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6화.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약속의 날. 스튜디오에 도착해 오늘 입을 샘플을 입어보았다.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린 순백의 속옷. 가터벨트는 처음 착용해 봤다. 속옷의 상태를 보아하니 평소에 입을만한 것은 아니고 므흣한밤을 위한 이벤트속옷 같다.
“잘 어울리시네요.”
내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칭찬하는 강대표는 계속해서 내 포즈를 지시하며 촬영을 했다. 어차피 얼굴은 안 나오기에 표정연기까지 할 필요는 없어 촬영을 하는 동안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다만 내 몸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얼굴까지 공개하며 찍히는 것에 조금 부끄러울 뿐. 강대표에게 속옷만 입은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다. 남탕에 가면 다들 벗고 다니지 않는가?
그 생각은 현재 이 모습으로 변한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들 그렇듯이 남자끼리 이런 모습을 찍는 건 좀 많이 부끄럽지 않겠어? 게다가 저 강대표는 내가 이런저런 영상을 찍은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그것 때문에 더 부끄러운 것.
까놓고 말해서 강대표가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실수로 들어왔다고 막 부끄러운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요. 다 됐습니다. 한 번 보실래요?”
다양한 포즈와 각도로 촬영을 마친 강대표는 나를 불러 같이 보겠냐고 물었다. 흠흠. 전문가의 솜씨 좀 볼까?
“어때요?”
“어……제가 말하긴 뭐하지만 정말 잘 찍혔네요. 표정이 좀 웃기긴 하지만요.”
몸과는 달리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채 초점 안 맞는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자 몸을 찍혔다는 사실보다 더 부끄러웠다.
“쿡쿡. 뭐, 카메라에 익숙한 분들 아니면 다 비슷해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강대표.
다만 저 안경너머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만 좀 어떻게 해줬으면 싶다.
왠지 저 눈빛을 볼 때마다 강대표의 머릿속에서 내가 무슨 짓이라도 당하는 것 같거든.
“제가 부담스러우신가요?”
대놓고 직구. 엌.
“아, 예. 뭐…….”
이제는 전신을 태워버릴 기세로 바라보는 통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자 강대표는 내게서 눈을 돌렸다.
“험험. 죄송합니다. 제가 미인들만 보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요.”
엄……이거 작업은 아니지? 평생 여자한테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여자로 변한 이후에도 저렇게 대놓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못 봐서 오락가락했다. 나 남자친구 있는 거 아니까 그런 건 아니……겠지?
“아하하. 칭찬이시죠?”
“네. 아, 이러다간 제가 못 견딜 거 같으니 일 얘기로 넘어가죠. 하하.”
뭘 못 견디겠는지는 물어보지 말도록 하자.
“그게 좋겠네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화재를 넘긴 그는 다시 일 얘기로 넘어와 앞으로 이 사진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사진을 찍고 후보정이 들어가요. 얼굴이나 피부 톤. 군살 같은걸 깎아 내거나 조금 더 화사하게 바꾸는 거죠. 얼굴이 공개되는 모델들은 얼굴도 조금씩은 만져요. 요즘 증명사진에서도 보정 많이 하잖아요? 그런 거죠.”
증명사진 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다. 이 몸으로 바뀌고 다음 날 택배로 온 신분증. 난 찍은 적도 없는 증명사진이 박혀 있었지 아마? 갑자기 소름이 돋네.
“그런데 아영씨는 어차피 얼굴은 공개가 안 되니 얼굴 보정은 필요 없고, 주변에 맞춰서 그림자 작업만 좀 하면 될 거 같아요. 워낙 몸이 좋으셔서 딱히 깎거나 살을 덧댈 필요도 없네요.”
“칭찬 고맙다고 해야겠죠?”
“하하.”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조금 불편했던 분위기가 밝게 변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고 아마 다음 촬영은 삼일 후 정도 되겠네요. 이번엔 속옷이 아니라 이벤트 의류 같은 거 찍을 겁니다. 그 간호복이나 바니걸 같은 거요.”
하긴강대표가 처음엔 속옷판매 사이트라고 소개했었지만 막상 사이트 들어가 보면 속옷 말고도 연인들의 이벤트를 위한 여러 종류의 의류도판매했었다.
“네. 그럼 3일 후에 보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예. 옷 갈아입고 퇴근 하세요. 오늘 촬영 페이는 내일 오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
내가 탈의실로 들어가자 강대표는 직원들을 불러 같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첫 촬영의 소감은? 잘 할 수 있을지 불안했던 마음과는 달리 쉽게 진행 된 덕에 약간의 수치심만 제외하면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어요. 나중에 촬영일 전에 시간 공지 해 드릴게요.”
직원들에게 모두 인사를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오자 아직도 후덥지근한 가을 날씨가 반겼다.
이놈의 날씨는 언제 쯤 선선해 질 것인지…….
