 생각을 하며 미터기에 시선을 돌린다.
미터기가 돌아가고 있지 않는다.
‘콰!!!!!앙!!!!!!!!!!!!!!!!!!’
‘끼익~.. 쿠우웅!!’
엄청난 충격에 몸이 휘청하며 머리가 크게 흔들리게 된다.
보통의 교통사고라면 브레이크의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린 후 충격음이 들려왔을 테지만.. 먼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충격음이 들려왔다.
뒤꽁무니가 인도까지 침범한 상태의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게 된 나였다.
기억이 없다. 아니.. 끊기며 어지러웠다.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잠깐씩 비춰지며 본능적으로 날 조여매고 있는 안전벨트를 안간힘을 쓰며 풀게 된다.
웅성거리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뒷문을 열어 날 살핀다.
뭐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는 질 모르겠다.
“괜찮아요!!! 여보세요!!”
“으윽....”
“정신 차리세요.”
“...”
택시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에 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택시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1.5톤 트럭이 후미를 들이받아 인도까지 올라온 택시를 발견하곤 내 몸을 살펴보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에 어디가 아픈지조차 모르겠다.
“괘..괜찮으..세요?”
“운전을 어떻게 하길래 이런 사고를 냅니까!”
“죄..죄송합니다. 잠깐 졸...”
트럭의 운전자로 보이던 남자가 질타를 하는 어떤 남자에게 변명을 하다 말고 말을 멈춘다.
졸음운전이 분명했다.
“소..손님!! 아이고!! 내 택시 어쩔겨!!!”
“죄..죄송합니다....”
“누가 좀 신고라도 해봐요!”
내가 어떻게 구급차에 오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병원 응급실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상한 기계 속에 날 집어넣고 뭔가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낯설지 않은 한 남자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와 내 상태를 살피는 그 낯설지 않은 남자의 뒤에서 역시나 너무도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었냐?”
몸과 목에 느껴지는 고통에서 오는 소름이 아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난 잠시 감은 눈동자를 움찔거리며 온몸에 소름이 돋게 된다.
“안전벨트 덕분에 별 이상은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정밀 검사를 해야..”
“그럼 됐다.”
“김 검은?”
“그 새끼는 왜?”
“....그래도 교통사고잖아.”
“그래서?”
“...아니다. 다른 사람 눈에 띄기 전에 그만 나가라. 그나저나 네토플레인지 뭔지 하다가 사람 잡겠네..”
“뭐라고!!?"
"아..아니야.. 성질머리 하곤.. "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야! 빨리 나와!”
“쓰레기 같은 새끼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