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43화. (44/46)



〈 44화 〉43화.

“엄마. 왔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래. 그리고 아주머니가 뭐니? 지난번에 어머니라고 부르라 했잖아.”
“네, 네. 어머니.”

마주 안아오는 임여사님을 마주 안았다.

“자다 일어났니?”

급하게 나와 흐트러진 모습인 우리를 보던 여사님이 잔뜩 사 온 짐들을 영철이에게 떠넘기며 말했다.

“뭐, 요즘 네 아빠 말 들어보니 열심히 일 하는 것 같아 따로 잔소리는 안 할게.”
“하하. 사랑합니다. 어머니.”

주말이라도 늦게까지 늘어져 있으면 잔소리에 잔소리를 하시는 여사님인지라 점심이 지나 저녁이 다 되도록 게으름 피운 것처럼 보이게 된 영철이는 멋쩍은 웃음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뭘 이리 사왔어요?”
“너 생일도 못 챙겨주고 지나가서 늦게라도 챙겨주려고.”
“에이. 다 컸는데 챙겨서 뭐 한다고. 그래도 얘가  챙겨줬어. 아무튼 고마워.”

케이크와 여러 가지 찬거리들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나와 같이 정리하며 웃어 보이는 영철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사님이 대뜸 말했다.

“선물이라도 챙겨 줬어?”

어…그걸 선물이라고할 수 있을까?
지난 번 녀석의 생일선물 대신 받고 싶다며 했던 야외노출 섹스를 문뜩 떠올렸다가 황급히 지웠다.

“어.”
“그래? 뭐?”
“그냥. 뭐 물질적인 건 아니고.”

녀석도 딱히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대충 얼버무렸다.

“물질적인 게 아니라면…어머. 혹시 아이…….”
“쿨럭.”
“엄마!”

어머님. 그렇게 갑자기 공격을 하시면…….

“귀 따가워라. 뭘 그리 소리를 질러?”
“너무 김칫국 마시니까 그러지.”

모자지간의 정겨운(?) 대화에 나는 빠져야겠다는 생각에 정리를 마치고 슬그머니 부엌에서 나와욕실로 들어갔다.

“후. 들키느라 혼나는 줄 알았네.”

급하게 입었던 헐렁한 트레이닝바지를 벗었더니 고간에 끈적한 영철이의 흔적들이 묻어나왔다.
벨소리에 놀라 뒤처리도 못하고 급하게 나온 흔적에 얼굴을 붉히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뜨뜻한 물이 몸에 닿는 기분 좋은 감각을 만끽하며 깨끗이 몸을 씻고 나오니영철이가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 씻었어?”
“어. 너도 씻어.”
“오냐.”

훌렁훌렁 벗고 들어간 영철이의 잔해를 주워 내가 벗은 옷과 같이 세탁기에 넣고 방을 나오니 여사님이 음식준비에 한창이었다.

“도와 드릴게요.”
“그래? 너 생선 손질  줄 아니?”
“어떻게요?”
“그냥 살만 발라내면 돼.”
“그 정도는 할  있어요.”

회는  쳐봤지만 생선 살 바르는 정도야 문제없었기에 흔쾌히 답했다.

“이거 도미밥 만들 건데 살이랑 뼈 좀 발라서 여기에 따로 담아줘.”
“네.”

여사님의 부탁에 붉은 참돔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슥슥. 별 어려움 없이 손질을 하고 있으니 여사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하네. 저번에도 그랬지만 내가 밥 잘  다니냐고 하면 영철이가 맨날   맛있다고 칭찬 하면서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되려 나나 잘 챙기라더라.”
“아하하.”
“아무튼 네가 잘 챙겨준다니까 한시름 놨어.”
“뭐, 제가 영철이보다 시간이 많으니까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죠. 얹혀사는 처지기도 하고요.”
“얹혀사는 거라니. 그런  말아. 너랑 사귀기 전에는 맨날 밖에서 사 먹고 배달만 시켜먹더니 이제 매일 집밥 먹는다고 좋아하는 거 봤을  얼마나 마음이 편하던지. 말 들어보니까 청소에 빨래도 네가 대부분 한다고 그러더라. 그 정도면 얹혀사는 게 아니라 먹여 살리는 거지.”