스튜디오를 나와 마스크를 끼고 버스에 올라 폰을 들어 핥짝넷에 접속하자 보이는 수많은 메시지.
지난 4인 플레이 이후 이렇다 할 영상이나 사진을 업로드 안 해서 활동을 접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딱히 근황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기에 메시지들을 전부 읽기만 하고 무시하는데 슬쩍 시선이 느껴져 위를 올려다보자 한 남자가 손잡이를 잡은 채 졸고 있었다.
퇴근시간 근처여서 그런지 탔을 때완 달리 어느새 가득 찬 사람들 틈에 아슬하게 졸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언젠가는 주변인에게 사고를 칠 것 같아 그를 툭툭 쳐 깨운 후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두 정거장 정도만 가면 도착하기 때문에 가득 찬 사람들을 비집고 뒷문에 도착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분명 시선을 느꼈지만 아까 졸고 있던 사람을 제외하곤 저마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배경을 보는 사람들 뿐. 쓸데없이 민감하게 굴었나봤나 싶어 흔들거리는 버스에 손잡이를 잡고 있기를 잠시.
종착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그대로 집으로 향하려다 오늘부터 2일 일정으로 회사 워크샵을 간 영철이 생각나자 집에 가야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돌렸다.
변하고 초기엔 영철이와 이곳저곳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며 많이 싸돌아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없이 방콕생활만 하고있었다.
뭐…영철이가 바빠져서 나 혼자 방치된 것이 가장 큰 이유긴 하지만 너무 방콕생활만 하다 보니 조금 전처럼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쓰는 것일 터.
좀 밖에도 돌아다녀야 부정적인 생각이 날아갈 것 같아 시장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일단 저녁시간이 다가오니 이르지만 뭣 좀 먹을까?’
점심을 걸러서 그런지 배가 고파오자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장을 보는 사람들이 복작대는 시장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외식인 만큼 평소 집에서도 해먹기 힘든 것을 먹어보자 생각했기에 동네에서 꽤 맛있다고 소문난 이곳에 도착한 것.
남자였을 때는 영철이와 가끔 해장을 하러 오기도 했던 이곳은 바로 국밥집이다. 코리안패스트푸드 국밥.
가성비 킹인 국밥.
빠르게 맛있는 한 끼를 먹기엔 국밥집만한 곳도 없다.
너무 뜨거워 먹는 건 슬로우지만 나오는 시간만큼은 패스트푸드와 비슷하며 혼밥 하기에도 좋은 메뉴다.
아무 국밥집만 봐도 혼자서 소주 한 잔에 국밥 드시는 어르신들 많지 않은가? 킁킁. 벌써부터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어서 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주인아줌마의 인사를 받아 구석자리에 위치해 순대국밥 하나를 시켰다.
식당 특성상 지금 시간대에 혼자 있는 젊은 여자는 나밖에 없어 조금 시선이 끌렸는지 식당을 둘러보는 와중에 여러 남자들과 시선이 간간히 마주쳤다.
모르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면 둘러보는 척 시선을 피하는 나와는 달리 왜인지 시선이 꽂히는 것 같은 기분에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려 웹서핑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시켰던 순대국밥이 도착했다. 마스크를 벗고 냄새를 맡아본다.
냄새 좋다.
국물을 수저로 한 모금 떠 마셔보고 후추와 새우젓, 들깨가루로 간을 한 후 다시 마셔봤다.
역시 이런 국밥은 밖에서 사먹는 것이 최고다.
집에서는 제대로 만들어 먹기가 번거롭기에 맛있는 국밥을 먹으려면 국밥집으로 가야된다.
진하게 우린 돼지육수가 혀를 감자 행복감이 차오른다.
으음…이 몸으로 바뀌고 이상하게 먹는 것에 지나치게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런 기분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뜨거우니 후후 불며 방해되는 머리를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귀 뒤로 넘기며 신나게 앗뜨…….
한참을 그렇게 남의 신경도 안 쓰고 국밥 한 그릇을 싹싹 클리어한 난 왜 이렇게 예쁘고 맛있게 먹느냐는 소리를 하는 아줌마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계산했다.
‘아 배불러.’
불러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소화도 시킬 겸 시장을 벗어나 오락시설이 몰려 있는 거리로 나왔다.
‘오랜만에 오락실 한 번 들려?’
군제대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오락실. 피시방은 가 본적 있어도 오락실은 가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지나가다가 영철이와 내기로 펀치머신 점수로 밥 사기 같은 건 했지만.
‘별게 다 있네.’
오랜만에 들른 오락실은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예전같이 밖에는 펀치머신 같은 기계와 내부엔 여러 일반적인 아케이드게임들보단 리듬게임이나 건슈팅, 에어건으로 표적 맞추기 같은 게임들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할 게 없네.’
오락실이란 것은 혼자 오면 할 게 너무 없었다는 사실.
오락실도 인싸 놀이시설이구나…….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흑흑. 인싸 다 죽어.