끊임없이 찬거리를 손질하며 칭찬을 하는 여사님에게 그저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따가 저녁에 바깥양반도 오는데 괜찮지?”
“네? 아. 네.”

영철이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따스한 햇살 같은 여사님과는 달리 얼음 같은 영철이의 아버지인 양정훈 회장님은 나에게도 아주 고마운 분이다.
아니, 애초에 영철이네 가족 전체가 내겐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것도 영철이네 가족 덕분이나 마찬가지니까.
가만히 계시면 꽤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고마움과는 별개로 좀 어려운 면은 있었다.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꽤 다정하신 분이라 눈만 마주쳐도 냉기를 풀풀 날리는 영철이네 친가와 비교하면 햇살 같은 분.
윽. 잠시 과거의 영철이네 친가와 마주쳤던 기억이…….
어쨌든 오늘 저녁에 오신다 하니 조금 긴장은 됐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 뵙는 거지만 내가 알고 있는 회장님이라면 나와 영철이가 사귀는 것을 딱히 반대하지 않으실 테니…아니, 난 이런 걸  걱정하지?

“긴장되니?”
“네? 아, 아뇨.”

은근하게 물어오는 여사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더니 스리슬쩍 영철이가 뒤에서 허리를 안아왔다.

“으악!”
“엄마. 아영이 괴롭히는 거 아니지?”

칼질하고 있는데 위험하게 들러붙은 녀석의 하반신을 엉덩이로 강하게 밀쳤다.

“야! 위험…!”
“쯧쯧. 아영아 못난 아들이라 미안해. 더 화내도 돼.”
“아, 아니에요.”

여사님이 계신 것도 망각하고 화를 내려다가 눈치를 보는 내게 오히려  혼내라고 부추기셨다.

“미안.”

고간을 잡고 비틀대며 물러서는 놈의 모습이 꼬셨다.

“아영아. 그래도 남편 될 사람 거기는 소중히 해야 돼.”
“어, 어머니.”
“알았지?”

놈과 나의 결혼을 기정사실화 시키는 여사님에게 난감한미소를 비추자 눈웃음을 지은 여사님은 계속해서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조금 불편한 상황 속에서 여사님의 지시에 지지고 볶기를 한참 하니 겨울에 한층 다가선 날씨가 추워졌는지 벌써 퇴근한 해 덕분에 아직 여섯 시 밖에 안 됐는데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밥만 안치면 되겠네.”
“네.”

허리를 톡톡 두들기며 말한 여사님이 빙글 웃으며 앞치마를 풀었다.
뒷정리를 마친 나도 여사님에게 앞치마를 받아 냉장고 옆 벽걸이에 걸고 여사님의 손에 이끌려 거실에서 한참 담소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지 오랜만에 만나 궁금한  많으셨던 여사님은 나와 영철이에게 끊임없이 질문했고, 대부분 영철이의 답변으로 무난히 넘겼다.
한참을 담소를 가장한 심문의 시간을 보내다가 여사님은 슬슬 밥을 안쳐야겠다며 밥솥에 불을 붙였고, 밥이 거의 다 됐을 무렵 벨이 울렸다.

-딩동-!

찾아올 사람은 한 명 뿐이라 굳이 확인  필요도 없었다.
조금 긴장이 된 가슴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모자를 따라 현관 앞에 섰다.
현관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남성.
소싯적 여자들을 꽤 울렸을 법한 큰 키의 미중년이 영철이가 열은 문을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왔어?”
“왔어요? 아빠?”

 모자에게 대충 눈짓으로 인사를 한 회장님은 곧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김아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인사를 받은 회장님은 영철이에게 봉투 하나를 주셨다.

“이게 뭐에요?”
“네 선물이지 뭐긴.”

퉁명스레 말씀하시지만 조금 쑥스러워 하시는 모습이 내겐 보였다.
예전에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아 보이는 회장님의 모습에 조금 안도를 했다.

“배고프지? 밥부터 먹어.”
“그래.”

회장님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은 여사님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부자가 따라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여사님과 같이 만든 저녁을 식탁에 한가득 차리니 어디 이름난 한정식 부럽지 않았다.
음…당분간 메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맛있네.”

미역국을 한 입 맛보더니 맛있다는 회장님의 말에 모두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반찬들이야 잘 아는 맛이기에 오랜만에 맛보는 여사님의 손길이 들어간 반찬부터 열심히 집어 먹었다.
회장님이나 영철이도  배가 고팠었는지 말없이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여사님이 내가 만든 것들이라며 회장님의  위에 반찬을 얹어주며 하는 말소리들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조용히 밥을 먹다가 밥공기가 반 정도 사라졌을 때 회장님이 입을 열었다.

“집사람하고 영철이한테 말은 많이 들었는데. 그래. 아영씨.”
“네.”
“아무래도 식은 봄이 좋겠지?”
“콜록. 네헤?”

이제껏 말이 없다가 별다른 표정 없이 핵폭탄을 떨어트리는 회장님의말씀에 급히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하는 내 등을 쓸어주면서 영철이가 답했다.

“저 아직 인턴이에요.”
“곧 정직원 될 건데 뭐. 그래서 싫다고?”
“싫긴요. 근데 저희 결혼식은  하려고요.”

너는 왜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냐? 응?

“아영이가 지인이 없기도 하고 결혼식 하게 되면 제가 아빠 아들인거 회사 사람들이 다 알잖아요.”
“흠.”
“그래도 결혼식은 하는 좋지 않니? 아가. 말 좀 해봐. 여자에겐 최고의 이벤트인데 그냥 넘기기 아쉽지 않아?”

어머니. 저는 결혼식 이벤트 따위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저도 결혼식은 좀 그래서요. 아하하.”

차마 결혼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수는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뭐. 요즘 결혼식  하는 사람들 많긴 하다더라. 부담되면 굳이  해도 돼.”
“그래도…….”
“아영씨한텐 부담 될 수 있지. 언급은  하려고 했는데 결혼식 하면 신부석이 텅텅 비게 될 건데 우리야 괜찮다고 쳐도 꼭 별 거 아닌 놈들이 이때다 싶으면 물어뜯으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어휴.”

여사님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지만 역시 회장님은 배려가 있으신 분이다.
내 사정을 생각해서 결혼식은 없어도 된다고 하시는 거 보니 예나 지금이나 알게 모르게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배신 거 같다.
회장님 같은 집안은 결혼식도 중요한 일라고 들었는데도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시는 거 보면  대단하시다.
뭐, 애초에 나와 같이 뭣도 없는 사람이 자식과 결혼한다는 걸 반대하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지.
아니, 그런데 저는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허들인디요.
일부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훅 들어오니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뭐, 결혼식  할 거면 빨리 혼인신고나 작성 해.”
“음…그래도 아직  모아둔 것도 별로 없는데…….”
“네가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어? 따로 집을  필요도 없고, 혼수도 필요 없는데.”
“그, 그런가?”
“지인들은 벌써 손주도 줄줄이 보고 있더라.”
“맞아. 안 그래도 내 친구들도 손주 자랑한다고 나는 언제 보냐고 얼마나 극성인지…….”

속상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여사님을 보니 좀 안쓰럽긴 했다.
   사정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결혼할 때 못하고 늦게 한 편이라 친가는 물론 주변인들의 자식들과는 나이차가 좀 있었다.
요즘이야 서른이 넘어 결혼하는 사람들이 흔하지만 예전에는 20대 결혼이 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미 있는  자식이라 더 빠르면 빨랐지 늦을 이유는 없었기에 다른 부유층 지인들은 슬슬 손주들을 볼 때였다.
나름 영철이가 나를 위해서 결혼을 늦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부모님 때문이었을까?

“그럼 올해 가기 전에 혼인신고 할게요.”

영철아?

“어머. 그래?”
“흠흠.  생각했다. 아영씨도 괜찮죠?”
“새아가. 막 부담스럽거나 그런 거 아니지? 너무 우리 생각만 몰아세우는 거 아니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씀하시는 여사님과 은근한 기대감을 가져오는 회장님의 시선에 차마 ‘아직 결혼은 물론 결혼의 ㄱ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할 수 없었다.
두 분의 간절한 시선을 보니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날 도와준  분에 대한 고마운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기까지 하니…….
환장하겠네에에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거절해.”

부모님이 보고 있는데도 허리를 감아오며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잔뜩 기대감에 들 뜬 얼굴이었다.
그리고  결국 두 분의 시선을 못 이기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네’ 라고 답했다.
하하. 인생. 장가가 아니라 시집을 가게 됐고, 올해는 이제 약  달이 남았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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